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은 떠오르지 않지만 침묵이 불편할 때, 개인사에 관한 화제를 피하고 싶을 때,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모두의 흥미를 모을 수 있는 질문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물론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대답과 부연 설명이 약간 달라지긴 할 테지만, 애초 답이 중요하지 않은 물음이기도 하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갈등하고, 날것의 감정을 품고 살았던, 게다가 가난하기까지 했던 20대, 젊음만으로 충분했고 생물학적으로도 아름답던 시간이었지만 다시 감당하기는 벅차다. 적당히 타협하고, 수용하고, 나와 상대의 지질함을 묵인하면서 살았던 30대 중반과 후반이 내 "화양연화"라고 생각한다.
중. 고등학교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다. 힘들 만큼 무엇에도 열심히인 적 없었지만 몇 억을 준다 해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 공부에 몰두했다면, 좀 더 성실했다면, 호기심을 발휘하면서 삶의 반경을 넓혀갔다면과 같은 후회는 가끔 하지만, 되돌아간다 해도 나는 나처럼 살게 뻔하다.
과장은 했을지언정, 거짓말은 아니다. 물론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용기가 없어 크게 엇나가지 않았지만 모범생도 아니었다. 게으르다고 혼나지 않았지만 성실하지 않았고, 친구와 종종 다퉜지만 금세 친해졌다. 정해진 틀 안에서 재미있게 놀았고, 여태껏 연락하는 끈끈한 친구들도 남았다. 상처가 될 만한 기억이 없다.
많은 여학생이 그랬듯 인기 많던 체육 선생님을 나 역시 좋아했고, 멋진 선배를 보기 위해 우연을 가장한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유행가 가사를 외웠고 좋아하는 영화배우 사진을 고이 수첩에 붙이곤 했다. 야간 자율학습에 빠지기 위해 종종 아팠고, 적극성이 부족했던 탓에 연애로 이어지지 못했지만 수시로 연정을 품었다.
평범했던 내 청소년기는 그 지독한 평범함 때문에 무채색으로 기억된다. 그게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수시로 좌절했고, 걸핏하면 결핍감에 시달리느라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물론 남을 위해서도 나서지 못했다. 불이익은 물론, 불의에도 입하나 열지 못해, 차라리 모든 색을 빼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열일곱 살의 털>>은 독서모임에서 소개받아 읽고, 탄탄하고 리듬감 있는 문장과 행간 사이의 유머에 매료되어 주변에 자주 소개한 책이다. 읽으면서 아주 잠깐 내 청소년 시기를 되짚어 보았다. 시간이 지나도 기억을 미화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나 보다. 아무리 알록달록한 색깔을 덧칠해 봐도 탁해질 뿐이다.
이 책이 청소년 문학으로 분류된 것이, 대놓고 청소년 문학임을 인증하는 표지가 약간 아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게 되어 좋았다. 저자는 작가의 말을 통해 "모든 세상 사람들의 끝없는 이야기를 내 글에 담으리라. 하지만 곧 내가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달았다. 내 재주로 지어낸 이야기는 설어서 제대로 타오르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세상 사람들의 진실한 삶을 담기에는 내가 좁고 얕은 탓이다."라고 했다. 어쩐지 좋은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추석이 지나서까지 계속되는 폭염, 여름 같은 가을날 가볍게 읽을만한 책이 아닐까 싶다.
엄마는 담임에게 내 아빠가 얼마나 오랫동안 돌아올 날도 기약하지 않고 여행만 하고 있는지 말하지 않았다. 엄마는 내 아빠를 이미 세상에 없는 셈 치고 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마 나와 달리 선생이 곱고 예쁘기 때문에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여자를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다. (68쪽)
어른들은 세상엔 대안이 있을 수 없다고 본다. 대안은 정상 궤도를 이탈한 것이고, 어른들은 다른 궤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130쪽)
아버지는 나를 걱정하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내가 보기에 아버지는 아줌마가 된 이금련이 자신과의 과거마저 변질시키고 아예 매장시킬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금련 여사가 아들이 정학당한 것을 잠시라도 잊기를 빌었고, 아버지는 이금련 여사가 자신과 사랑한 사이였다는 것을 잠시라도 잊지 않기를 빌었다. 서로 다른 바람을 가진 두 남자는 정류소에서 편의점 앞으로 자리를 옮겨 하드 하나씩을 입에 물었다. (142쪽)
노력하면 다 된다는 엄마는 아들이 노력하기보다 요령 있게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을 먼저 살아본 엄마의 눈물겨운 모성애다. (1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