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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물 Oct 10. 2024

침술옹주혜신

2.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오열하는 혜신옹주. 어머니와의 이별은 아직 어린 그녀에겐 감당하기 어렵다. 생을 마감하려던 순간 그녀의 팔을 붙잡은 한 사람! 그가 그녀의 인생에 느닷없이 등장했다. 혜신은 그를 더 알고 싶었지만 그는 홀연히 사라지고 마는데...

1. 늦은 밤 혜신옹주는 침금동인을 사이에 두고 정 참봉과 마주 앉아 있었다. 강 상궁은 행여 들키지 않을까 싶어 처소 밖을 살피느라 좌불안석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강 상궁과는 달리 혜신은 초집중한 얼굴로 침금동인을 손으로 짚어가며 혈 자리를 찾았다. 수구 혈을 짚은 혜신은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엄지와 중지로 호침을 야무지게 잡고 검지로는 침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지해 주었다.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수구 혈에 정확하게 3푼 깊이로 침을 꽂았다. 그녀가 침을 꽂은 수구 혈에서 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곁에서 보고 있던 정 참봉이 잇몸을 보이며 웃었다.  

“정확하게 아주 잘 놓았습니다.”

혜신이 정 참봉을 보며 활짝 웃었다.

“정말?”

“예 마마! 침금 동인은 정확한 혈 자리에 침을 꽂으면 물이 흘러나오도록 설계되어 있지요. 이제 마마의 침술은 도성의 웬만한 의원보다 낫습니다. 소인 여러 학생을 가르쳐보았지만 이렇게 침술을 빨리 습득하는 학생은 본 적이 없습니다. 이젠 더 이상 제게 배울 것이 없습니다. 마마”

그때 혜신이 갑자기 정 참봉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 밀고는 말했다.

“그럼 내게도 추천서를 써주겠나?”

혜신옹주의 말에 깜짝 놀란 강 상궁은 혜신 옹주를 보며 강하게 고개를 힘껏 가로저었다. 정 참봉도 당황해하며 입을 열었다.

“마마!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수련이란 것이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너무 고되어 건장한 의학생도들도 못 견디고 중도에 포기하기 일쑤지요. 게다가 마마께서 그곳에 가시는 것을 제가 어찌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혜신옹주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그건 염려 말고! 추천서 써 줄 거지?”  

정 참봉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어린 혜신 옹주가 그에게 침술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3년 전이었다. 숙의 김 씨가 산후풍으로 앓아누워 내의원 의관인 정 참봉의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때 숙의 김 씨 처소에 들어온 어린 혜신 옹주는 정 참봉이 침을 놓는 것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가 침을 다 놓고 뜸을 오십 장쯤 놓느라 치료하는 시간은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혜신 옹주는 정 참봉이 치료를 마칠 때까지 미동도 없이 곁에서 지켜보았다. 치료를 마치고 숙의 김 씨 처소를 나서는 정 참봉의 팔을 붙잡은 것은 혜신 옹주였다.

“자네 내게 침술을 가르쳐줄 수 있겠나?”

당황한 정 참봉의 눈이 커졌다. 그는 아무 말없이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제가 마마께 침술을 가르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침술을 배우려면 사람의 몸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하옵니다. 하여 먼저 황제내경과 침구택일편집 그리고 의방유취를 모두 읽으셔야 하옵니다.”

그는 혜신옹주가 그저 단순한 호기심에 던진 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침술을 배운다는 것이 어디 그리 수놓는 것처럼 간단한 일인가? 게다가 왕의 딸이 침술을 배우다니... 어려운 의서들을 나열하면 질려서 두 번 다시 물어보지 않겠다 싶어 에둘러 대답하고는 내의원으로 향했다. 몇 달 후 정 참봉을 만나러 온 혜신 옹주의 손엔 정 참봉이 말했던 의서들이 들려있었다.   

“자네가 말한 책들 다 읽었으니 이젠 내게 침술을 가르쳐 주겠나?”

너무 놀란 정 참봉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혜신 옹주의 말을 가볍게 여기며 넘겼지만 그녀의 관심은 호기심 그 이상이었다. 당황한 그는 숙의 김 씨를 찾아가 하소연했다. 숙의 김 씨가 그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유학하는 양반들도 의서를 집필하지 않는가? 옹주가 호기심이 많아 침술에 관심이 생겼나 보네. 배움에는 귀천이 없으니 자네가 침술을 좀 가르쳐 주면 어떻겠나?”

라며 오히려 정 참봉에게 부탁을 했다. 김 씨는 혜신의 성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혜신은 한번 꽂히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다. 그런 그녀가 스스로 부딪혀보고 한계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 숙의 김 씨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숙의 김 씨는 궐 안에 보는 눈들이 많으니 옹주의 처소에서 은밀히 가르쳐줄 것을 당부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침술 수업이 어느덧 3년이 훌쩍 지났고 그녀의 실력은 웬만한 도성 안의 의원들을 뛰어넘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혜신 옹주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정 참봉이 수업 중에 잠깐 언급했던 수련도감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던 그녀는 오매불망 수련도감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의관들을 배출하기 위한 곳인 데다 죄다 사내들만 있는 곳이라 여인이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여인의 몸으로 그것도 옹주의 신분인 그녀가 수련도감에 발을 내딛겠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 참봉은 고개를 힘껏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인가? 혜신 옹주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정 참봉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며칠 후 숙의 김 씨의 처소엔 혜신이 근심 어린 눈빛으로 어머니 곁에 앉아 있었다. 방안엔 장롱이며 병풍 그리고 문갑까지 화려한 장식품 하나 없이 소박했다. 세간만 봐도 평소 검소하고 단아한 숙의 김 씨의 성품이 엿보였다. 햇살이 격자 모양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한낮이지만 방안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자리에 누운 숙의 김 씨의 얼굴은 부쩍 수척해져 있었다. 혜신이 숙의 김 씨의 이마에 손을 대며 말했다.

“어머니 몸은 좀 어떠십니까?”

그때 숙의 김 씨가 자신의 이마에 얹은 혜신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으로 감싸 쥘 수 있을 만큼 작고 따뜻한 손이었다. 그녀는 혜신의 손을 말없이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만큼은 꼭 지켜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몸은 점점 좋아지지 않고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떨어졌다. 숙의 김 씨는 그녀가 아프다는 소식에 걱정되어 아침저녁으로 문안하는 혜신 옹주가 기특하고 대견하면서도 막상 딸의 얼굴을 보니 한없이 약해지는 마음에 그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혜신 옹주는 가만히 그녀의 눈물을 닦았다.

한참 후 숙의 김 씨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혜신아 이 어미는 괜찮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하지만 혜신 옹주는 그녀가 몹시 걱정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워낙 부지런하고 깔끔해 잠시도 몸을 쉬질 않으셨고 아무리 몸이 안 좋아도 웬만해선 자리에 잘 눕지도 않으시는 분이셨다. 혜신 옹주는 그녀의 어머니가 지금처럼 안색이 안 좋아지고 기력이 떨어진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내의원 의관들과 의녀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어머니를 치료하고 있으니 반드시 일어나실 거라 생각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일어나 앉을 힘도 없는 어머니를 보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때 밖에서 이 상궁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마 내의원 의관이 들었습니다”

방문이 열리고 내의원 의관 임 형우와 탕약을 든 의녀 정희가 함께 들어왔다. 임 형우와 정희는 예를 갖춰 절하고는 앉아 김 씨의 안색부터 살폈다. 함께 온 의녀정희가 김 씨 곁에 앉아 진맥 하고는 뒤로 물러나 앉았다. 임 형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마마 며칠 동안 고열에 시달리셔 온몸에 기혈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더 이상 침을 맞는 것은 몸이 견디기 매우 힘드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오늘은 허해진 기혈을 보하는 사물탕을 처방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녁으로는 녹두죽을 대령토록 했습니다. 잡수시고 원기를 회복하소서”

정희가 이 상궁과 함께 김 씨를 부축해 앉혔다. 워낙 왜소한 그녀였지만 오늘따라 더욱 비쩍 말라 보였다. 숙의 김 씨는 겨우 일어나 탕약을 마시고는 다시 힘겹게 누웠다. 그때 밖에서 대전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상전하 납시오!”

혜신과 내의원 의관 및 의녀가 일제히 일어나 허리를 굽히고 예를 갖추었다. 왕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방에 들어섰다. 그가 숙의 김 씨 곁에 앉으며 말했다.  

“숙의! 몸은 좀 어떻소?”

숙의 김 씨를 애틋하게 여기는 왕의 마음이 그의 목소리에 묻어났다. 숙의 김 씨는 이 상궁의 도움을 받아 힘겹게 몸을 일으키더니 기침을 연거푸 했다.

“전하! 전하께서 미천한 소인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내의원 의관들이 성심으로 저를 돌봐주고 있습니다. 이제 곧 차도가 있을 것입니다. 너무 심려치 마소서”

왕은 요사이 더욱 수척해진 그녀의 손을 잡으며 안타까운 마음에 차오르는 눈물을 가까스로 삼켰다. 왕은 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숙의가 오늘따라 더욱 힘들어 보이는데 어떤가?”

임 형우가 엎드리며 입을 열었다.

“예 전하! 숙의 마마께서는 며칠 동안 고열로 인해 기력이 많이 떨어지셔서 그런 것이옵니다. 다행히 어젯밤부터 열이 떨어지시어 오늘부터는 기혈을 보하는 사물탕을 올렸사옵니다”

왕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임 형우에게 말했다.

“내 자네를 믿네! 신경 써서 숙의를 잘 돌봐주게나”

왕의 목소리에는 숙의 김 씨를 향한 진심이 담겨있었다.  

“성심을 다하겠사옵니다 전하”

임 형우가 이마를 바닥에 대고 절하며 대답했다. 숙의 김 씨는 진심으로 그녀를 염려하는 주상전하의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우면서도 사랑하는 이 앞에 힘없이 누워만 있는 자신이 한스러웠다.  

2.

저녁상을 모두 물린 시각, 영춘헌 숙의 김 씨 처소 앞에 형우가 서 있었다. 때마침 이 상궁이 소반을 들고 방문을 나서며 형우를 보았다. 이 상궁은 형우를 보고는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방안에 들어선 형우는 숙의 김 씨에게 천천히 다가가 앉았다. 인기척에 숙의 김 씨가 눈을 떴다. 숙의 김 씨는 이 상궁을 의지해 겨우 몸을 일으키고는 형우가 가져온 차를 몇 모금 마셨다. 기침을 가라앉혀 숙면을 하도록 돕는 금은화차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형우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고 그녀는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자리에 누운 그녀의 이마엔 유난히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이미 열이 다 내린 것을 확인했던 그이기에 그녀의 처소를 나서면서도 뭔가 개운치 않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깊은 밤 축시가 막 지날 무렵 갑자기 숙의 김 씨 처소의 불이 환하게 켜졌다.

“마마! 숙의 마마! 정신 차리시어요!”

숙의 처소 이 상궁의 목소리가 처소 밖까지 울렸다. 뒤이어 이 상궁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당장 의관을 불러오너라! 임 의관을 불러! 어서!”

미처 신을 신지도 못하고 버선발로 뛰어나가는 나인 뒤로 대야를 들고 들어오던 나인 하나가 다급히 처소로 뛰어 들어갔다. 서고에서 나오던 형우는 숙의 김 씨 처소의 나인 하나가 버선발로 뛰어오는 것을 보고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단숨에 달려온 형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숙의 김 씨의 맥부터 짚었다. 얕고 빠르게 뛰는 것이 삭맥이었다. 그때 힘겹게 눈을 뜬 숙의 김 씨가 허공을 보더니 마지막으로 사력을 다하듯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혜... 신...”

그녀는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형우의 손끝에 그녀의 맥이 잡히지 않았다. 당황한 형우의 동공이 흔들리고 정신은 아득해졌다. 시간이 갑자기 멈춘 것만 같았다. 그의 귓가엔 “마마! 숙의 마마!”하며 울부짖는 이 상궁의 목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 형우가 정신을 차렸을 땐 소식을 듣고 달려온 동료 의관 김 정한이 이미 와 있었다. 그때 밖에서 울음 섞인 왕의 목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

“숙의! 숙의!!”

한걸음에 달려온 왕은 그의 품에 숙의 김 씨를 안았다. 왕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김 씨를 흔들어 보았다.

“이보게 숙의! 날세! 내가 왔네. 내가 왔는데 어찌 이리 아무 말도 안 하는 겐가? 눈 좀 떠보게! 눈 좀 떠보란 말일세”

왕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무정한 사람 같으니! 대체 뭐가 그리 급해서 나를 두고 이렇게 가버리는 겐가? 제발 눈 좀 떠보게. 으흐흐흑”

휘령아! 눈 좀 떠봐 휘령아!”

왕은 처음으로 숙의 김 씨의 이름을 불렀다. 김 휘령. 숙의 김 씨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왕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었지만 군주의 체통을 중시하는 왕실의 지엄한 규율 때문에 사랑했던 그녀의 이름을 마음 놓고 부르지 못했다.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뼈아픈 후회와 사랑하는 이를 속절없이 떠나보내야 하는 원통함으로 가득 찬 왕은 한동안 숙의 김 씨를 놓지 못했다. 목 놓아 우는 왕의 곁에 서 있던 나인들과 의관들은 감히 숨소리조차 낼 수가 없었다. 곁에 선 이 상궁은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만 연신 닦았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왕은 갑자기 분노의 찬 목소리로 형우와 정한을 쏘아보았다.

“네 놈들이냐? 숙의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

엎드려 울다가 목이 멘 형우가 겨우 입을 뗐다.

“전하”

왕이 형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숙의는 낮에 나와 이야기를 나눌 만큼 상태가 나쁘지 않았어. 그런데 네 놈이 대체 이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형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소인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왕의 목소리는 울분으로 가득 찼다.

“내가 네 놈에게 각별히 부탁까지 했는데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형우는 그저 바닥에 이마를 대고 엎드려 울었다.

“전하! 소신을 죽여주시옵소서! 흑흑흑”

그때 곁에서 아무 말 없이 상황을 살피던 정한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전하! 소인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오나 전하!! 숙의 마마께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잦은 유산으로 인해 산후풍을 앓으셨습니다. 그것이 이번 과경과 겹쳐서 몸이 많이 허약해지셨습니다. 저희 의관들은 이 모든 것을 면밀히 살펴 마마님 진료에 밤낮으로 성심을 다한 것은 전하께서도 아시는 바이옵니다. 부디 이 점을 살펴주시옵소서! 전하”

왕은 어이없다는 듯 소리쳤다.

“좋다! 네 놈의 청대로 너희들의 죄를 면밀히 살펴서 낱낱이 밝히고 그 죄를 엄중히 물을 것이다!”

왕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형우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엎드린 채 흐느껴 울었다. 왕이 나가고 나자 정한은 어디론가 급히 달려갔다.

그 시각 소식을 듣고 달려온 혜신은 방문을 열어젖히고는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는 반듯이 누운 숙의 김 씨의 곁에 주저앉았다. 혜신 옹주는 싸늘한 주검이 된 어머니의 얼굴이 낯설어 그녀의 뺨에 손을 올리려다 멈칫했다.

“어머니! 어머니!”

그녀는 숙의 김 씨의 뺨에 가만히 손을 댔다.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온기가 그녀의 손에 느껴졌다. 혜신 옹주는 두 손으로 숙의 김 씨의 얼굴을 감싸 쥐어보고 그녀의 손과 발을 차례로 만졌다. 혜신 옹주는 어머니의 얼굴에 자신의 뺨을 대보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강 상궁을 보며 말했다.

“강상궁! 우리 어머니 아직 이렇게 따뜻한데? 잘못 안 거지? 그렇지?”

곁에 섰던 강 상궁이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숙의 김 씨를 흔들었다. 아무리 흔들어도 반응이 없는 숙의 김 씨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혜신 옹주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통곡하고 말았다.

“어머니! 저를 지켜준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소녀를 끝까지 지킨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머니! 어머니!”

혜신은 숙의 김 씨를 붙들고 어머니를 목 놓아 부르다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는 그 뒤로 다시는 어머니를 볼 수 없었다. 숙의 김 씨는 그렇게 하나뿐인 딸과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3. 두 시각이 넘도록 초조하게 궐 앞을 서성이는 한 사내아이가 있었다. 궐문을 지키던 군사들이 아이를 불러 세웠다.

“대체 뭐 하는 놈인데 아까부터 이 앞을 어슬렁거리는 게냐?”

시종일관 굳어 있는 군사들의 표정에 잔뜩 주눅 든 사내아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아비는 내의원 의관인데 어제부터 집에 들어오시지 않아 만나려고 기다리는 중이옵니다”

그때 한 군사가 사내아이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대뜸 호통을 쳤다.

“아비가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기방에나 가서 찾을 것이지 아까부터 거슬리게 이 앞을 오락가락하는 게냐? 어서 썩 물러가지 못해?”

겁에 질린 사내아이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궐 앞에서 쫓겨난 아이는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사립문 앞에 선 그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그의 집 마당엔 세간들이 죄다 내팽개쳐져 있었다. 그때 안방을 수색하고 나오던 의금부 군사와 눈이 마주쳤다.

“혹시 저놈 임 형우의 아들 아니냐? 저놈 잡아라!”

화들짝 놀란 사내아이는 재빨리 도망쳤다. 사내아이는 다름 아닌 임 형우의 아들 언국이었다. 언국은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멈추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얼마쯤 달렸을까? 한참 후 뒤따라오던 군사들이 보이지 않자 잠시 숨을 헐떡이며 멈춰 섰다.

언국이 주위를 둘러보니 종침교 근처였다. 언국은 얼른 다리 밑에 몸을 숨기고 숨을 죽였다. 뒤따라오던 군사들 한 무리가 종침교를 건너갔다. 언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왜 쫓기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생각하던 그때 어제 궐 앞에서 만났던 한 의녀가 생각났다.

어제 똑같은 시각 언국은 궐 앞에 서 있는 군사에게 매달려 간청했다.

“제발 한 번만 궐에 들어가게 해 주세요. 우리 아버지를 만나야 해요. 제발요!”

그때 험상궂게 생긴 한 군사가 언국 앞을 가로막았다.

“궐이 너희 집 뒷간인 줄 아느냐? 네 놈 맘대로 드나들게? 어서 썩 꺼지지 못해?”그는 냅다 언국을 발로 걷어찼다. 언국은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그때 궐을 나서다가 언국이 맞는 것을 본 의녀가 그에게 달려와 그를 일으키며 말했다.

“너 혹시 임 형우 나리의 아들이니?”

언국은 그녀가 자기를 안다는 사실에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가 여길 어떻게 온 거야? 여긴 네가 오면 안 돼. 어서 일어나 나랑 같이 가자 어서”

언국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의녀를 따라나섰다. 의녀는 연신 주위를 살피며 잰걸음으로 걸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궐 주변을 빠져나와 백운동천과 사직동천이 만나는 종침교 근처에 이르렀다. 인적이 드물어 보는 사람이 없는 한적한 길. 말없이 앞서 걷기만 하던 의녀가 주위를 한번 살피고는 언국을 보며 말했다.

“어머니는 어디 계시니? 왜 너 혼자야?”

어머니라는 말에 언국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간밤에 어머니께서 잠깐 다녀오시겠다고 하고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한숨을 푹 내쉰 의녀가 두 손으로 언국의 어깨를 잡고는 힘주어 말했다.

“너 이제부터 내 말 잘 들어. 절대로 집으로 가면 안 돼 알겠지? 그리고 다        시는 궐 앞에도 나타나지 마. 절대로! 네 목숨이 위험해”

목숨이 위험하단 말에 언국이 깜짝 놀랐다.

“왜요?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언국이 되묻자 의녀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결심한 듯 언국을 보며 이야기했다.

“네가 뭘 잘못해서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지금은 네 목숨이 위험해”

불안한 언국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의녀는 그런 언국을 보니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언국을 보며 힘주어 말했다.

“지금 다 설명할 순 없어. 하지만 분명한 건 너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야. 무조건 도망가 알겠지?”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울고 서있는 언국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네 아버지의 스승이셨던 자강 선생을 찾아가. 인왕산 어딘가에 살고 계신다고   들었어. 그분이라면 너를 도와주실 거야”  

그녀는 언국과 눈을 맞추며 힘주어 말했다.

“정신 차려! 그래야 살아. 너라도 꼭 살아야 해. 알겠지?”

그녀의 말에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던 언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국은 감았던 눈을 떴다. 자강, 인왕산...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언국의 눈에 종침교 다리 위에 서 있는 혜신이 들어왔다. 열두어 살쯤 되어 보이는 앳된 소녀였다. 왜 혼자 다리 위에 서 있을까? 하며 언국은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눈에는 초점이 없어 보였다. 언국이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그녀가 난간 위로 발을 척 올리더니 넘어가려 하는 게 아닌가?

당황한 언국은 다급히 소리쳤다.

“안돼!”

언국이 달려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지만, 혜신은 거칠게 뿌리쳤다. 그녀는 다시 난간을 넘어가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언국은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끌어내렸다. 그때 갑자기 두 사람은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언국은 일어나자마자 그녀에게 냅다 소리를 질렀다.

“너 미쳤어? 여기서 떨어지면 죽는다고!”

혜신은 언국을 쏘아보며 말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언국은 혜신의 말에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봤잖아 지금. 그런데 어떻게 상관이 없어?”

혜신은 뭐 이런 애가 다 있나 싶어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진심으로 화난 사람 같았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누구도 그녀에게 이렇게 화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서있는 이 아이가 내게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혜신을 마주한 언국 역시 그녀에게 자신이 이토록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놀랐다. 하지만 그녀가 뛰어내리려는 순간 무조건 그녀를 막아야겠다는 생각밖엔 없었다. 씩씩거리던 그는 슬픔으로 가득한 그녀의 눈을 보았다.

“나도 살아 있어. 나 같은 애도... 그러니 너도 살아”

언국의 눈에 어느샌가 눈물이 차올라 그렁그렁했다. 혜신은 더욱 어이없었다.

‘이 아이 대체 뭔데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그때 언국이 한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정신 똑바로 차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살아야 해”

그는 마치 자신에게 들으라는 듯 힘주어 말했다. 언국은 입술을 꽉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 혜신은 가만히 언국을 보고 있다가 무조건 살아야 한다는 언국의 말에 갑자기 울음이 터져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따라가고픈 마음밖엔 없었다. 그런데 살아야 한다는 언국의 말이 가슴에 바위처럼 무겁게 박혔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어머니가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숙의 김 씨는 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그런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나자 온 우주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젠 살아야 할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살라니... 그의 말이 천둥처럼 그녀의 마음에 울렸다. 언국은 통곡하는 혜신 앞에서 주먹으로 연신 눈물을 훔쳐보았지만 그 역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울음이 잦아든 혜신과 언국이 말간 얼굴로 나란히 종침교 아래 바위에 걸터앉아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아무 말 없던 언국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여기야?”

혜신은 언국의 물음에 잠깐 고개를 돌려 쳐다보고는 다시 흐르는 강물을 보며 말했다.

“어머니랑 자주 오던 곳이야. 여기라면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언국은 가슴이 먹먹해져서 혜신을 돌아보았다. 혜신의 뺨이 노을빛에 물들어 붉게 빛나고 있었다. 혜신은 물끄러미 강물을 보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없는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어. 너무 무서워”

그가 혜신을 보며 말했다.

“나도 무서워. 그런데 난 꼭 만날 거야. 꼭”

혜신은 언국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때 언국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혜신에게 건넸다. 그것은 나무로 만든 낡은 침통이었다. 혜신은 그것이 침통인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 아이가 어떻게 침통을 지니고 있을까?’

혜신은 의아한 표정으로 언국을 보았다. 언국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아끼던 건데 너 줄게”

혜신이 침통을 받아 들자 언국이 말을 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주신 거야”

혜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이걸 날 주면 어떡해?”

“괜찮아. 난 꼭 아버지를 다시 만날 거야”

혜신은 아무 말 없이 언국을 보았다.

“너희 집은 어디야?”

혜신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우리 집? 우리 집은 궐”

언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혜신은 아차 싶어 재빨리 말을 바꿨다.

“궐이 아니라 궐 근처에 있는 음... 맞다 안국동! 안국동이야”

혜신은 언국이 눈치챘을까 싶어 그의 표정부터 살폈다. 다행히 언국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그럼 같이 가자 내가 바래다줄게”

언국은 호기롭게 대답했지만 사실 그는 쫓기는 신세가 아닌가? 게다가 궐 근처라니... 행여나 의금부 군사들의 눈에라도 띄는 날엔 당장 붙잡혀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언국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그녀를 꼭 바래다주어야겠다 생각했다. 그런 그의 사정을 알 리 없는 혜신은 자신의 신분이 들통날까 봐 두려워 안절부절못하며 언국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안국동에 거의 다다를 무렵까지 아무 말 없이 나란히 걸었다. 그녀는 가끔씩 언국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다부지게 생긴 그의 옆모습은 왠지 듬직해 보였다. 그런데 언국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는 혜신을 보며 말했다.

“내 이름은 언국이야 임 언국. 네 이름은 뭐니?”

갑작스러운 물음에 혜신이 당황하며 말했다.

“내 이름?”

사실 혜신에게 이름을 묻는 사람은 언국이 처음이었다. 궐 안에선 이미 모든 사람이 그녀를 알고 있기에 대놓고 그녀에게 이름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혜신은 이름이라는 말에 불현듯 어머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네 이름은 슬기롭고 총명할 혜에 진실할 신이란다. 슬기로운 지혜를 가지고 진실한 마음으로 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지”

생각에 잠긴 그녀는 꿈꾸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때 갑자기 맞은편에서 의금부 군사들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당황한 언국은 마침 곁을 지나던 가마 뒤로 잽싸게 몸을 날렸다. 혜신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고 언국 쪽을 돌아보곤 어리둥절했다. 바로 곁에서 걷고 있던 언국이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혜신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며 언국을 찾아 헤매는 혜신과 가마 뒤로 숨어 있는 언국이 서로 엇갈리며 스쳐 지나갔다.

“내 이름 아직 말 못 했는데...”

혜신은 아쉬움에 언국이 건네준 침통만 만지작거렸다. 끝내 언국을 찾지 못하고 궐로 돌아온 혜신은 저녁을 먹는 내내 언국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아이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바래다준다고 하고선...’

그녀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아까 그에게 받은 침통을 경대 아래로 치워버렸다. 그녀는 이불을 덮고 누웠지만, 쉽사리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뒤척이다 일어나 앉은 혜신은 문득 아련하게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혜신의 귓가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혜신아! 혜신아!”

숙의 김 씨가 부르자 어린 혜신은 해맑은 얼굴로 달려간다. 혜신은 그녀의 품에 와락 안겼다. 혜신을 번쩍 안아 올리는 숙의 김 씨의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피어올랐다.

“어쩜 우리 혜신옹주는 이리 어여쁠까?”

혜신이 함박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어머니를 닮아 그런 것이 아니옵니까?”

“아니다 이 어미 생각엔 우리 혜신이가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것 같구나. 그런데 혜신아, 혜신이란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모르옵니다 제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혜신이란 이름은 슬기롭고 총명할 혜에 진실할 신이란다. 슬기로운 지혜를 가지고 진실한 마음으로 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란다”

“슬기롭고 총명할 혜에 진실할 신 혜신! 어머니! 저는 제 이름이 참 마음에 듭니다”

“이 어미도 네 이름이 너를 똑 닮아 아주 마음에 든단다”         

둘의 웃음소리가 혜신의 귓가에 울렸다. 그녀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통곡했다.

한편 의금부 군사들의 눈을 피해 가마 뒤로 몸을 숨긴 언국은 가마꾼들과 발맞춰 걷기 시작했다. 그때 뒤에 있던 가마꾼이 인상을 쓰더니 언국을 밀치며 말했다.

“웬 놈이냐?”

언국은 두 손을 싹싹 빌며 사정했다.

“살려주세요! 잠시만 몸을 좀 숨기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가마꾼이 버럭 성을 냈다.

“이런 고얀 놈을 보았나? 이 가마가 누가 탄 가마인 줄 알고 함부로 달려드는 게냐? 썩 물러가지 못해?”

“제발 좀 살려주십시오!”

“아니 그런데 이놈이 썩 꺼지라는 데도”

언국은 가마꾼의 발길질에 그만 나가떨어졌다.

그때 화려한 꽃술이 달린 가마의 작은 창이 드르륵 열렸다. 가마꾼과 언국의 실랑이에 거슬린다는 듯 인상을 쓰는 여인, 숙의 엄 씨다. 그녀는 가마꾼들을 쏘아보고는 말없이 문을 휙 닫아버렸다. 다행히 의금부 군사들은 언국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쓰러졌던 언국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발목이 몹시 시큰거렸다. 간신히 딛고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오던 길을 되짚어가보았지만 끝내 만나지 못했다.  

밤길을 터덜터덜 걷던 그는 낮에 만났던 의녀의 말을 떠올렸다.

‘네 아버지의 스승이셨던 자강 선생을 찾아가. 인왕산 어딘가에 살고 계신다고    들었어. 그분이라면 너를 도와주실 거야’

언국은 절뚝거리며 천천히 인왕산으로 향했다.

4. 다음날 강 상궁은 죽 그릇이 놓인 소반을 들고 혜신의 방문 앞에 섰다.

“마마! 낮것상 들이겠사옵니다”

안에선 힘없는 혜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필요 없어”

하지만 강 상궁은 오늘만큼은 순순히 물러날 수 없었다. 그녀가 벌써 식음을 전폐한 것이 사흘이나 지났기 때문이었다.  

“하오나 마마”

“필요 없대도”

아니나 다를까 혜신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강 상궁도 오늘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마마! 소인 들어갑니다!”

어머니 장례 후 얼굴이 부쩍 해쓱해진 혜신이 힘없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막무가내로 들어오는 강 상궁을 한번 힐끔 보더니 다시 서책에 얼굴을 파묻었다. 강 상궁은 그런 혜신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들어가더니 혜신이 읽던 서책을 접어 한쪽으로 밀어놓고는 소반을 내려놓았다. 혜신은 황당한 표정으로 강 상궁을 쏘아보며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당장 치우지 못하겠느냐?”

그때 강 상궁은 더는 못 참겠는지 인상을 쓰며 소리를 빽 질렀다.

“마마!”

어릴 때부터 줄곧 함께 지내온 강 상궁이 지금껏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는 걸 본 적이 없었던 혜신은 깜짝 놀랐다. 강 상궁은 뭔가 작심한 듯 혜신 앞에 마주 앉아 정면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이 일로 소인의 주리를 틀겠다 하시면 소인! 달게 받겠습니다”

혜신옹주는 몹시 당황했다. 강 상궁의 눈빛에서 결연한 의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소인 제 목숨 걸고 한 말씀만 올리겠습니다. 소인 아홉 살에 어머니께서 역병으로 돌아가셨을 때 목이 메서 도저히 밥이 안 넘어갑디다. 옹주마마께서 이러시는 거 저 너무 잘 압니다. 마마! 마마를 낳으신 분은 누가 뭐래도 숙의 마마님이 맞습니다. 하지만 옹주마마를 업고 안아 키운 게 저란 것은 아십니까? 마마께서 입도 안 댄 밥상을 물릴 때마다 소인 애가 닳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울먹이는 강 상궁을 보며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혜신이 겨우 입을 열었다.    

“강 상궁”

강 상궁이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숙의 마마께서 돌아가시던 날 소인 숙의 마마께 말씀드렸습니다. 마마! 소인 이년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옹주 마마 끝까지 지킬 테니 염려 말고 눈 감으세요! 라구요”

혜신은 강 상궁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오열하고 말았다. 하지만 강 상궁은 더 이상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혜신옹주를 안아주었다.


혜신 옹주의 울음이 잦아들자 강 상궁은 혜신옹주의 얼굴을 닦아주고는 소반에 놓인 죽을 한 수저 뜨며 말했다.

“마마! 이제 한술이라도 뜨십시오 아~~”

혜신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새끼 새처럼 받아먹었다. 그 모습을 보자 강 상궁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강 상궁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론 이렇게 밥을 잘 드시는 겁니다. 아시겠지요?”

혜신은 죽을 받아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이쁩니까? 옹주마마! 그거 아십니까? 저는 옹주마마 입으로 밥이 들어갈 때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합니다”

그때 갑자기 혜신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그건 어마마마께서 하시던 말씀인데...”

혜신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다시 울음이 터져 엉엉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강 상궁은 자기 입을 손으로 때리며 말했다.

“아이고!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방정이야! 옹주아기씨! 취소! 취솝니다 아니! 취소는 아니고. 아닙니다. 취소예요 취소!! 아이참 이게 아닌데...”

당황하여 말을 버벅거리는 강 상궁의 모습을 보던 혜신이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풉”

강 상궁은 혜신이 웃자 함께 따라 웃었다.

죽을 다 비운 혜신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강 상궁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왜 돌아가셨을까? 침 때문일까? 아니면 탕약 때문일까? 매일매일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모르겠어”

강 상궁이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소반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옹주마마! 세상에 오는 것도 떠나는 것도 모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모두 하늘의 뜻에 달린 것이지요”

혜신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혜신의 눈에 문득 경대 아래 밀어두었던 침통이 보였다. 얼마 전 종침교에서 만났던 그 아이에게 받은 것이었다. 혜신이 침통을 꺼내 들고는 가만히 손에 쥐어보았다. 그녀는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혜신아! 네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으면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단다. 반드시 이 궐에서 살아남아야 한단다. 그래야 네가 정말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어”

혜신은 물끄러미 침통을 만지작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꼭 살아남을 거야. 그리고 더 이상 어머니처럼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없게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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