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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Jun 10. 2024

제주의 휴일

한 발이 두 발이 되고

제주에 오고 휴일이 더 기다려진다. 그동안 육지에서 보냈던 휴일보다 즐겁고 여유로운 건 확실하다. 남편은 본인 때문에 제주까지 오게 되었다면서 나와 아이를 정말 살뜰히 챙긴다. 육지에서는 평일엔 거의 얼굴을 보지 못할 만큼 남편은 일에 치여 살았다. 정시에 퇴근하는 날을 손에 꼽았을 정도였는데 요즘은 야근하는 날이 손에 꼽힌다. 덕분에 남편은 체력도 좋아지고 얼굴에 생기가 돈다. 무엇보다 육아참여도가 현저히 늘었다. 남편의 정시 퇴근 덕분에 집안에서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아이는 늘 아빠를 기다리며 잠이 들고 아빠는 잠든 아이만 볼 수 있었다. 이제는 아빠와 함께 잠자리에 들고 함께 일어나 등교하는 일상이 아이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즐겁고 행복해 보인다. 제주에 오길 정말 잘했지.


오늘은 남편이 이전에 아이와 다녀온 클라이밍 센터에 또 가자고 했다. 이번에는 나도 하라고 해서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사실 운동을 좋아하지만 클라이밍은 해본 적도 없고 우울증이 심해지면서 무기력함 때문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생각하는 남편의 마음은 거절할 수가 없다. 최근 우울증 진단을 받은 이후로 남편은 육지에서는 바쁘다는 핑계로 신경을 못써줘서 미안하다며 제주에서는 많이 돕고 돌보겠다고 했다. 그래서 남편은 휴일마다 새로운 곳을 찾아서 데려가주고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도록 신경 써주고 도와준다. 요즘 약기운에 시도 때도 없이 잠이 쏟아져 소파와 침대, 식탁 할 것 없이 잠들어 버리는 내가 한심해 보일 수도 있는데, 그는 내가 잠들면 늘 이불을 덮어준다. 세상 다정 씨.


요즘 날씨가 좋아 클라이밍을 하고 바다에서 저녁까지 놀다 들어올 계획이었는데 하필 오늘 비가 와서 클라이밍만 하고 오기로 했다. 쉬는 날마다 비가 오는 것 같아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날씨는 운인 것을. 남편은 비가 와서 실내로 사람들이 몰렸는지 지난번 왔을 때 보다 사람들이 세 배는 많은 것 같다고 했다. 나와 아이는 장비 착용 후 주의사항을 듣고 클라이밍 하는 곳으로 입장했다. 처음 해보는 거라 조금 올라가고도 무서웠다. 사실 오기 전부터 또 졸음이 쏟아져 비몽사몽 한 채로 왔는데 여전히 잠이 깨지 않아 멍한 상태에서 오르려니 감각이 이상했다. 그런데 ”우와 엄마도 하는 거야? “ 라며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보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시도도 하지 않고 포기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평소에 내가 아이에게 잘하지 않아도 최선을 다하는 것을 강조하다 보니 더욱 그랬다.


들어온 이상 이것저것 다 해보고 가자는 결심을 했고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정신이 맑아졌다. 나중에는 다리가 떨리고 손에 땀이 나서 미끄러워지기도 했다. 다행히 안전줄이 묶여 있어서 사고가 나진 않았다. 물론 더 이상 길을 찾지 못해 중간에 내려온 것들도 있었다. 울퉁불퉁한 클라이밍 벽을 타고 올라가려니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벽 앞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시도도 안 하면 그저 벽에 불과하지만 한 발을 내딛는 순간 클라이밍이 시작된다고. 한 발이 두 발이 되고 점점 올라가게 된다고. 어쩌면 나는 인생의 벽 앞에서 한 발을 내딛고 중간쯤 올라가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한 발은 너무도 정직하게 한 발이었다. 조급함과 욕심 사이 어딘가에서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고 주저앉았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제는 안다. 한 발 한 발이 쌓여 결국 정상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동안 잊고 지냈던, 한 발 한 발 살아온 순간들도 분명히 있었다. 옆에서 나보다 더 높이 올라가는 아이가 나의 한 발 한 발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은 아이를 보며 놀란다. 진짜 많이 컸다고. 왜 이렇게 빨리 컸냐고. 그럴 때마다 남편은 속삭인다.


”애들이 얼마나 정직하게 크는데 1분 1초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놀리고 다 키워야 하는데, 아기 안 키워보면 모르지. 나도 그랬는걸.”


그렇다. 나의 1분 1초가, 한 발 한 발이 아이에게 있다. 엄마가 처음이라 매일이 새로워 두렵고 서툴지만 나는 오늘도 2950번째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나는 최근 또 다른, 새로운 한 발을 디뎠다. 바로 브런치. 기회를 주셨으니 이제 한 발 한 발 나아가려고 한다.



** 많이 부족하지만 제 글을 읽어주시고 애정해 주시는 독자 분들께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정글 같은 인생에서 제 글이 잠시나마 위로나 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한 자 한 자 적어 나갑니다. 초심 잃지 않는 작가가 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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