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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Jun 10. 2024

시댁단톡방

이제 그만 저는 빼주세요.

얼마 전까지 조용했던 시댁단톡방에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알림을 꺼놓은 채팅방이라 앞내용을 읽지 못해 채팅방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마지막 메시지만 밖에서 볼 수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지 않았지만 계속 읽지 않는다면 불통에 대한 훈계의 말씀을 들을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9년 차의 관록이랄까. 지난 3월 새로운 학교에 부임하신 어머니께 금귤나무 화분을 보내드렸는데 나무에서 열매가 열린 사진을 보내오셨다. 적당히 가벼운 리액션을 해야 했다. 그리고 친정 엄마가 관계가 좋지 않을 때도 아이 사진 좀 보내달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어머니, 아버지도 아이가 보고 싶으실 것 같아 최근에 찍은 아이 사진과 아이가 피아노 치는 동영상을 보내며 우리의 근황을 짧게 전했다.


어머니께서는 다음 달에는 꼭 제주도에 오고 싶으시다고 했다. 나는 내 마음과는 반대인 정해진 답을 말했다. 꼭 오시라고. 지난번 성격을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된다고 했던 의사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난 일이지만 시아버지 노쇼사건에 대해 말해버리고 싶었다. 말해버리고 털고 싶었다.


“제주의 여름, 꼭 오세요. 저번에 아버지 노쇼하셔서 너무 서운했어요....!! “라고 털어놨다. 아버지는 지금도 갈 수 있다고 답하셨다. 여전히 미안했다는 말을 안 하셨다. 그냥 그런 사람인 거다. 지금도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게 미안하다는 뜻이려니. 사과를 받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법륜스님의 말씀처럼 상대를 이해함으로써 내 마음을 편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나는 오바 육바 하며 “저희 집 시원하니까 따로 숙소 잡지 마시고 저희 집에서 주무시고요!! 차도 두대니까 공항으로 모시러 갈게요~!! “라고 했다. 저번에도 숙소 잡아 놓으시고 우리 집에서 주무셨으니 언제 숙소 가시나 기다리며 희망고문 할 필요 없이 그냥 집에서 주무시는 걸로 하는 게 차라리 나은 듯해서 그랬다. 어머니는 신난다고 하셨다. 구체적인 기간과 요일까지 정해주시며 우리 휴가 일정 잡히면 날짜 조정해서 바로 비행기표를 끊으시겠다고 하셨다. 진짜다. 내가 그렇게 만들고 말았다. 그런데 나는 사실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지난달에 급으로 카페에서 만난 제주 언니들과의 대화에서 그 구멍을 찾았다. 제주도 자치 행사가 동쪽에서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외박을 해야 한다는 핑계가 구멍이었다. 남편에게도 미리 말해놓았고 남편은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지만 오히려 나 때문에 남편이 부모과의 만남을 마음껏 즐기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본인은 절대 아니라고 하지만) 시부모님도 눈엣가시처럼 느껴지는 며느리가 없는 상황에서 아들과 손자를 보시면 마음껏 더 즐기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자치 행사를 핑계 삼아 여행을 가는 것이 아무리 봐도 모두가 해피엔딩이 되는, 일석이조의 멋진 해결책이었다. 진짜 그렇게 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시댁단톡방의 역사는 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결혼하기 전 어느 날 나와 남편은 갑자기 단톡방에 초대가 되었고 시부모님, 형님부부, 우리 부부가 있었다. 모든 수다와 만남의 약속, 제사와 결혼식 관련 이야기 등 모든 소통이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왠지 모르게 나는 그 방이 불편했다. 재미도 없었고 대화에 어떻게 낄 줄을 몰라서였을까. 결혼한 자식들을  떠나보내려니 빈 둥지 증후군이 무서워 자녀들의 짝꿍까지 식구라는 미명아래 두고 싶었던 걸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네 와 긍정을 뜻하는 맞장구 또는 동의하는 말만 할 수 있었다. 아마 시부모님은 자신들은 젊고 쿨하고 민주적(민주화 운동 세대)이라고 생각하시는 듯했다. 나에게도 발언권을 준다고 생각하고 계셨다. 그러나 내가 거절을 하거나 어려움을 내비칠 때면 시부모님들은 쿨하지 못했다. 그들은 내가 동의와 참여의사를 내비칠 때만 쿨했다. 시댁단톡방이 정말 문제의 씨앗이라고 처음 생각했던 적은 결혼 후 시사가 있는데 한복을 입고 오라는 것이었다. 일단은 서울에서 통영까지 가야 하는데 차가 없으면 무조건 시댁에서 자야 했다. 나는 그 자체가 너무 불편했을뿐더러 갈 차비도, 갈 시간도 만만치가 않았다. 모태신앙이었던 나는 무엇보다 시사가 무엇인지 몰라 남편에게 물었다. 시사는 동네 종갓집에서 집안 조상들께 올리는 제사인데 원래 참석하지도 않았는데 며느리 생기니까 인사시키려고 하는 것 같다며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때 재취업을 준비하고 있었고 시사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다. 이 사람이 좋아서 한 결혼이었는데 아내라는 왕관보다 며느리라는 왕관이 먼저 씌워지는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이런 황당한 소환사건들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 단톡방이었다.


지금은 형님부부가 이혼을 알린 이 후로 단톡방에는 시부모님과 우리 부부뿐이다. 그것도 남편이 형님에게 전화해 필요하다면 각자 가족끼리 따로따로 파는 게 맞는 것 같다고 말하고 형님을 단톡방에서 내보냈다. 그러다 며칠 후 아버지가 다시 형님을 초대했고 다시 남편이 말해서 형님은 또다시 나가게 되었다.(참 자식들을 힘들게 하는 아버지인 듯하다.) 그 이후 형님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사실 단톡방에 있다고 해서 형님의 소식을 들은 적은 없다. 기억나는 건 형님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뿐이다. 이혼소식도 이혼을 하고 서류정리 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어머니께 알렸다고 한다. 어머니는 남편에게 이야기했고 나는 남편을 통해 들었다. 그게 작년 추석쯤이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이브에 선물같이 재혼을 했다. 처음에는 혼자 이혼하고 시부모님께 알린 형님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형님의 독립과 성장을 응원한다. 처음 결혼하기 전에 만났던 남자친구와 결혼까지 생각했지만 본인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형님에게 푸념하는 날이 너무 잦았고 고시를 준비하던 형님이 공부를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옆에서 보다 못한 어머니가 전화를 뺏어 들어 관계를 정리해서 끝났다고 들었다. 그 전화 하나에 성인 둘의 만남이 끝났을까 싶지만 계기가 되었던 건 맞는 것 같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어머니 그늘에서 있던 형님이 스스로 서류정리까지 하고 결혼생활에 마무리를 지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처음과는 달라진 모습이라고 믿고 싶다. 나는 형님을 응원한다.


어쨌든 시댁단톡방에 대한 좋은 기억은 하나도 없다. 잘 생각은 안 나지만 아버지는 일방적으로 화를 내기도 하고 불만을 토로하고는 나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 아버지를 다시 초대하라고 하는 어머니가 더 싫었다. 사실 이 단톡방이 폭파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는데, 아버지가 나가시면 이방은 자동으로 폭파되는 거 아닌가 하는 한줄기 빛을 본 나에게 찬물을 끼얹는 격이니 싫을 수밖에. 이제는 참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게 되었지만 아직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보다 최대한 대화할 계기를 만들고 싶지 않은 게 내 마음이다.


이제는 진짜 정말 너무 엄청 해방되고 싶다. 저 단톡방에서 나오고 싶다. 남편에게도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그러라고 하지 않는다. 나오면 더 피곤해질 거라며(내가? 당신이?) 그냥 단톡방에서 적당히 맞춰주고 선 긋는 게 최선이라고 했다. 적당히 맞춰주고 선 긋는 그게 참 어려운데 말이다. 아무도 모르게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조용히 나가기를 해볼까 생각 중이긴 하다. 며느리 독립 만세를 외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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