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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Jun 07. 2024

그림책 수업은 언제나 즐거워

그 사람이 진짜 불행해지지 않도록

그림책 모임이 있는 수요일. 오늘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수업 후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 날인데, 애호박볶음을 맡은 나는 어제 시내에 가서 사 온 애호박을 열심히 썰어서 볶았다. 15인분 양이 가늠이 되지 않아 자꾸 한주먹씩 들었다 놓으며 양을 조절했다. 다른 선생님들도 아침시간을 분주하게 보내고 계실 모습을 생각하면서 또 소풍 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서른여섯이 되어서야 연대감이 주는 행복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나이도 환경도 직업도 다른 우리가 그림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하나가 되는 모습이 참 신기하다. 각자 한 가지씩 해오기로 했던 나물이며 채소볶음이며 양손 가득 들고 오셨다. 사실 먹기 전이었지만 맛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차와 쿠키까지 준비해 오신 선생님들도 계셨다. 또 배운다. 이런 센스를. 이런 다정함을.


나는 그림책 모임에서 좋은 엄마이자 선배님들을 만난다. 그래서 엄마로부터 건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기억에 엄마는 나와 무엇을 함께 한다기보다 본인 위주의 활동을 내가 돕거나 자신의 모임에 나를 데려가는 식으로 나와 시간을 보냈다. 엄마는 쉬는 날 교회에 가거나 집정리와 청소, 빨래를 하곤 했다.(음식은 절대 안 함 주의) 책 한 권을 읽어주지 않았던 엄마의 모습이 아쉬워 나는 아이를 낳으면 꼭 책을 읽어주는 엄마가 될 거라는 다짐을 하고 지금까지 실천하고 있다. 그림책 수업은 그날 당번 선생님이 함께 이야기 나누기로 정한 그림책을 읽어주시면 모두가 함께 보고 듣곤 하는데 그 순간만큼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 엄마가 읽어주는 그림책을 보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어린 시절 받지 못한 사랑을 받은 느낌까지 들곤 한다. 그렇게 그림책 수업은 힐링의 시간이 되어가고 있다. 또한 그림책을 읽으면서 주고받는 유쾌하고 명랑한 대화 속에서  어디에서도 배우지 못한 즐거운 인생을 사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림책 <더우면 벗으면 되지>


오늘의 그림책은 <더우면 벗으면 되지>라는 일본작가 요시타케 신스케 님의 책이었다. 그림책에 조예가 깊으신 선생님께서 그림에 대해 설명해 주시며 아주 재미있게 읽어주셨다. 우리 삶은 항상 문제를 만나곤 한다. 그런 인생의 여정에서 유머는 중요하다.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들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그림책이었다. 한 페이지에 더우면 / 다음페이지에 벗으면 되지.라고 쓰여있고 관련된 그림들이 귀엽게 그려져 있다. 누군가의 불행을 바란다면 / 파도가 밀려오는 물가에다 쓰면 되지. (불행해라라고) 이 장면이 꽤나 나에게 오래 남았다. 엄마는 항상 나에게 상처를 받았더라도 그 사람의 불행을 바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런 마음이 나를 더 불행하게 만들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불행을 바라지 못해 마음의 병을 얻었다. 이럴 바엔 큰 외숙모의 불행이나 실컷 바라고 말걸 그랬다.


얼마 전 엄마는 큰 외숙모가 한쪽 눈이 안 보이고 피눈물이 난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전해주었다. 사실 그 말을 듣고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였다. 그래도 한때 나를 먹이고 입혀주신 분이 아프다니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내 눈에서 눈물 나게 하더니 본인은 피눈물을 흘리는구먼. 옛말 틀린 게 하나도 없구나. '라고 생각하며 통쾌하기도 했다. 그러나 금세 나는 거품 빠진 맥주를 마시는 것처럼 씁쓸해졌다. 내가 바랐던 모습은 이 모습이 아니었음을 직감했다. 이것 말고도 큰 외숙모의 불행은 또 있었다. 큰 외숙모 아들이 결혼식을 앞두고 이혼소송에 들어갔다는 소식이었다. 결혼식 전에 혼인신고를 마치고 함께 지내고 있었는데 사촌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결혼식 관련 계약금 전부와 예비신부이자 법적배우자에게 위자료를 청구해야 한다는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유책사유가 사촌에게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시작도 못해본 결혼에 이혼이라니 안타까웠다. 이 소식을 접하고 큰 외숙모는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제는 내가 큰 외숙모의 불행을 바라지 않아도 그 사람은 충분히 불행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누군가의 불행을 바랄 일이 생긴다면 이제 집에서 바다도 가깝겠다, 바다로 달려가 파도가 밀려오는 물가에 아무개 불행하라고 꼭 써야지. 그 사람이 진짜 불행해지지 않도록.


그림책 수업 활동은 서로 고민을 말하면 그림책에서처럼 센스 있고 유머러스한 조언을 던지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고민이란 게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림책 선생님들의 대나무숲에 외치는 순간 더 이상 고민이 아닌 게 되어버렸다. 나는 만나면 상처만 받게 되는 시부모님이 제주로 오신다는 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이라고 말했고 선생님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나에게 조언을 해주셨다. 가짜 깁스를 해라, 여행 간다고 해라, 결국 일하느라 바쁜 것이 최고라는 의견이 제일 많았다. 가짜 깁스와 각종 알바 추천을 받으며 한바탕 웃고 나니 묵직했던 고민이 솜사탕처럼 가벼워졌다. 또 한 선생님은 집에 이미 강아지가 두 마리나 있는데 얼마 전 알게 된 강아지가 눈에 밟혀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이라고 털어놓으셨다. 다른 선생님은 가족 모두가 찬성해서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입양해야 하는데 잘할 수 있을지 고민이라는 내용이었다. 선생님 눈에 밟히는 강아지를 다른 선생님이 입양해 가면 되겠다는 현명한 답이 나오는, 재밌는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다. 고민을 말할 때는 모두가 심각한 얼굴인데 끝나고 나면 다들 웃고 있었다.


환상의 비빔밥


이렇게 독후활동을 하고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빔밥 시간이 왔다. 큰 양푼에 준비해 온 모든 재료를 넣고 비볐다. 그렇게 완성된 비빔밥은 환상이었다. 마치 우리 모임 같았다.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 멋진 그림책 모임을 만들어 가는 모습이 정말 그랬다. 며칠 전까지 입맛이 없다고 토로했던 내가 제일 많이 먹은 것 같다.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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