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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묻는 사람 K Dec 29. 2021

기억의 의지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장편소설. 문학동네. 2021.

하필이면 눈에 비바람까지 세차게 부는 저녁이었다. 투명 비닐우산은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형태를 알아볼 수 없 처참한 상태가 되었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한 비바람 때문에 버스 정류장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머물렀다.


"오늘 중으로 그칠까?"

"올 겨울 처음 보는 눈이지?"  

손등 위로 떨어진 눈이 녹아 사라지는 걸 보았다.


제주 여행은 급하고 충동적으로 이루어졌다. 별다른 준비도 계획도 목적도 없이 짐을 꾸려 내려왔다. 가능한 아무것도 하지 말기로, 있는 힘껏 시간을 흥청망청 보내기로작정한 터였다.


 늦은  오후에 도착한 첫날은 동네를 조금 걸어 다녔고 밤까지 파도 소리를 들었다. 다음 날엔 숙소 옆 카페에서 바다를 보았고 길을 따라 계속 걷다가 거센 눈비를 맞았다.


늦잠을 자고 깬 날엔  동네 집에 갔다. 아침 겸 점심으로 먹을 빵을 고르고 따뜻한 커피를 주문한 뒤 당히 구석 진 곳에 자리를 잡다. 단출한 여행 가방에서 꺼내 온 책을 펼쳤다.


 후회했다.


 하필, 고민 없이 넣어 온 이 <작별하지 않는다>라니.  책을 펼쳐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창밖으로  쉼 없이 부는 바람보았다. 그러다 시선이 세월호 리본과 스티커가 놓여 있는 곳에 닿았다.


 마음껏 가져가세요.


그들이 오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오려고 했던 곳. 끝내 도달하지 못한 장소에서 만난 '기억의 의지들'. 나는 그것이 반가웠고,  그 노력''이 소환해 낸 기억이 슬펐다. 여전한 비탄의 감정에 부대꼈고, 거리낌이 미안했다.


 숙소가 있는 제주 외도동 버스 정류장에는 <4.3 사건 특별법 개정안이 통과> 되었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국가 폭력의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보상 기준이 마련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너무 많은 목숨이 지나치게 쉽게 사라졌던 74년 전의 제주를 상상했다.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넋과  엉켜있는 사체를 덮은 눈, 그것을 손으로 쓸어가며 혈육을 찾아 헤맨 이들을.


 사람에게 내려앉은 눈이 녹지 않을 수 있는 잔혹함을, 나는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니 감히 제주에서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어보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었던 게지.


 무관심과 무지한 끗 차이고, 둘 다 끔찍하고 섬뜩하다.


숙소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켰다.

"극빈한 생활을 하고 배운 게 없는 사람은 자유가 무엇인지 모를 뿐 아니라 자유가 왜 개인에게 필요한지 그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이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그는 얼마 전에도 "먹으면 사람이 병 걸리고 죽는 거면 몰라도 부정 식품이라면 없는 사람들은 그 아랫것도 먹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라고 했던 이다.


 칠십여 년 전 제주에서, 수많은 목숨 국가 권력에 의해 짓밟힘을 당했다. 백 년 지나지 않았는데, 그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국민의 생존권과 자유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는 이들이, 권력을 잡겠다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지껄인다.

 

나는 한동안 눈을 떼지도 못하고 혐오스러운 광경을 지켜보았다. 시 무지만큼 끔찍하고 섬뜩한 게 없는 것 같다.




어둠이 거의 기억의 전부예요.


깜빡 잠들었다가 눈을 뜰 때마다 혼란스러웠어요. 여기는 집이 아니라 동굴이고, 얼굴도 몸도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손이 내 손을 아직도 쥐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얼마 뒤에 찾아왔어요. 그 손이 아니었다면 나는 소리를 냈을 거예요. 엄마를 찾거나 울음을 터뜨렸을지도 몰라요. 그걸 알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둠 속에서, 다른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잠결에라도 내가 소리를 내지 않게 하려고, 언제 그 굴 앞을 지나갈지 모를 존재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161, 6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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