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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Jun 06. 2024

오빠의 사십춘기

아름다운 독립을 위하여

나는 오빠가 여덟 살 때 태어났다. 우리는 나이차이가 많이 나지만 엄마가 없을 때 서로 의지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많이 싸우며 지냈다. 친구들은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것치곤 우리가 친하다고 신기해한다. 오빠는 늘 장난을 많이 쳤다. 나는 그런 오빠를 아빠처럼, 보호자처럼 따르기도 했고 친구처럼, 엄마처럼 생각하기도 했다. 엄마에게 듣기론 오빠는 장난꾸러기라서 아빠에게 많이 혼났다고 한다. 그 옆에서 같이 까불다 오빠가 혼나면 조용해지는 나는 눈치 빠른 여동생이었다고 한다. 내 기억에 오빠는 늘 뭐든 잘하고 멋진 오빠였다. 여느 남자아이들처럼 자전거 타며 운동신경 뽐내는 걸 좋아했고 실제로도 운동신경이 좋았다. 잘생겨서 인기도 많고 반장도 했을 만큼 모범생이었다. 학원을 빠지고 오락실에서 오락하다 엄마에게 걸려 혼나던 그런 천방지축일 때도 있었다. 나도 오빠처럼 자전거도 잘 타고 싶었고 오락도 잘하고 싶었다. 어쩌면 일곱 살 어린 나에게 오빠는 아이돌이었던 것도 같다. 평범하지만 멋있었던 우리 오빠는 열두 살에 상주가 되었다. 외삼촌들은 항상 오빠에게 이제부터 네가 가장이니까 엄마와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해댔다. 내 눈에는 아직 학생 같은 오빠인데 가장이라는 말은 마치 아빠양복을 입은 꼬마를 보는 것처럼 어색하고 억지스럽고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게 오빠에게도 사춘기가 찾아왔지만 어른들이, 아니 엄마가 입혀준 아빠양복을 벗어던지기란 어려워 보였다. 아버지를 잃은 아들의 사춘기 방황은 엄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십춘기까지 이어져 여전히 길을 못 찾고 있는 듯하다.


나는 엄마와 오빠사이에서 주로 서로를 대변해 주는 중간역할을 맡아왔다. 그날도 엄마는 오빠가 자기를 말로 몰아세우고 둘이 함께 운영하는 세차장에 오빠가 먹은 빈 술병이 가득 놓인 걸 보고 속상하다고 하소연했다.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라앉은 목소리의 오빠가 많이 힘든 것 같아 보였다. 사실 이런 일이 새롭진 않았다. 세차장을 한지 삼 년이 되었는 데 둘은 매번 부딪혔다. 둘 사이의 서사는 어린 시절부터다. 엄마는 스물두 살에 엄마가 되었고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서 엄마와 아빠는 맞벌이를 해야 했다. 오빠는 시골 할머니댁에서 자랐다. 주말에만 엄마와 아빠가 시골로 가서 오빠의 얼굴을 보곤 했다고 한다. 사실 낳은 정보다 키운정이라는 데 엄마는 가난 때문에 자기 손으로 오빠의 어린 시절을 돌보지 못했던 날들을 한스러워했다. 그래서 나는 형편이 좋아지고 나서 자기 손으로 키울 수 있을 때 낳았다고 한다. 그것도 백일이 끝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오빠는 시골에서 할머니와 고모들과 작은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할머니집에 오빠와 가면 늘 밥상에 반찬들은 어느새 오빠 앞으로 가있었다. 치킨을 먹을 때면 나는 알아서 발라먹고 오빠는 할머니가 살을 발라 그릇에 놓아주면 아기새처럼 받아먹었다. 사실 서운하거나 싫지 않았다. 장손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오빠 중학교 2학년,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일 때 비극이 시작됐다. 엄마는 아무래도 남편 없는 현실에서 떠나고도 싶었을 것이며 야망이 있는 편인데 아빠는 없지만 더 잘 키우고 싶은 부모마음에 공부도 잘하고 안정적으로 생활을 잘하던 오빠와 초등학교에 막 입학해 엄마와 떨어지면 우는 나를 데리고 유학길에 떠났다. 그러나 그쪽 환경은 생각보다 좋지 않았으며 대부분 한국에서 사고를 치거나 적응을 못하는 학생들이 와 있던 한인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술담배를 하는 무리에서 오빠는 적응하지 못했고 한국으로 돌아가길 바랐다. 그러나 엄마는 완강히 거부했다. 사실 나도 그곳의 생활이 한국에서 셋이 지내는 생활보다 힘들고 버거웠다. 더 많은 경험을 우리에게 주고 싶었던 엄마의 마음은 의심하지 않지만 그 당시 우리에게는 안 해도 되는 경험이었던 건 맞다. 1년 뒤 IMF가 터졌고 엄마는 가지고 간 돈이 없어 나를 데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1년 뒤 오빠가 들어왔는 데 오빠는 이미 그곳에서 적응을 했던 터라 한국에 들어오기를 거부했지만 들어와야 했다. 그때 오빠 나이는 17세였다. 교육부에서 외국 중학교 과정을 인정해주지 않아 오빠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한 학년을 유급해서 다녀야 했다. 문제는 본인의 의지가 아닌 비극을 두 번이나 겪었으니 너무도 힘들어했다. 학교에 가지 않으려는 날이 많았고 엄마는 그런 오빠를 꾸역꾸역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오빠는 혼자서 버스를 타고 다닐 수 있는 나이임에도 엄마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오빠의 인생이 어렵게 된 것을 엄마에게 벌주기라도 하듯 마음을 잡지 못하고 본인인생을 갉아먹었다. 또 엄마는 남편 없는 자리를 우리 둘로 채우려 했다. 아빠의 부재로 인해 우리 셋의 관계는 점점 비틀어져가고 있었으나 엄마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모르는 듯하다.


나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울 때까지만 해도 제대로 된 독립을 하지 못했다. 엄마에게 경제적 지원을 일부 받았다. 엄마는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부모의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자기만족에 취해있었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빈둥지증후군이었던 것도 같다. 그렇게 우리 모녀는 엉겨 붙어 있었는 데 끊어진 사건이 생겼다. 아이가 여섯 살 무렵 아이가 유치원에 간 사이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 데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에게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내 삶은 불만투성이였고 관계도 좋지 않았다. 엄마는 다짜고짜 "너, 언제 독립할 거야?"라고 물었고 바로 나는 알겠다 바로 일 구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심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지긋지긋한 관계가 끝나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을까 마음은 후련했다. 아이가 기관에 있는 시간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맘카페에서 본 물류센터 소분헬퍼에 지원을 했고 바로 출근을 하라고 연락이 왔다. 그렇게 나는 엄마에게서 완전한 독립을 했다. 우리는 그전보다 관계가 좋아졌고 서로에게 바라는 것도 줄고 훨씬 건강해졌다. 일하느라 몸은 고됐지만 마음만은 행복했다. 아마도 나를 놓을 수 있었던 건 엄마에게 새로운 반려자가 생겨서였던 것 같다. 좋은 일이다. 엄마는 우리들로 채우려 했지만 채워지지 않았던 남편의 빈자리를 그분을 통해 어느 정도는 채운 것 같아 보기 좋았다.


문제는 오빠가 아직도 독립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부모 자식 사이의 끈은 자식은 끊어내지 못하고 부모가 놓아야 놓아지는 것이라고 상담할 때 들었다.  정말 그렇다. 나의 경험도 엄마가 먼저 놓았다. 오빠는 엄마를 놓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의 도움 없이 무언가를 해본 적이 별로 없다. 엄마는 늘 오빠보다 한발 빨랐다. 오빠의 인생설계는 전부 엄마가 했다. 그러니 잘 되지 않았을 때 책임도 엄마몫이었다. 옆에서 보기도 힘든데 본인들은 얼마나 힘들까 싶다. 오빠는 엄마가 주선한 같은 교회의 언니와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오빠는 엄마가 다니는 외삼촌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오빠는 사장의 조카라는 딱지를 부담스러워하고 어려워했다. 그러다 어떤 일이 생기면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다른 회사에 갔지만 월급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회사였다고 한다. 그 무렵 엄마는 세차창을 인수할 기회가 생겼고 손세차와 셀프세차가 있는 데 손세차를 오빠에게 제안했고 오빠는 받아들였다. 그렇게 둘은 함께 세차장을 하기 시작했다. 독립과는 더 멀어지게 되었다. 서로 얽히고설킨 관계에서 오빠와 엄마는 매일 힘들어했다. 오빠는 친구들이 많고 사람들과 친화적으로 지내는 걸 잘했지만 영엽은 또 다른 영역이었다. 그런 부분에서 엄마와 부딪혔고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오빠의 인생을 어렵게 했다는 생각에 늘 져주는 건 엄마였다. 그럴수록 오빠의 분노는 점점 더 커졌고 원망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독립이 되지 않은 상태는 지속됐으며 오빠의 무기력은 점점 운명이 되는 듯했다. 엄마도 고통스럽지만 제일 힘든 건 오빠라는 생각을 들었다. 엄마의 집착과 희생의 굴레에서 완전히 독립한 선배로서 오빠가 나처럼 독립하도록 돕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요즘 술을 먹고 실수를 해서 친구들하고 새언니에게 잔소리를 들었단 소리를 듣고 오빠의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오빠도 정신과에 간다고 했다. 우울증과 불면증으로 약을 먹는다고 했다. 사실 문제는 세차장을 인수하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돈 문제까지 얽혀있어 둘 사이는 더 골치가 아프다는 것이었다. 손세차의 수익은 오빠가, 셀프세차의 수익은 엄마가 가져가기로 했는 데 엄마가 외할머니를 돌보게 되면서 셀프세차까지 오빠가 맡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이해관계들이 얽히고설켜 너무도 복잡했다. 이런저런 문제를 듣다 보니 오빠의 상태가 위태로워 보였다. 그래서 나는 이참에 나 이사한 것도 볼 겸 제주에 와서 혼자 걸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떤지 제안했고 오빠는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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