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도 모른 채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린 언국은 인왕산에서 침술스승인 자강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까칠한 스승은 언국을 그리 호락호락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언국이 인왕산에서 시련을 겪는 동안 혜신은 어머니의 죽음의 의혹을 풀기 위해 나선다. 그때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는 두 사람!
1. 언국은 인왕산으로 가면 자강 선생을 만날 수 있다는 말에 걸음을 부지런히 옮겨 인왕산 입구에 도착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보니 단숨에 올라가기에는 어려울 만큼 높고 험한 산이었다. 그는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털썩 주저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나 도성 안에 머무르는 것은 더욱 위험했다. 자칫 잘못했다간 의금부 군사들의 눈에 띄기 십상이라 차라리 산으로 들어가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언국은 단단히 마음먹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인왕산 입구는 오가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러나 얼마쯤 올라가니 인적이 드문 산길을 언국만 홀로 걷고 있었다.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해 허기진 언국이 산딸기를 발견했다. 산딸기를 따먹고 나자 오히려 시장기가 더욱 몰려왔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눈에 오디나무가 보였다. 언국은 오디를 한 움큼 따서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기운을 차린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산길은 오를수록 점점 험해졌다. 한참을 걷다 보니 그의 눈앞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나타났다. 언국은 바위를 맨손으로 붙잡고는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발끝에 힘을 주며 사력을 다해 기어 올라갔다. 잠시 후 살짝 삐져나온 돌 뿌리에 가까스로 발을 디디고 선 언국이 위로 올라가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언국이 힘껏 부여잡은 돌이 그만 힘없이 툭 떨어지자 당황한 그는 중심을 잃고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으악!”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언국이 눈을 떴을 땐 훤한 대낮이었다. 그는 타들어가는 목마름을 견딜 수가 없었다. 바짝 마른 혓바닥은 목구멍에 붙어버려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으...” 한참 후 그의 입에서 작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곁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어린 노비 막동이가 그 소리에 눈을 뜨고는 언국을 살피며 말했다. “이제사 정신이 좀 드나보네” 때마침 막동이의 동무인 막개가 방으로 들어오더니 언국을 보며 말했다. “용케 살았구먼?” 그때 다시 언국의 입술이 들썩이며 작은 소리가 들렸다. “무...” 막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야가 뭐라는 겨? 무우? 난데없이 무는 왜 찾는 겨?” 막동이가 한심하다는 듯 막개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으이구! 죽다 살아났는데 무를 왜 찾겄어? 물을 찾는 거겠지. 꼴을 보아하니 못해도 사흘은 족히 산에 쓰러져 있었던 거 같은데 목이 안타겄어?” 머리를 긁적이던 막개가 냉큼 일어나더니 바가지에 물 한 사발을 떠왔다. 막동이는 무명천에 물을 적셔 언국의 입술에 갖다 대 주었다. 언국은 시원한 물 몇 방울이 입안으로 흘러 들어오자 가뭄에 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진 입술에 닿은 물기를 핥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막동이가 이번엔 물을 흥건하게 적신 천을 언국의 입에 올려주자 언국은 천에서 흐르는 물을 정신없이 받아먹으며 목을 축이더니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며칠 후 언국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자신이 어딘지 모를 낯선 방안에 누워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안엔 약초향이 가득했다. 그는 두들겨 맞은 것 마냥 온 몸이 몹시 아팠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바위절벽을 기어오르다가 떨어졌던 것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그는 절벽에서 떨어지며 이대로 죽겠구나 생각했다. 언국이 고개를 돌려보니 그의 곁에 자기 또래의 한 사내아이가 앉아 있었다. 유심히 보니 그 아이는 쑥봉을 만들고 있는데 손놀림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언국이 입을 열었다. “구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아이는 언국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무심한 표정으로 능숙하게 언국의 배 위에 쑥봉을 올리며 말했다. “명줄은 타고났구먼! 여기선 호랑이 밥이 되는 일이 부지기순데” 사실 언국도 자신이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언국은 몸을 일으켜보려고 상체를 돌려세우려 했다. 그런데 왼쪽 어깨가 부서지는 것 같은 통증에 악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때 막동이가 팔로 일어나려는 언국을 가로막더니 억지로 눕히며 말했다. “쪼끔 정신만 들면 지가 다 나은 줄로 착각한단 말이야” 막동이가 다시 쑥봉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겨우 목숨만 부지한 것이니 잠자코 누워있어” 그는 며칠 동안 막동이의 간호를 받았다. 막동이는 무심한 표정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어찌나 언국을 살뜰히 챙기는지 언국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빠르게 호전되어 이제는 일어나 앉을 정도가 되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막동이가 가져다준 보리죽 한 그릇을 맛있게 비우고는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이름은 뭐야?” “막동이” “난 언국이. 그런데 넌 여기 살아?” 막동이는 언국이 비운 죽 그릇을 치우고는 탕약을 건네주며 말했다. “응 난 이 댁 노비” 언국이 탕약을 쭈욱 들이켜고는 입을 열었다. “뜸을 제법 잘 놓던데 의술을 배웠니?” 막동이는 그게 뭔 대수라는 얼굴로 탕약그릇을 들고 일어서며 말했다, “여기서 그 정도쯤은 다들 해” 방을 나서는 막동이의 뒷모습을 보며 언국은 참으로 기이하다 싶었다. 방안에 빼곡히 걸려 있는 약초주머니들이며 능숙한 솜씨로 뜸을 놓는 저 아이가 범상치 않게 느껴졌다.
보름쯤 지나고 언국이 이제는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몸이 회복하자 마당으로 나왔다. 그때 마당 한 구석을 쓸던 막동이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렇게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다니 다 네 덕분이다” 막동이는 무심하게 마당을 쓸다가 언국을 한번 보고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어험! 뭐 내가 고생을 안했다고 할 순 없는데 죽은 목숨 살린 건 스승님이시라” 그때 언국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스승? 그게 누군데? 네 놈한테 스승이 있어?” 그때 막동이가 갑자기 언국에게 빗자루를 마구 휘둘러댔다. “네 놈이 감히 우리 스승님을 하대하는 것이냐?” 예상치 못한 막동이의 행동에 당황한 언국이 빗자루를 피하며 말했다. “하대라니 내가 무슨 하대를 했다고 난리냐?” “그 분은 네 놈이 함부로 입에 올릴 어른이 아니야” 막동이는 어울리지 않게 어른스러운 말투다. 언국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뭐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게 쩔쩔매는 걸 보니 지독한 양반이 특림없구나”
막동이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뒷짐을 지고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라 했거늘...쯧쯧” 막동이는 혀를 끌끌 차며 빗자루를 들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런 막동이의 뒷모습을 보며 언국은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 “애늙은이같이 어린 놈이 말투가 왜 저래?”
잠시 후 막동이가 탕약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언국은 오늘따라 왠지 막동이가 내민 탕약이 꺼림칙했다. 그동안 아무런 의심 없이 탕약을 마셨지만 오늘따라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탕약이 든 사발을 들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는 새끼손가락으로 휘휘 저어 살짝 찍어먹어 보고 말했다. “이거 먹어도 되는 거야? 너 혹시 독을 탄 건 아니지?” 막동이가 열 받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놈이 요 주둥아리를 놀리는 걸 보니 거진 다 나았네. 나았어. 먹기 싫으면 먹지 마” 언국이 탕약 사발을 들고 머뭇거리자 막동이가 기다렸다는 듯 사발을 빼앗더니 단숨에 쭉 들이켜는 것이 아닌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언국이 당황했다. “어? 어찌 이걸...네가 정녕 다 마신 거냐? 이거 내껀데?” 막동이는 “꺼억”트림을 하며 만족스런 얼굴로 말했다.
“우리도 이런 보약을 달이기는 엄청 많이 달여도 먹기는 하늘의 별따기라고” 언국이 황당한 표정으로 빈 사발과 막동이를 번갈아 보았다. 그는 아쉬운지 사발 바닥에 조금 고여 있던 탕약을 혀로 핥았다. 막동이를 보면 볼수록 언국은 이 곳이 뭐하는 곳인지 점점 의심스러워졌다. 그리고 막동이의 스승이란 자가 어떤 사람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그는 문득 그가 자기가 찾고 있는 자강이란 스승을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스승님을 만나보고 싶어” 막동이는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분은 너 같은 놈이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엔 언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죽을 뻔한 나를 살려주신 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이 사람 된 도리가 아니겠느냐?” 듣고 보니 그것도 일리는 있었다. 하지만 막동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수련 중에는 절대 아무도 만나주지 않으셔. 주상전하가 납시었다고 해도 안 나오실걸?”
언국은 며칠 동안 막동이를 졸졸 따라다니며 스승님의 거처를 알려달라고 졸라댔다. 그는 끈질기게 캐물어 스승이 수련하고 있는 곳이 도림원이란 사실을 알아냈다. 언국은 무작정 도림원으로 향했다. 막동이는 언국에게 스승님의 거처를 말한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가 스승님을 찾아갔다간 언국이뿐 아니라 자신도 쫓겨날 수 있다 생각하니 큰일이다 싶어 다급하게 그를 가로막았지만 언국은 막무가내였다.
옥신각신하던 두 사람은 어느새 도림원 앞에 이르렀다. 도림원이라 쓰인 현판을 보고는 언국이 큰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스승님! 스승님!” 그때 당황한 막동이가 언국의 입을 필사적으로 틀어막았다. “야 너 정신 나갔어? 입 안 다물어?”
댓돌에는 신발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언국이 다시 한 번 소리 질렀다. “스승님! 스승님!” 그때 방안에서“에취”하며 재채기 소리가 났다. 막동이와 언국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야?” “재채기하는 소리잖아” “수련중이라며?” “재채기도 못하냐?” 언국과 막동이가 옥신각신하는데 갑자기 주위가 고요해지자 스승님이 걱정된 막동이가 마루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그때 갑자기 우렁찬 재채기 소리가 났다. “에에에 엣취”
걱정이 된 막동이가 용기를 내 방문을 열었다. 순간 곁에 있던 언국도 잔뜩 긴장했다. 막무가내로 도림원까지 오긴 했지만 자기가 머물던 곳과는 사뭇 다른 근엄한 분위기에 어깨가 움츠려들었다.
열린 방문 사이로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구릿빛 얼굴의 다부진 체격을 가진 사람이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스승을 보자마자 그 위엄있는 모습에 언국은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런데 힐끔 보니 수련을 한다는 스승의 방안엔 큰 함지박이 놓여 있었다. 거기엔 양파가 가득 쌓여 있고 한쪽에는 껍질을 벗긴 양파가 그릇에 담겨있었다. 가만 보니 스승이라는 자가 쭈그리고 앉아 양파를 까고 있는데 눈물 콧물을 흘리며 연거푸 재채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그가 손등으로 콧물을 쓱 훔치고는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대체 이게 뭐가 맵다고 엄살들인지 원! 이걸 내가 다 까야겠냐 말이다!!” 맨손으로 양파를 까던 그는 구시렁거리면서 연신 콧물을 훔치다가 열린 문 쪽을 쏘아보았다. 언국은 그의 눈빛에 기가 눌려 고개를 푹 숙였다. 곁에 있던 막동이가 파르르 떨며 입을 열었다. “송구하옵니다. 스승님! 이 자는 얼마 전 산에서 쓰러져 있는 것을 데려온 자인데 스승님을 뵙고 싶다고 하도 난리를 피워 그만”
스승은 귀찮다는 듯 쳐다보지도 않고 연신 재채기를 하면서 물러가라고 손짓만 했다.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스승님” 언국이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대꾸도 없이 방문을 닫으라는 손짓만 했다. 막동이가 얼른 방문을 닫으려 하자 언국이 방문을 부여잡고는 다급하게 외쳤다. “자 잠깐만요! 제가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혹시 자강이라는 분을 아시는지요?” “뭐라고? 자 에 에에 에취이” 스승님은 연신 재채기를 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건장한 노비 둘이 마루위로 오더니 언국의 양팔을 단단히 붙들었다. 언국이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속수무책으로 질질 끌려나왔다. 언국은 끌려나오면서도 스승이 있는 방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노비들은 언국을 도림원 밖으로 내치고는 문을 굳게 닫아 걸었다. 언국은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혹시 자강이라는 분을 알고 계신지요? 여기 인왕산에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험상궂게 생긴 노비 하나가 손에 든 물 한바가지를 언국을 향해 휙 뿌리고는 문을 굳게 닫았다. 갑작스런 물벼락에 언국은 그만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십시요! 그 분을 꼭 만나야 합니다!” 물에 빠진 생쥐마냥 홀딱 젖은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목청껏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굳게 닫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순간 언국은 맥이 쭉 빠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림원 앞을 떠날 수는 없었다. 막동이의 스승 덕에 험한 산중에서 가까스로 목숨은 부지했지만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자강을 찾아야 했다. 얼마 전 궐 문 앞에서 아버지를 만나려고 서성였던 것처럼 그는 도림원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얼마 후 담장너머로 막동이가 빼꼼 얼굴을 반쯤 내밀었다. 언국이 아는 척을 하려고 손을 드는 순간 막동이는 아무 말 없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막동이가 말없이 사라지자 서운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왜 대답은 안 해주고 문전박대만 하는 건지...’ 대체 어디로 가야 자강이란 스승을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막막하기만 했다. 집에 의금부 군사들이 들이닥치던 순간부터 모든 것이 뒤엉킨 실타래처럼 엉켜버렸다. 그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던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언국은 소박했지만 단란했던 적선동 시절이 떠올랐다. 찬거리가 넉넉하진 못했어도 다정한 어머니 그리고 성실하고 인자하신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행복했다. 그런데 한 순간에 이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하루하루 숨통을 죄어오는 것만 같았다.
어느덧 초저녁 무렵이 되었다. 산속이라 해가 금세 떨어져 한밤중처럼 벌써 어둑어둑하다. 마당으로 나온 스승은 세수를 하고나서 얼굴을 닦는데 아까 낮에 찾아온 아이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맴돌았다. “혹시 자강이라는 분을 알고 계신지요? 여기 인왕산에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십시요! 그 분을 꼭 만나야 합니다” 스승은 굳게 닫힌 문 쪽을 한번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한편 도림원 문 앞에 쪼그리고 앉은 언국은 아까부터 모기 한 마리가 성가시게 그의 주위를 앵앵거려 손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쫓아내는 중이었다. 그때 그의 뱃속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배고파’ 언국은 무릎을 모아 세우고 두 다리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서글픈 생각에 눈물이 차올라 훌쩍이고 있던 그때 문이 삐그덕 열리더니 누군가 그의 앞으로 쓰윽 다가왔다. “자강을 왜 찾느냐?” 고개를 들어 보니 아까 봤던 그 스승이었다. 눈이 똥그래진 언국은 너무 놀라 말을 더듬었다.
“혹시 아십니까? 그 분이 어디 계신지?” 하지만 스승은 언국이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무슨 일로 그 자를 찾는 것이냐?”
언국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저의 아비는 내의원 의관 임 형우라 하옵니다. 며칠 전 입궐하신 후론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후로 저도 쫓기는 신세가 되어 도망다니며 아버지의 행방을 알아보던 중 이곳 인왕산에 자강이란 스승님을 찾아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하여 찾아온 것입니다” 언국의 이야기를 듣던 스승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언국은 눈치 채지 못했다. 스승은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네가 그 자의 아들이란 것은 어찌 증명할 수 있느냐?” 언국은 주저함 없이 대답했다. “제겐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침통이 있습니다. 그것은 스승님께 받은 것이라 하셨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언국이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뒤져도 침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언국의 뇌리에 한 사람이 스쳤다. 종침교에서 울고 있던 소녀에게 침통을 건네주던 장면이 떠올랐다. 언국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킬 순 없는 일이 아닌가? 스승은 차갑게 돌아섰다. “날이 저물었으니 이만 돌아가 보아라. 이제 더 이상 내 집 앞에서 호랑이가 먹다 버린 시체를 치우는 것은 원치 않으니” 언국은 다급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있습니다! 아버지가 주신 침통이 분명히 있습니다. 반드시 가져올 것이니 제발 소인의 말을 믿어 주십시요!” 하지만 스승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문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스승의 다리를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매달리던 언국은 곁에 섰던 노비들이 냉정하게 밀어버리는 바람에 문 밖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나동그라진 언국을 보던 막동이가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시는 올라오지 마! 여긴 호랑이가 드글거린단 말이여. 지난번엔 네 놈의 운이 억세게 좋았던 줄만 알고! 행여 여기 있다간 호랑이 밥이 될 각오해야 될 거야!”
그때 때마침 산등성이 너머에서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언국은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막동이도 겁이 나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언국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려가다가 호랑이와 마주치면 어쩌지? 그는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차피 쫓기는 신세가 아닌가? 이러나저러나 죽긴 매한가지라 생각하니 없던 용기가 불쑥 생기는 것 같았다. 언국은 이를 악물고는 풀숲으로 달려가 길쭉한 나무막대기 하나와 차돌 몇 개를 골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다시 문 앞으로 달려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반드시 침통을 찾아 올 것이니 그땐 문을 열어주셔야 할 것입니다” 그때 문을 닫으려던 나이 지긋한 노비가 그를 얕잡아보며 혀를 끌끌 찼다. “요즘 왜 이렇게 어중이떠중이들이 많은 게야? 주제 파악들을 해야지. 원! 쯧쯧! 여기가 개나 소나 다 들어올 수 있는 곳인 줄 아나본데 어림없지 어림없어”
도림원 뜰에서 언국이 씩씩하게 산길을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스승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 아이는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았을까? 저 아이가 정말 임 형우의 아들이라면 며칠 전 전해들은 형우의 소식이 사실이란 말인가’ 스승은 숙의 김 씨의 사망소식과 함께 내의원 의관이었던 임 형우가 실종되고 그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는 전갈을 이미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형우의 소식을 듣고 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 형우 자네 어디 있는 겐가?’ 스승은 언국을 지켜보다 아무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방으로 들어온 그는 착잡한 마음을 쉽게 떨칠 수가 없었다. 그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몹시 괴로워하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때 노비 하나가 스승을 불렀다. “스승님! 준비 되었습니다” 그는 도림원을 나섰다. 그때 수련도감 제자인 수명과 대벽이 스승을 뒤따라오더니 수명이 대뜸 물었다. “스승님! 내의원 의관 임 형우를 찾는 자가 나타났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눈치 없는 대벽이 말을 이었다. “심지어 그 자가 여기서 며칠 동안 기거했다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큰일이 아닙니까? 그 자가 임 형우와 관련이 있는 자라면 반드시 의금부 군사들에게 쫓기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 곁에 있던 수명도 거들었다. “스승님! 그런 자를 여기 들였다간 우리 수련도감도 자칫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한참 듣고 있던 자강이 입을 열었다. “이곳은 사람을 살리는 곳이다.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설령 살인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의 목숨부터 살려야 하는 것이 의원의 도리다. 죄는 그 다음에 물어야 할 것이야” 대벽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괴고 말했다. “하오나 그 자의 정체가 수상합니다. 그의 아비를 핑계 삼아 이 곳을 염탐하려고 온 것인 줄 누가 알겠습니까?” 스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대벽은 스승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 눈치 없이 말을 걸었다간 화를 입을 수 있겠구나 싶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수명은 자강의 의중이 궁금했다. 평소 스승은 수련도감에 아무나 들이지 않기로 유명할 정도로 까칠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직접 침까지 놓아주다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하신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2. 한편 한동안 무겁게 가라앉았던 영춘헌 혜신의 처소엔 오랜만에 활기가 돌았다. 생각시들은 처소 안팎을 부지런히 쓸고 닦았고 강 상궁은 곱게 만든 전병을 혜신에게 올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혜신은 식사를 거르지 않기로 강 상궁과 굳게 약조했지만 그녀는 종종 밥그릇을 비우지 못한 채 상을 물렸다. 보다 못한 강 상궁은 그녀가 책을 보며 하나씩 집어먹도록 전병을 부쳐 예쁘게 말아 알록달록한 빛깔이 먹음직스럽게 혜신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하지만 저녁이 다 되도록 손도 대지 않은 전병은 말라 비틀어져 강 상궁의 애를 태웠다.
그러던 어느 날 책을 보던 혜신이 책상위에 오래된 전병을 보더니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녀는 강상궁을 불렀다. “강 상궁 밖에 있느냐?” “예 마마 부르셨사옵니까?”
“이 전병을 새로 만들어 내올 수 있겠느냐?”
드디어 먹는구나 싶어 기분이 좋아진 강 상궁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그럼요 그럼요! 당장 대령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요 마마” 잠시 후 강 상궁이 갓 만든 전병을 내왔다. 그녀는 서랍을 열어 가지런히 넣어둔 예쁜 보자기를 꺼내더니 전병을 싸기 시작했다. 그런 후 옷을 여러 벌 꺼내 들고는 이리 저리 대보며 한참을 고르더니 마음에 드는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강 상궁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걸 어디 가져가려고 그러십니까?” “그건 알거 없네”
오랜만에 종침교에 선 혜신은 감회가 새로웠다. 그 아이를 만날 생각에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혜신은 언국과 다시 만나기로 약조하진 않았지만 분명히 그 아이가 이곳에 다시 올 거라 믿었다. 그렇게 언국을 기다리며 혜신은 지루함에 난간에 기대보기도 하고 종침교 주변을 거닐어 보기도 했다. 곧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와는 달리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고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저물었다. 종일 종침교에서 서성거리던 그녀는 점점 다리가 아파오자 다리를 두드려보기도 하고 기지개를 펴듯 몸을 쭈욱 펴며 지루함을 달래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언국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괜히 부아가 치밀어 발밑에 있던 돌멩이를 툭 차버렸다.
그녀가 곱게 수놓아진 보자기에 싼 전병을 펼쳐보니 전병이 오래 돼 말라버려 볼품이 없었다. 한숨을 내쉰 혜신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에이 다 말라버렸네. 아깐 먹음직스러웠는데...다음에 다시 오지 뭐 그 아이에게 주면 분명히 좋아할거야’ 그 아이가 좋아할 생각을 하니 혜신은 기분이 좋아져 이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다음날 언국은 종침교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빼곡한 인파속에서 혜신을 찾으려니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그 아이를 어찌 찾는단 말인가? 그때 의금부 군사들 한 무리가 저쪽에서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언국은 재빨리 몸을 숨겼다. 다행히 군사들은 언국을 보지 못하고 지나갔다. 언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봇짐을 내려놓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 언국의 봇짐을 휙 낚아채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당황한 언국은 봇짐을 들고 달아나는 사내를 황급히 뒤쫓았지만 그는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잽싸게 인파속으로 몸을 숨겼다. 봇짐을 잃어버린 언국은 망연자실했다. 봇짐엔 집에서 군사들의 눈을 피해 도망 나올 때 급히 챙긴 옷가지랑 꼭 필요할 때 쓰라고 넣어주신 어머니의 비녀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맥이 풀려버린 언국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짚신의 앞코는 해져서 너덜너덜해졌다. 갈 곳도 오라는 데도 없는 그는 봇짐까지 잃어버려 눈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언국이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 인왕산 꼭대기가 보였다. 다시 가야하는데...하지만 그 아이를 만나야 침통을 돌려받을 수 있으니 오늘은 종침교에서 밤을 세우더라도 그녀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참이다. 그는 어디서 하룻밤을 지내야 할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침 종침교 밑에 버려진 멍석 하나가 그의 눈에 띄었다. 언국은 멍석을 주워들고는 비를 피할 수 있는 한쪽 구석으로 가 자릴 잡았다. 멍석을 이불삼아 덮고 누우려는데 누군가 멍석을 휙 잡아챘다. “이런 오살할 놈! 어디 감히 넘의 것을 훔쳐?” 언국이 당황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거지 둘이 험악한 얼굴로 언국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훔치다니요? 버린 걸 주웠을 뿐이라구요!” “누가 버렸대? 니 눈엔 이게 버린 걸로 보여? 확 눈깔을 그냥!” 거지 하나가 주먹으로 한 대 치려고 할 때 어디선가 왕초가 나타나 사내의 팔뚝을 붙잡았다.
“야! 어린 앤데 살살 다뤄” 그들은 할 수 없이 언국을 놓아주었다. 언국은 순간 왕초가 은인처럼 느껴졌다. 왕초는 술을 얼마나 퍼마셨는지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보는 놈인데? 멍석을 주웠다고? 맹랑한 놈 일세” 언국이 빌며 사정했다. “몰랐어요. 버린 건 줄 알았어요. 일부러 가져간 건 아니니까 용서해주세요” 왕초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언국을 노려보며 말했다. “일부러 가져간 게 아니다? 껄껄껄 그걸 믿으라고?” 왕초가 고갯짓을 하자 거지들이 언국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언국을 두들겨 패더니 발로 한번 휙 걷어차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죽은 듯 쓰러져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언국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흐르는 코피를 손등으로 훔치던 언국은 떨어진 짚신 코를 꽉 붙들어 매며 결심했다. ‘여기서 맞아 죽든 호랑이에 물려 죽든 어차피 죽는 건 매한가지야. 죽을 때 죽더라도 가서 죽자’
언국은 죽기 살기로 밤이 새도록 인왕산으로 올라갔다. 증표는 없지만 침술을 보여서라도 자신이 임 형우의 아들이란 것을 보여 주겠다 마음먹었다. 그는 수련도감 문 앞에 서서 호령했다.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그때 대벽이 험악한 인상을 하며 문 앞에 나왔다. 대벽의 손엔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어떤 놈이 새벽부터 소리를 꽥꽥 질러대?” 대벽은 워낙 거구의 몸이라 마주 서기만 해도 위축되기 마련인데 언국은 그의 위협에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는 앳된 소년이 자신을 보고도 기가 죽지 않는 것을 보고 속으로 놀랐다. 언국은 기세를 몰아 더욱 큰 소리로 밀어붙였다. “스승님을 뵙게 해주시오”
큰 소란에 모여든 노비들 사이에 선 막동이도 언국의 낯선 모습에 깜짝 놀랐다. 노비들은 웅성거리고 대벽과 언국과 대치해 있는 상황에 갑자기 벼락같은 소리가 언국의 뒤통수를 때렸다. “아니 이놈이 어디서 행패를 부리는 것이냐?” 수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예민한데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비위가 건드려지면 물불을 안 가리는 성격이었다. 수명은 눈치만 살피고 있는 노비들을 향해 말했다. “어서 이 놈을 끌어내지 못하고 뭐하고 있는 것이냐?” 언국은 노비들에게 붙들려 질질 끌려 나갔다. 내쳐진 언국은 노비들의 발길질세례를 받아야 했다. 터진 입술은 금세 부어올랐다. 흠씬 두들겨 맞은 언국은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 눈앞이 흐려졌다. 이대로 죽는가보다 싶다.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고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부모님이 몹시도 그리웠다. 그날 인왕산엔 종일 세차게 비가 내렸다.
다음날 아침 막개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아침부터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수련도감 대문 앞을 쓸고 있었다. 그때 구석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비에 흠뻑 젖은 멍석이 덮여 있는데 빗자루로 툭툭 쳐봐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이게 뭐지? 하며 이리저리 쿡쿡 찔러보다가 멍석 아래로 사람의 팔이 툭 튀어나오자 막개는 기겁했다. 그는 여기 사람이 죽었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수련도감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의 비명을 듣고 생도들과 노비들이 모여들었다. 용감한 막동이가 멍석을 들춰보니 다름 아닌 언국이었다. 노비들이 흔들어 깨워도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손발은 차디찬 얼음장 같았다. 앞마당에 죽은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승도 달려왔다. 그때 언국이 하품을 늘어지게 하더니 눈을 떴다. 막개가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며 호들갑을 떨자 대벽이 입 닥치라며 한 대 쥐어박았다. 잠에서 깬 언국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언국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스승이 입을 열었다. “증표는 가져왔느냐?” “아직 못 가져왔습니다” “밤새 여기서 잔게냐?” “예“
자강이 들어가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운이 좋은 녀석이로구나. 호랑이 밥이 안 된걸 보니! 명줄은 타고난 놈이야!” 언국은 일어서서 자강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이라도 다시 내려가서 증표를 꼭 받아 오겠습니다 스승님” 그때 자강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밥이나 먹고 가라” 밥을 먹으라는 소리에 기분이 좋아져 언국은 큰소리로 대답했다. “예 스승님 ” 자강은 곁에 따라오던 대벽에게 말했다. “저 놈을 다시는 올라오지 못하게 해라” 자강은 그렇게 툭 한마디 내뱉고는 가버렸다. 밥을 두 그릇이나 비운 언국이 숟가락을 내려놓자 막동이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스승님이 다신 올라오지 말라셔” 언국은 자강이 거하는 도림원을 향해 절을 하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증표를 반드시 가져오겠습니다!”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찾을 요량이었다. 육조거리를 지나 운종가엔 선전, 면포전, 어물전, 그리고 지전과 저포전이 길게 늘어선 시전 행랑이 보였다. 동이 트지도 않았는데 이미 객주들과 시전상인들로 북적였고 새벽부터 받아온 물건들을 들이느라 상인들은 몹시 분주했다. 의금부 관원들 눈에 띄지 않도록 패랭이를 깊이 눌러 쓴 언국은 혹시 이곳에 혜신이 나타나지 않을까 싶어 주의 깊게 살폈다. 그러다 어느새 떡집 앞에 이르렀다. 떡집 주인은 여러 번 쳐서 찰기 있는 떡을 콩고물에 맛있게 묻혀 솜씨 좋게 뚝뚝 잘라 인절미를 만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던 언국은 입가에 고인 침을 쓱 닦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하루 종일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녀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딜 가야 널 만날 수 있는거니?”
3. 그날 오후 혜신의 방안에 혜신과 정 참봉 그리고 강 상궁 세 사람이 모여 앉아 있었다. 혜신이 담담한 표정으로 정 참봉에게 말했다. “자네가 내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때 이야기했던 수련 도감에 가서 자강 선생에게 침술을 배우고 싶으니 자네가 추천서를 써주어야겠네” 곁에 있던 강 상궁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마마 안 됩니다. 여기서 침술을 배우는 것도 웃전에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수련 도감에 가서 배우시는 걸 주상전하께서 아시는 날엔 어휴” 강 상궁은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정 참봉이 입을 열었다. “쉽지 않으실 것이 옵니다” 하지만 혜신은 이미 마음에 준비를 한 것 같았다. “우리 어머니처럼 억울하게 죽는 사람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혜신이 눈물을 훔치고는 정 참봉에게 물었다. “자네가 어릴 적 어머니와 한동네에 살았다고 했지?”
정 참봉이 입을 열었다. “예 옹주 마마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돌아가신 어머니가 궐에 들어오신 후 자네가 외로운 어머니를 누구보다 살뜰히 살펴주었던 것을 잘 알고 있네” “아니옵니다. 옹주 마마! 오히려 돌아가신 숙의 마마께서 소인에게 은혜를 많이 베풀어 주셨지요” “자넨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던 날 처방받은 탕약과 치료에 대해 혹시 알고 있는가? 그날 허리 병이 도져 침을 맞으셨다 들었네. 어머니께서 어떻게 돌아가시게 되었는지 알아야겠네” 혜신을 바라보던 정 참봉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숙의 마마의 일은 소인도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마마! 돌아가신 연유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 한없이 의심의 골만 깊어지는 법이지요. 숙의 마마께서 오래된 병환이 있으셨고 최근에 병세가 악화된 것 또한 사실이옵니다. 그러니 옹주마마! 마음을 굳건히 하시옵소서” 그녀는 어머니 죽음이 어딘가 석연치 않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4. 다음날 아침 양화당 뜰엔 소주방 나인들 몇이 모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강 상궁이 그곳을 우연히 지나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너희들 그 얘기 들었어?” 귀가 솔깃해진 한 나인이 눈을 똥그랗게 뜨며 물었다. “무슨 얘기?” 다른 나인이 재촉하며 말했다. “빨리 말해봐 뭔데?” 이야기를 꺼낸 나인은 주위를 한번 휘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얼마 전 돌아가신 숙의마마 말이야” 나인들이 깜짝 놀라며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염려되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뭐라고? 너 그거 뭐 알고 하는 얘기야? 섣불리 잘못 이야기했다간 목이 달아날 수도 있어!”
“내가 없는 얘기하는 거 봤어? 내의원의녀에게 직접 들은 거야. 글쎄 숙의마마께 마지막으로 탕약을 올렸던 의원이 그날 이후로 갑자기 사라졌다지 뭐니? 뭔가 이상하지 않아?” 그 이야기를 들은 한 나인이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을 꺼냈다. “생각해보니 그날 숙의 마마께서 저녁상도 다 비우셨거든. 만약 그날 밤에 승하하실 정도로 상태가 안 좋으셨다면 저녁상을 다 드실 수 있었겠어?”
그때 갑자기 강 상궁이 나인들 앞에 나타났다. “네 이년! 어디서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 것이냐?” 소주방 나인들은 깜짝 놀라 고개를 숙이고 벌벌 떨었다. “마마님 죽여주시옵소서” 강 상궁은 나인들을 둘러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리를 틀고 싶지 않으면 그 입들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나인들은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마마님”
그때 혜신이 나타났다. “우리 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것이냐?” 나인들은 화들짝 놀랐다. “옹주마마! 그 그것이 숙의 마마께서 저희들에게 인자하게 대해주셨던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나인 하나가 황급히 둘러댔다. 혜신은 그녀들이 수군거리는 것이 수상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5. 다음날 혜신은 강 상궁과 운종가에 있는 한 지전을 찾았다. 겉으로만 보면 평범한 지전이지만 사실 그곳은 돈을 받고 구하기 어려운 책들을 은밀히 구해주는 비밀 서사였다. 혜신은 종이를 사려는 사람처럼 구경하며 들춰보고 있었다. 강 상궁은 혜신의 곁에서 주위를 살피다가 지전 주인과 눈이 마주치자 신호를 보냈다. 지전 주인 이귀돌은 진작부터 혜신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워낙 식탐이 많아 비대한 체구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눈치도 빠르고 호기심도 많아 궁금한 것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귀돌은 아버지의 지전을 물려받아 장사한 지 오래되었다. 종이만 팔아도 먹고 살 만하지만 그 몹쓸 호기심 때문에 지전 안쪽에 비밀 서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찾는 이들이 많아 꽤 수입이 짭짤하다. 여기엔 혜신도 한몫 단단히 하는 단골이었다. 구하기 힘든 서책들을 구해주면 책값에 수고비를 얹어 받는데 사실 주인장이 기분이 내키는 대로 부르니 부르는 게 값이다. 그는 시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마당발이라 이 씨에게 청하면 구하지 못하는 책이 없었다. 사실 비밀서사는 숙의 김 씨가 젊은 시절 책을 구할 때마다 들렀던 곳이었는데 혜신에게 알려준 뒤론 혜신이의 참새방앗간이 되었다. 어머니의 죽음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은밀히 알아보던 혜신은 관련된 책을 찾아보기 위해 비밀 서사에 책을 여러 권 부탁해 두었다. 마침 책이 구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서사에 들렀다.
혜신은 귀돌이 쌓아둔 책을 몇 장 넘겨보더니 아예 책에 푹 빠져 읽고 있었다. 그때 언국은 혜신을 찾느라 시전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혜신이 책을 넘겨보며 서있던 그때 귀돌이 호객하는 소리가 몹시 거슬렸다.
“종이 보고 가시오! 이번에 명나라에서 들여온 귀한 종이도 있소! 와서 보고 가시오 들어오시요! 들어와 봐!” 귀돌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에 혜신이 시끄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데 때마침 지전 앞을 지나던 언국도 귀돌의 목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렸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려는 찰나 봇짐장수가 언국의 어깨를 툭 치고 가는 바람에 언국이 휘청했다. 언국을 보지 못한 혜신은 다시 책에 얼굴을 파묻고 언국역시 지전 안에 서 있는 혜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혜신이 한참 책에 푹 빠져 읽고 있는데 쨍그랑하며 그릇이 깨지는 소리에 그녀는 놀란 눈으로 뒤돌아보았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눈앞을 지나가는 한 소년이 보였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그 아이 언국이였다. 그를 본 혜신은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는 책을 바닥에 툭 떨어뜨리고는 홀린 듯 아이를 뒤따라가기 시작했다. “얘! 얘!” 아무리 찾아도 만날 수 없었던 그 아이를 시전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 너무나 반가워 그녀는 걸음을 재촉하며 뒤따라갔다. 하지만 어느새 그 아이는 인파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았지만 그 아이는 온데 간데 없고 멍해진 혜신만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다시 서사로 돌아온 그녀는 책에 눈을 두지 못하고 뒤적거리기만 하다가 책을 휙 덮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에잇! 대체 넌 어디 있는 거니? 아니지 내가 걔를 왜 이렇게 신경 써? 몰라몰라’
그때 지전 맞은편 주막집에서 끓이는 국밥냄새가 서사 안까지 솔솔 풍겼다. 때마침 패랭이를 깊이 눌러 쓰고 주막 앞을 지나가는 언국을 눈썰미 좋은 주모가 한 눈에 알아보고는 큰 소리로 불러 세웠다.
“밥은 먹었어? 국밥 한 그릇 먹고 가” 언국이 곤란한 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가진 돈이 없어서...” 주모가 혀를 끌끌 차더니 언국을 끌고 와서는 억지로 앉혔다. “쯧쯧! 오늘은 내가 그냥 한 그릇 말아 줄테니 먹고 가. 든든히 배를 채워야 돌아다니지 원” 주모가 내온 따끈한 국밥 한 그릇에서 풍겨 나오는 구수한 냄새에 언국은 먹기도 전에 입가에 침이 고였다.
언국이 국밥을 한술 뜨는 사이 지전 주인 귀돌은 혜신이 부탁한 책을 낑낑대며 들고 오다 손님을 배웅하러 나온 주모랑 부딪혔다. 언국이 날쌔게 몸을 날려 넘어지려는 주모를 가까스로 붙들었다. 주모는 귀돌을 한번 흘겨보더니 자신을 붙들어준 언국의 어깨를 한번 툭 치며 말했다. “너 오늘 국밥 값은 했다” 귀돌은 들고 온 책을 책상위에 올려놓으니 양이 제법 많았다. 귀돌이 책을 세며 말했다. “그 전에 주문하고 가져가지 않은 책까지 합하면 가만 보자 서른 권은 족히 넘는뎁쇼?” 이 많은 책을 강 상궁이 혼자 들고 가기에는 무리였다. 강 상궁은 책값을 내며 귀돌에게 책을 좀 가져다 달라 청했다. 하지만 귀돌은 난색을 표했다. “배달은 할 수가 없소. 내가 가게를 비울 수는 없지 않소?” 난감한 강 상궁은 다시 한 번 귀돌에게 부탁했다. “이보게! 그러지 말고 배달해줄 사람 좀 알아보게”
귀돌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요즘 저기 새로 생긴 면포전에서 일할 사람을 죄다 데려가는 바람에 사람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요. 게다가 책은 무게가 꽤 나가서 사람 구하기가 쉽지 않으니 알아서 구해보시오” “알겠네. 그럼 닷 냥 더 줄 터이니 사람 하나만 구해주게” 귀돌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닷 냥 아니라 열 냥이어도 못 구한다니까요!” 그때 맞은편 주막에서 둘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주모가 쓱 끼어들더니
“사람이 하나 있긴 한데 열 냥에 두 냥 더 얹어주시면 제가 바로 구해다 드립죠” 강 상궁은 의아해하며 지전 주인에게 물었다. “이 사람은 누군가?” 귀돌이 팔짱을 끼더니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주막집에서 방금 배달꾼으로 전향신 분이요“
강 상궁은 주모의 흥정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서는 별 도리가 없어 하는 수 없이 승낙했다.
언국은 큰 지게에 책을 잔뜩 얹었다. 긴장한 그의 이마에선 벌써부터 땀이 줄줄 흐르고 중심을 잡기 위해 한손에 쥔 지팡이를 힘껏 움켜쥐고는 겨우 일어섰다. 강 상궁에게 열두 냥이나 받아 챙긴 주모는 큰 인심 쓰는 것처럼 두 냥을 지게를 지고 일어선 언국의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언국이 지게를 지고 가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남은 열 냥을 누가 볼까 무서워 뒤돌아서서 다시 세어보는데 콧노래가 절로 흥얼거린다. 그때 어느 틈에 왔는지 귀돌이 주모 앞을 가로막았다. “설마 그걸 혼자 꿀꺽 할 셈은 아니겠지?” 주모는 황급히 열 냥을 주머니에 넣고는 모른 척 딴청 했다. “아까는 사람 못 구한다고 했던 양반이 누구였더라? 이제 와서 이깟 돈 몇 푼을 갈라먹을 속셈이요?” 귀돌이 발끈했다. “열 냥이 돈 몇 푼? 이런 눈 뜨고 코 베어갈 사람을 봤나! 우리 지전 손님 덕에 벌었으니 절반은 내놓아야지 이 사람아!” 귀돌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니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주모는 사람들이 모여 봤자 목소리 큰 귀돌이 유리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기에 하는 수없이 석 냥을 그에게 주었다. 하지만 귀돌은 이대로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다. 귀돌이 끝까지 버티고 서 있자 주모는 마지못해 두 냥을 귀돌을 향해 던지고는 신경질을 내며 팩하고 들어가 버렸다.
지게를 짊어진 언국은 궐이 가까워질수록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혹시나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군사들이 있을까 싶어 잔뜩 경계하며 걸었다. 그는 패랭이를 깊이 눌러 쓰고는 궐 문 앞에 섰다. 그런데 긴장한 언국과는 달리 그가 내민 패를 본 군사들은 두 번도 묻지 않고 너무 쉽게 통과시켜 주었다. 궐 안에 들어선 언국은 마음이 착잡했다. 그는 아버지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호랑이굴에 들어왔으니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는 영춘헌 서고 문을 열었다. 서고 안은 고요했다. 언국이 서고 안에 들어서자 옅은 복숭아향이 나는 것 같았다. 그리 크지 않는 서고엔 책이 제법 많았다. 언국은 책상 위에 가져 온 책을 모두 쌓아놓았다. 언국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서고를 한번 둘러보았다. 그러다 서고 한쪽 벽면에 걸려 있는 그림 하나가 그의 눈에 띄었다. 한 어린 소녀를 품에 안고 있는 자애로운 어머니를 그린 따뜻한 그림이었다. 그림만 보아도 어머니 품에 안긴 것 같은 포근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 곳의 주인은 누구일까? 누군지 몰라도 심성이 곱고 따뜻한 사람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보고 있자니 언국은 어머니 생각에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는 기필코 자강을 만나야겠다 생각했다. 그를 만나면 부모님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다시 인왕산에 올라가야겠다 싶어 시각을 보니 벌써 미시가 지나고 있었다. 산에 가려면 서둘러야 한다. 그런데 책을 놓고 나오려고 보니 서고 책장엔 그가 아는 책들이 제법 많이 꽂혀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의서들이었다. 그의 아버지의 책장에서 어려서부터 보았던 책들이라 무척 반가웠다. 그런데 책들이 여기저기 두서없이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언국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책을 분류해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꽂아둔 책의 목록을 일목요연하게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다 쓴 책의 목록을 책상위에 올려두고 나서야 서고를 나왔다.
한편 혜신과 강 상궁은 시전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다보니 금세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궐로 발걸음을 재촉하던 혜신과 강 상궁은 누군가 뒤따라오는 것 같은 불길 예감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뒤를 따르던 자들이 후다닥 몸을 숨기는 것을 보았다. 두 명의 사내였다. 위협을 느낀 강 상궁은 눈짓으로 혜신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녀는 혜신을 지름길로 먼저 보내고는 사내들을 따돌리려고 발길을 돌려 헤매기 시작했다. 뒤따르던 자객들은 눈치를 챘는지 어느 샌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누가 보낸 사람들이었을까? 둘은 서둘러 궐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소로 돌아온 혜신은 긴장이 풀렸는지 털썩 주저앉았다. 저녁상을 물리고 옷을 갈아입은 그녀는 아까 서사에서 구입했던 책이 생각나 서고로 발걸음을 향했다. 서고에 들어선 혜신은 책상위에 놓인 책들을 살펴보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문득 서고 책장을 쳐다보고 뭔가 달라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렇게나 꽂아두었던 책장의 책들이 일목요연하게 종류별로 꽂혀져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시들이 아침마다 서고를 소제하지만 감히 책을 건드리지는 못했다. 그녀는 책상위에 써둔 책 목록을 보고 또 한 번 감탄했다.
‘누가 쓴 것일까? 필체는 또 어찌 이리 시원스러운지...’
그 뿐이 아니었다. 서고 한가운데 놓인 책상 모서리 네 귀퉁이엔 부딪혀도 아프지 않도록 짚으로 꼬아 만든 보호대가 덧대어 있는 것이 아닌가? 좁은 서고에서 그녀는 번번이 책상모서리에 허벅지를 부딪쳐 한두 번 멍이 든 것이 아니었다. 누가 이렇게 해놓았을까? 그녀는 몹시 궁금해졌다. 혜신은 때마침 차를 들고 들어오는 강 상궁에게 물었다. “자네 오늘 낮에 여기 들어왔었는가?” 강 상궁은 눈을 껌뻑거리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십니까? 오늘 하루 종일 운종가를 저랑 같이 쏘다니지 않으셨습니까?” 혜신이 턱을 괴고는 말했다. “정말 이상해. 누굴까?”
강 상궁은 무슨 일인가 싶어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혜신의 이야기를 들은 강 상궁도 서고를 한번 휘익 둘러보더니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달라지긴 한 거 같네요. 그런데 오늘 여기 들어왔던 사람은 아침에 소제하러 들어온 생각시 말고는 없는데...”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강 상궁이 책상을 탁 치며 말했다. “아 맞다! 마마! 아까 운종가에서 제가 책을 가져다 달라고 일을 시킨 자가 있었는데 혹시...” 혜신의 눈이 커졌다. “그게 누군데?” 하지만 강 상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이 근데 그 자가 글을 알 턱이 없을 텐데...” 혜신이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그 자가 누군지 당장 알아보게”
다음날 다시 지전을 찾은 강 상궁은 귀돌에게 어제 책을 가져다주었던 소년을 당장 찾아내라고 말했다. 귀돌이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강 상궁을 타박했다. “아니 느닷없이 그 아인 왜 찾으시오?” “내 그 아이에게 긴히 할 말이 있어 그러는 것이니 어서 그 아이가 어딨는지 알려주게” “에이 뭘 모르시네. 그런 애들은 여기저기 떠돌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데 어디 한군데 붙어 있겠습니깝쇼?” “어제 옮겨 놓은 책에 문제가 생겨 그러는 것이니 만약 그 아이를 찾아내지 않으면 어제 가져간 열두 냥을 자네가 토해내야 할 것이네” 강 상궁이 귀돌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귀돌은 열두 냥을 토해내란 말에 화들짝 놀라 당장 주막으로 달려갔다. 그는 주모에게 대뜸 그 녀석을 당장 내 눈앞에 데려오지 않으면 열두 냥을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렸다. “아니! 나도 걔가 어디로 갔는지 몰라. 어제 오랜만에 본거라고. 근데 열두 냥을 토해내라니 그게 말이 돼?”라며 주모도 지지 않고 악을 썼다. 하지만 귀돌이 으름장을 놓고 돌아가자 주모도 마음이 다급해졌다. 귀돌에게 악을 쓰긴 했지만 대체 언국을 어디서 찾냐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녀석이 가끔씩 나타나긴 하지만 언제 다시 올지는 기약이 없었다.
한편 혜신은 어제 궐문을 지켰던 군사들을 불러 책을 지고 들어갔던 소년의 인상착의를 자세히 물어보았다. 군사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마마” 혜신은 문득 종침교에서 만났던 언국을 떠올렸다. 혜신은 갑자기 군사에게 그 아이의 인상착의를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혹시 그 소년이 키는 훤칠하고 시원시원하게 생긴 눈매에 오뚝한 콧날을 가지지 않았더냐?” 군사는 골똘히 생각해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는 눈치다. “글쎄요 마마! 패랭이를 눌러써서 제가 그 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그렇게 훤칠한 거 같아 보이진 않았는데...” 혜신이 힘주어 반박하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네 그 아인 한 눈에 봐도 훤칠하단 말이다” 군사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잘 생겼는지는 잘...” 그때 혜신이 발끈했다. “누가 잘 생겼다고 그랬는가? 어우 기가 막혀” 혜신은 붉어진 얼굴을 들킬까봐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6. 밤이 늦은 시각 혜신의 방안은 어쩐 일인지 불이 환하다. 혜신은 아까부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서사에서 가져온 책들을 읽다가 문득 어머니를 진료했던 의관이 떠올랐다. 혜신은 뭔가 결심한 듯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나갈 채비를 했다. 차를 들고 들어오던 강 상궁은 무슨 일인가 싶어 후다닥 들어와 막아서며 말했다. “마마! 이 시각에 어딜 가시려고요?” 혜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둘러 채비했다. “잠깐만 다녀올 데가 있네! 금방 다녀오겠네”
강 상궁은 울상이 되었다. “대체 이 시각에 어디를 간단 말입니까? 주상전하께서 아셨다간 경을 치실 것이 옵니다” 혜신은 안심하라는 듯 강 상궁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내 눈에 띄지 않게 얼른 다녀 오겠네”
강상궁은 두 팔을 벌려 혜신을 막아서며 말했다. 혜신의 말이라면 다 받아주는 강 상궁이지만 밤늦은 시각에 옹주가 궐 밖을 나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안 됩니다 마마” 팔짱을 낀 채 심각한 표정으로 보던 혜신이 갑자기 장난기 많은 얼굴로 씩 웃더니 강 상궁의 겨드랑이를 간질이기 시작했다. 간지럼 잘 타는 강 상궁은 간지러움에 어쩔 줄을 몰라 주저앉았다. “아하하하 그만 하십시오” 강 상궁이 간지러워 방안을 뒹구는 사이 혜신이 잽싸게 튀어 나갔다. 강 상궁은 도망가는 혜신을 잡으려고 필사적으로 손을 뻗으며 일어나 앉으려다 중심 못 잡고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아이고! 대체 누굴 닮아 이렇게 제 속을 썩이십니까?” 멀리서 혜신의 해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금방 다녀올게”
얼마 후 혜신은 임 형우 의관의 집 마당에 서 있었다. 사립문은 이미 부서졌고 의금부 군사들이 들이닥친 바람에 세간들은 마당에 나뒹굴고 있었다. 방문은 간신히 매달린 채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자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어머니를 진심으로 돌봐주던 의원이었는데...’ 한참 동안 서 있던 혜신이 형우의 집을 나섰다. 깊은 생각에 빠진 혜신은 어느새 광통교 근처에 이르렀다. 품속에 넣어두었던 침통을 꺼내 들고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는데 길가에 웬 어린아이가 고개를 파묻고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혜신이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아이는 대여섯 살쯤 되어보였다. “얘? 여기서 뭐하니?” 아이는 힘없이 고개를 들더니 그녀를 보며 말했다. “형을 기다리고 있어요” 혜신이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그런데 왜 울고 있어?” 그때 아이의 뱃속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났다. “배고픈 모양이구나?”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문득 생각시를 챙겨주려고 넣어둔 약과가 생각났다. 그녀는 그것을 꺼내 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가 한 번도 구경하지 못한 음식이었다. 아이는 배가 고픈 나머지 덥석 한 입을 베어 물었다. 아이의 얼굴에 금세 미소가 번졌다. 혜신도 덩달아 웃으며 물었다. “네 이름은 뭐야?” “일동이요” “귀여운 이름이네?” 그런데 그때 열 네 댓살 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오더니 갑자기 일동이가 들고 있던 약과를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아이의 목덜미를 잡더니 거칠게 흔들며 소리 질렀다. “야! 너 거지야? 내가 이런 거 받지 말라고 했지?” 놀란 아이는“으앙”하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혜신도 어리둥절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배가 고파서 울고 있던 어린애한테 거칠게 대하는 태도가 못마땅했던 그녀는 허리에 양 손을 얹고 사내아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니?” 사내아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아이를 데리고 가려고 했다. 그때 혜신이 사내아이의 팔을 잡았다. 사내아이가 열 받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시오?” “아이가 배가 고파 울고 있어서 준 것 뿐인데 그게 이렇게 화를 낼 일이냐?”
사내아이의 눈빛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혜신에게 쏘아붙였다. “댁 같은 사람은 이 약과 따윈 안 먹어도 그만인 흔해 빠진 음식이겠지만 우리 같은 백성들은 평생 한번 먹어볼 수 없는 귀한 음식이요. 이걸 맛본 아이는 또 먹고 싶어서 결국 구걸하며 살 수밖에 없소. 우린 거렁뱅이가 아니요. 동정 따윈 필요 없소” 혜신은 기가 막혔지만 할 말이 없었다. 사내아이는 동생의 손을 잡아끌며 광통교 밑 빈촌으로 향했다. 동생은 형을 따라가며 아쉬운지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혜신은 아이를 보며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형의 분노에 찬 눈빛은 그녀의 뇌리에 선명하게 박혔다. 돌아가는 내내 그녀의 귀엔 형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우린 거렁뱅이가 아니요. 동정 따윈 필요 없소!’
일동이와 헤어져 걷던 혜신의 마음은 아까 임 형우의 집을 들렀을 때보다 더 무거웠다. 터벅터벅 걷던 혜신이 우연히 쳐다 본 담벼락엔 최근에 도성을 휩쓸었던 도적 떼의 용모파기가 주르륵 붙어 있었다. 쭉 훑어보니 죄다 험악하게 생긴 사내들뿐이었다. 그런데 맨 마지막 용모파기를 보는 순간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돌처럼 굳어졌다. 마지막 용모파기에는 종침교에서 만났던 언국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설마?’ 그때 저 멀리서 횃불을 든 군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순간 누군가 혜신의 손을 확 잡아챘다. 놀란 혜신이 비명을 지르려던 찰나 한 손이 혜신의 입을 막았다. “웁” 혜신이 보니 패랭이를 깊게 눌러 쓴 소년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입을 막은 손을 힘껏 치우고는 말했다. “웬 놈이냐?”
“쉿! 조용히 해!” 소년은 다급하게 혜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소년의 눈빛은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무척 불안해보였다. 소년과 혜신은 좁은 담벼락 사이에 마주선 채 숨어있었다. 하지만 어찌나 좁은 공간인지 그와 마주 선 소년의 쿵쾅거리는 심장박동 소리가 느껴질 정도였다.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한 그녀의 심장도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녀가 소년의 얼굴을 달빛에 비춰 자세히 보니 얼마 전 종침교에서 만났던 그 아이! 언국이 아닌가? 깜짝 놀란 혜신의 눈빛과 불안한 언국의 눈빛이 교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