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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Jun 06. 2024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되는 것

지피지기의 자세

성격검사 결과를 듣는 날이다. 별 다른 건 없겠지만 검사를 했으니 궁금했다. 진료실에 들어갈 때는 항상 노크를 하게 된다. 흡 하고 숨을 참는 것처럼. 내가 인사를 하고 의자에 앉으면 의사 선생님은 진료를 시작한다.


"잘 지내셨어요?”

"네.”

“어떻게 지내셨어요? 시댁에서 연락은...”

“없어요. 그런데 제가 요 며칠 조증이 온 것 같아서요. 지금은 날씨 탓인지 가라앉기는 했는데...”

“조증이 온 것 같다는 게 어떤 걸까요?”

“음 에너지가 넘친다랄까요. 전에는 말하기도 귀찮아서 말도 잘 안 하고 했는데 말도 많아진 것 같고 잠도 세 시간밖에 자지 못했어요.”

“그렇게 주무시고 낮에 활동은 계속하셨어요?”

“네. 그렇게 이틀 지내고 어제는 너무 졸려서 그냥 잤어요.”

“몇 시간 주무셨어요?”

“9시부터 6시까지 잔 것 같아요.”

”돈을 많이 쓰셨나요?”

“그러진 않았어요.”

“예민해지셨나요?”

“아니요.”

의사 선생님은 이외에 몇 가지 증상들을 물어보고 조증까지는 아닌 것 같고 감정기복이 있던 것 같다고 했다. 사실 내가 조증이 왔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지난 검사결과지에서 우울증 외에 양극성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육지에서는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만 들었고 양극성 장애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검색하다 보니 이상하게 평소보다 활력이 넘치고 말이 많아지는 증상이 조증의 증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조증이 왔다고 생각했던 이틀 동안 엄마와 오빠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맡은 이야기에 대해 말했다. 의사 선생님은 맡게 된 큰 역할이 힘들진 않는지, 스트레스받는 상황인 것 같다며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큰 역할인가요? 늘 있던 일이라 그렇게 생각은 못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둘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던 건 맞는 것 같네요. 음, 이 상황이 스트레스받는다고는 생각을 못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그럼요. 스트레스받는 상황이 맞으세요.”

”그렇군요..”


“우리 지난주에 한 성격 검사 결과를 보면 환자분이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시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본인의 감정으로부터 거리를 두시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타인의 감정도 이해가 잘 안 되실 거예요. 방어기제가 내재화, 회피, 감정억압이세요. 불편한 감정을 회피하고 말씀을 안 하세요. 그리고 자신에게 칭찬이 인색하시다 보니 타인에게도 칭찬이 인색할 수 있어요. 그리고 완벽주의 성향이 있으셔서 철두철미한데 반해 유연한 대처나 융통성이 부족해 보이세요. 그리고 세세한 것에 몰입해서 큰 흐름 파악이 안 되시는 경우가 많으세요. ”

"네.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선생님, 성격도 변할 수가 있나요?”

"안 변합니다. ”

"그렇군요...”

"제가 너무 단호하게 이야기했나요? 성격은 안 바뀌지만 알고 있으면 도움이 돼요. "

"아, 네. ”

"스스로 성격을 알고 있으면 상황을 이해하기가 훨씬 수월해요. 무슨 말인지 이해되시죠? "

"네. 그리고 요즘 식욕도 없고 그래요.”

“아마, 그건 폭세틴이라는 감정조절하는 약이 있는데 그 약 때문에 그럴 거예요. 조금 적응하시면 괜찮아지실 거예요.”

“처음엔 안 그랬는데..”

“약이 어느 정도 몸에 쌓여야 그런 증상이 나타날 수 있어요. 점점 적응되실 거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네. ”

“잠은 잘 주무셨나요?”

“잠이 안 와서 계속 자려고 노력하다가 세 시간 자고 눈 떠지고 그러더라고요.”

“어.. 잠을 잘 못 주무시는 것 같네요. 잠자는 약 용량을 조금 더 늘려 볼게요. “

"이렇게 드셔보시고 2주 뒤에 뵐게요. "

"네. 감사합니다. "


그렇다. 무엇이든 정확한 정보는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된다. 사실 내가 감정으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한다는 건 의외였다. 너무 감정에 매몰돼 문제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격검사 결과는 어렸을 때부터 듣던 단점들이라 너무도 맞는 말이었다. 숲을 보라는 말은 대학교 다닐 때 선배한테도 들었던 적이 있다. 그게 성격검사에서도 나올 줄은 몰랐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는데 지금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알고 있다는 건 뭘까.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걸까. 계속 반복되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니 나는 멍청하게도 알아듣지 못하고 살아왔다. 순간 시댁일을 토로하던 내가 떠오르면서 얼굴에 뜨거운 숯을 한 바가지 퍼부은 것처럼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시댁이 문제라기보다는 받아들이는 내가 문제였다는 생각에 남편에게 화를 냈던 나의 모습이 괴상하게 느껴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가끔 상황의 해석을 부정적으로 하는 아이를 볼 때 옆에서 들어주며 오해를 풀어주는 상황들이 많은데 나에게는 그런 어른이 없어서 이렇게 된 걸까. 나에겐 늘 정죄하는 엄마만 있었을 뿐이었다. 엄마는 재판관이었다. 이런 상황이 속상했다고 말하면 잘했고 못했고를 따지고 가르곤 했다. 그런 방식이 나도 모르게 습득된 채 어른이 되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아이에게도 그렇게 하려는 내 모습이 보이면 스스로 경계한다. 내가 엄마에게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방식으로 아이를 대하려니 엄청 뚝딱 거리지만 아이 감정에 공감하고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상황을 조금은 둥글둥글하게 이럴 수도 있다고 설명하는데, 그 모습조차도 재판관처럼 느껴져 괴로울 때가 있다. 엄마처럼 되기 싫은데 엄마가 아닌 방식이 낯설고 잘 몰라 매번 실수를 저지른다. 나에게서 보이는 엄마의 모습은 용서할 수가 없다. 결국 또 엄마다. 엄마하고는 다소 먼 거리를 유지할 때만이 삶의 평온함을 가질 수 있다. 세차장 사건에 관여하면서 거리는 좁혀졌고 엄마가 우리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분노와 원망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듯했다. 다시 멀어지도록 해야 할 때다. 아니 이제는 안다. 엄마라는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할 때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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