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자

너에게 바다를 안겨줄게

by 그레이스



남편의 출장 일정에 맞춰, 우리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특별한 목적 없이, 그저 바다가 내 안의 숨통을 틔워줄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그의 차에 올랐다.



출발 직전, 남편이 조용히 차 키를 내밀었다.

“오늘은 네가 운전해 줬으면 해. 차 안에서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투. 익숙한 책임감이 묻어 있었다.


나는 계획했던 낭만을 접으며, 씁쓸한 미소와 함께 자연스레 운전석에 앉았다.

여행자의 설렘 대신, 장거리 운전자의 긴장이 천천히 온몸을 감쌌다.


도시의 윤곽이 점점 흐려지고, 전날 밤 설렘에 잠을 설친 피로가 실처럼 마음을 휘감았다.

졸음이 살며시 눈꺼풀을 두드릴 즈음, 가까운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진한 그란데 사이즈의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 사이즈가 커질수록 샷 수가 늘어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란데 3샷, 벤티 4샷이라는 사실은 그날에서야 처음 알았다.

그 커피는 단순한 각성제가 아니었다.

끝나지 않은 하루를 견디기 위한, 미약하지만 꿋꿋한 생의 의지였다.


남편을 목적지에 내려준 뒤, 나는 바다 근처에서 혼자 머물 곳을 찾았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더위를 피해 천장이 높고 시야가 트인 카페로 향했다.

휴가철의 인파로 자리 잡기 어려웠지만, 두 테이블이 붙은 중앙 자리를 발견했다.

푸른 바다가 훤히 보이고, 옆에 야자수가 놓인 풍경이 마음에 들었다.


자리를 정리하던 중, 대기 중인 옆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필요하시면 이 한쪽 테이블을 나눠 쓰셔도 괜찮아요.”


서로 웃으며 테이블을 떼는 순간, 중심이 흔들리며 물컵이 쏟아졌다.

놀란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조용히 웃었다.

“괜찮아요.”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쏟아진 물을 조용히 닦아냈다.



남편의 일이 끝나갈 무렵, 우리는 다시 만나 모래사장을 걸었다.

발끝을 바다에 담그고 서로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며, 연애 시절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마주한, 오롯이 우리만의 시간이었다.


늘 아이들 중심이었던 여행과 달리, 이번 여정에는 우리 둘만의 감성이 스며 있었다.

그리고 다음 목적지는, 내가 고른 식당이었다.

다소 멀었지만, 그날은 이상하리만치 그 음식을 꼭 먹고 싶었다.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 내가 고집을 부린 건, 드문 일이었다.

그럼에도 아무런 내색 없이 따라준 남편.

고마움은 말보다 마음 한켠에서 조용히 번져갔다.


음식을 주문하던 찰나, 또 한 번 작은 일이 생겼다.

종업원의 손에서 미끄러진 물컵이 내 바지를 적셨다.

나는 놀라지도, 얼굴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그저 익숙한 말 한마디를 건넸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


그 말을 듣고, 종업원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번졌다.

미안함과 진심이 뒤섞인 그 표정이 조용히 내게로 건너왔다.

말보다 더 깊은 마음이, 그 짧은 순간 오갔다.



돌아오는 길, 문득 가슴 한켠이 조용히 일렁였다.

누군가 당황하거나 불편해할 때, 나는 언제나 그보다 먼저, 더 깊은 불편을 감내하는 사람이었다.

상대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내 마음을 먼저 내어주는 쪽이었다.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겠지만, 나 역시도 마음이 긁힐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괜찮아’하며 넘겨왔을 뿐이다. 익숙했고, 그래서 당연했다.


하지만 그날따라, 늘 괜찮은 내 마음이 낯설게 느껴졌다.

뒤돌아보니, 나에게도 파도가 이는 순간들이 있었다.

쉽게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 감정들은 바람 속 모래알처럼 조용히 흩어지곤 했다.


나는 ‘괜찮다’는 말을 어쩌면 지나치게 쉽게 내뱉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진심으로 괜찮지 않은 순간에도, 그 말을 입에 올리며 자신을 다독였고 타인의 마음을 먼저 보듬는 쪽을 택해왔다.


때론 상식 이하의 태도와, 모든 요구를 들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상황조차 나의 양보로 무마되기를 바라며, 스스로 그 무례함을 조장해 온 건 아니었는지.


그래서 이제는,

무례함을 참는 마음을 ‘괜찮다’는 말로 덮거나 숨기지 않기로 했다.

그 말이 단순한 관용이 아니라, 진심을 담은 배려임을 조심스럽게 전하고 싶다.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지만, 나 역시 이해받고 싶다는 소심한 용기.


그 작고 단단한 용기가,

나에게도, 내 곁의 사람들에게도 진실한 위로가 되어줄 거라 믿는다.

어쩌면, 그 순간이야말로 사랑의 나비효과가 시작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마주한 바다는,

마치 잊고 있던 내면의 언어를 다시 들려주는 듯했다.


푸르고 깊은 그 품 안에서,

나는 묵은 긴장과 무거운 생각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발끝을 적시는 물결은 무심히 흘렀지만, 그 안엔 삶을 다시 비추는 잔잔한 빛이 담겨 있었다.


바다는 그저 바다였지만,

내게는 쉼과 회복의 온전한 품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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