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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물 Sep 19. 2024

침술옹주혜신

1. 희대미문(稀代未聞)

왕세자도 아니고 정빈도 아닌 귀인의 여식이 자꾸만 궐의 입소문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영 거슬린다. 무릇 옹주라 하면 몸가짐을 정갈하게 하고 궐의 법도를 부지런히 익히고 배워 좋은 혼처로 시집가는 것이 관례거늘 이 아이는 애초에 그런 것 따윈 관심이 없다. 게다가 은밀히 배운 침술로 궐 안의 소란만 일으키는데…

1.

오후의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숙의 김 씨의 손끝에서 고운 홍색 비단위로 모란꽃이 탐스럽게 피어나고 나비와 벌이 날아다닌다. 단아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첩지를 올린 숙의 김 씨가 금색 실을 꿴 바늘로 정성스레 수를 놓고 있다. 그녀 곁엔 알록달록 고운 색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그녀가 마지막 한 땀을

수놓아 매듭을 짓고 펼쳐 보이자 곁에 선 이 상궁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마마! 모란꽃에서 향기가 나는 것 같사옵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강상궁도 맞장구를 쳤다.

“예 마마! 나비와 벌도 꽃을 보고 날아든 것 같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궐 안에선 마마의 솜씨를 따를 사람이 없사옵니다”

연이은 상궁들의 찬사에 숙의 김 씨는 두 뺨이 발그레해지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조용한 성격의 숙의 김 씨는 천상 여인이었다. 그녀는 수놓기를 좋아했다. 방안의 병풍이며 이불도 침방나인들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수놓았다. 그녀가 생각시였던 시절에 잠시 침방에서 일했는데 침방나인들 사이에서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생각시 하나가 수를 기가 막히게 놓는다는 소문이 자자했었다.

상궁들이 수놓은 치마폭을 쓸어보며 연신 감탄하던 그때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나인 하나가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며칠 전 혜신의 처소에 새로 들어온 생각시 계금이었다. 당황한 강 상궁이 나인을 다그쳤다.

“네 이년!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 이게 무슨 짓이냐?”  

하지만 계금은 그런 것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계금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 큰일 났사옵니다. 은비 언니가 쓰러졌는데...”

계금이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이기 시작했다.

“뭐라고? 은비가? 왜? 어서 소상히 말하지 못해?”

강 상궁이 계금을 다그쳤다. 계금이 우느라 말을 잇지 못하자 숙의 김 씨가 강상궁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자네 어서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게”

강 상궁은 계금과 함께 혜신의 처소로 달려갔다. 강 상궁이 다급하게 혜신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방안엔 은비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고 곁에 있던 은비의 동무인 나인 하나가 울고 있었다. 당황한 혜신옹주는 침을 든 채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은비야! 은비야!”

강 상궁이 은비를 흔들어 보았지만 은비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소식을 들은 내의원 정 참봉이 급히 혜신옹주의 처소로 달려왔다.

잠시 후 숙의 김 씨 앞에는 혜신이 죽었다 싶은 얼굴로 납작 엎드려 있었다. 그 곁에는 정신을 차린 은비가 핏기 없는 얼굴로 엎드려 있었다. 계금은 강 상궁과 숙의 김 씨의 눈치만 연신 살핀다. 한참 아무 말 없던 숙의 김 씨가 입을 열었다.

“이 아이 괜찮은 것입니까?”

정 참봉이 은비를 한번 보고는 대답했다.

“예 마마! 이 나인이 침을 맞은 혈 자리는 순환을 촉진시키는 혈 자리라 별 문제는 없사옵니다. 다만 여러 날을 굶어 기가 허해진 데다 침을 맞아 잠시 정신을 잃은 것이옵니다. 하지만 젊고 지병이 없으니 식사만 잘한다면 바로 기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숙의 김 씨가 은비에게 물었다.

“왜 굶은 것이냐?”

은비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곁에 있던 혜신이 입을 열었다.

“한 달 후에 궁녀들이 모이는 축제가 있는데 그때 몸매가 가장 어여쁜 궁녀를 뽑는다 하옵니다. 거기서 뽑히고 싶어 모두 섭식을 줄이고 몸매를 가꾸고 있사온데 은비도 준비하다가 그만”

숙의 김 씨가 은비에게 물었다.

“일부러 밥을 굶었다?”

은비가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옵니다”   

숙의 김 씨가 차분히 물었다.

“침은 누구에게 맞은 것이냐?”

그때 혜신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곁에 엎드린 은비에게 연신 눈짓을 보냈지만 벌벌 떨고 있던 은비는 이실직고했다.

“마마 죽여주시옵소서! 옹주마마께서 침을 맞으면 살이 더 빨리 빠진다기에 그만...”

망했다 싶은 혜신은 숙의 김 씨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는 것을 보고는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머니 저는 궁녀들에게 침을 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나인들이 모여서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세상에 뭐라 하는지 아십니까? 글쎄 간장을 몸에 바르면 살이 빠진다고 믿고 있지 뭡니까? 제가 하도 답답해서 경혈을 자극하면 살이 빠진다고 설명하니 은비가 제발 한 번만 맞혀달라고 하도 사정을 하길래 그만...”

숙의 김 씨는 어이가 없었지만 꾹 누르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경혈을 자극하면 살이 빠진다?”

혜신은 숙의 김 씨가 반응을 보이자 신이 나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예 어머니! 먼저 얇은 허벅지! 매끈한 꿀벅지를 원한다면 풍시 혈에 침을 맞으면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다리 양쪽의 양구 혈에 침을 놓으면 많이 걷는 궁녀들의 고민인 일명 무 다리! 알이 배긴 종아리를 젓가락같이 얇고 가느다랗게 만들어주죠. 그리고 만약 뱃살이 고민이라면 배꼽 양쪽에 있는 천추 혈에 침을 놓으면 뱃살고민 끝! 게다가 엄지와 검지 사이 합곡 혈에 침을 맞으면 변비가 해결되고 순환을 촉진시켜 숙변제거에는 최곱니다”

눈치 없는 계금이 듣고 있다가 곁에서 거들었다.

“마마! 옹주마마의 침술이 어찌나 효과가 있는지 어제는 나인들이 옹주마마에게 살 빠지는 침을 맞으려고 줄까지 섰다니까요”  

칭찬을 늘어놓던 계금과 혜신이 숙의 김 씨의 싸늘해진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꾹 다물었다. 혜신옹주에게 침술을 가르친 정 참봉도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마마 송구하옵니다. 소인은 살을 빼는 침을 가르친 적은 없사오나 옹주마마께서 워낙에 영민하셔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지라 순환이 잘되는 혈 자리를 살을 빼는 혈 자리로 응용하신 듯하옵니다. 모든 것이 소인의 잘못이옵니다”

숙의 김 씨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혜신옹주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찌 이것이 자네의 잘못이겠는가? 왕실의 여인이라면 마땅히 배워야 할 것들엔 관심을 두지 않고 침술에만 빠져 있는 저 아이를 잘못 가르친 나의 부덕의 소치가 아니겠는가?”

혜신은 금세 울상이 되었다.

“어마마마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숙의 김 씨의 얼굴이 굳어졌다.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알고 있느냐? 행여 잘못 침을 놓다가 큰 일이라도 나면 그땐 대체 어쩌려고 그러는 것이냐?”

혜신옹주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어마마마”  

숙의 김 씨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라도 내가 너를 제대로 가르쳐야겠다. 앞으로 한 달간 하루도 빠짐없이 내 처소로 수를 놓으러 오너라. 알겠느냐?”

혜신의 눈이 똥그래졌다.

“한 달이나요?”

숙의 김 씨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럼 육 개월을 하겠느냐?”

혜신이 고개를 크게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옵니다 어머니 한 달 한 달이면 족하옵니다”

혜신은 울상이 되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숙의 김 씨는 혜신이 은밀히 침술을 배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행여나 왕실의 눈 밖에 날까 싶어 입소문 나지 않도록 상궁들과 나인들의 입단속을 엄히 해두었다. 그러나 더 이상 소문이 퍼지면 걷잡을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숙의 김 씨는 한 달 동안 혜신에게 매일 자신의 처소에서 함께 수를 놓도록 한 것이 그녀에게는 엄청난 고역인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한동안 그렇게 하다 보면 침술에 대한 관심이 수그러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음 날 혜신옹주는 숙의 김 씨 곁에 앉아 수를 놓고 있었다. 모녀가 다정하게 수를 놓는 모습에 곁에 선 이 상궁과 강 상궁은 시종일관 흐뭇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혜신은 어찌나 좀이 쑤시는지 몰래 기지개도 켜보고 다리도 두드리며 안절부절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자세히 들여다보니 혜신의 것은 삐뚤빼뚤한 것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숙의 김 씨가 수를 놓느라 여념이 없자 지루했던 혜신은 슬며시 침통을 꺼내 들고는 강 상궁을 곁에 끌어다 앉혔다. 그녀는 강 상궁의 발을 이리저리 살피며 혈 자리를 짚었다 혈 자리를 짚는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빛은 수를 놓을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녀는 침통에서 침을 꺼내 들고는 오른손 엄지와 중지로 야무지게 쥐었다. 침을 쥔 그녀의 눈엔 강상궁의 혈 자리가 투시되듯 펼쳐 보이는 것 같았다. 혜신의 손에 들린 침이 눈 깜짝할 사이에 강 상궁의 살갗을 뚫었다.

“으악”

겁에 질린 강 상궁이 손을 빼며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혜신이 그만 침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당황한 혜신은 강상궁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때 수를 놓던 숙의 김 씨가 혜신을 쳐다보았다. 혜신은 침통을 뒤로 얼른 감추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수를 놓으며 마음을 차분하게 하라 했는데 그 새를 못 참는 것이냐?”

혜신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실은 강 상궁이 다리에 쥐가 난다 하여 침을 놓아주려 했던 것입니다. 어제 혈에 침을 놓으면 막힌 혈이 풀리고 또...”

강 상궁은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혜신이 기가 막혔다. 숙의 김 씨가 아무 말 없이 혜신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눈치 빠른 혜신이 얼른 납작 엎드렸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소녀 잘못했습니다!”       

숙의 김 씨가 입을 열었다.

“혜신아 지금은 네가 무슨 일을 해도 이 어미가 가려줄 수 있지만 이 어미가 없을 땐 궐에서 너를 가려줄 사람이 없어. 여인이 그것도 의관들이 쓰는 침을 놓는다고 하면 아바마마께서 잘했다 할 것 같으냐?”

그때 혜신이 고쳐 앉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어머니! 수를 놓는 바늘은 허락하시면서 침은 왜 잡으면 안 된다고 하십니까? 바늘과 침은 그 생김새나 모양이 거의 같습니다. 어머니께서 잡은 바늘은 그저 수를 놓을 뿐이지만 제가 잡은 침은 사람의 귀한 생명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사람의 목숨보다 더 중한 일이 또 있습니까?”

가만히 혜신을 바라보고 있던 숙의 김 씨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어미가 왜 그것을 모르겠느냐? 하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아. 나는 네가 침술을 배우는 것까지 반대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네가 의관으로 살고자 한다면 그건 허락해 줄 수가 없구나. 천지가 개벽해 남녀가 유별한 세상이 아니라면 모를까 이 나라 조선에선 왕실의 여인이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단다. 침술은 의녀나 의관들이 하는 일이야. 왕실의 여인인 네가 침술을 한다면 대소신료들이 가만히 있겠느냐?”

그때 갑자기 혜신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대소신료들이 무서워 저는 평생 방 안에 틀어박혀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저는 싫습니다. 왜 제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 안 된단 말입니까?”   

강 상궁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혜신옹주가 숙의 김 씨에게 들이댈 때마다 혜신의 보모인 강 상궁은 마치 그것이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몸 둘 바를 몰랐다. 하지만 혜신의 눈물을 보며 그녀 역시 안타까움에 북 바쳐 어느새 훌쩍이고 있었다.

사실 숙의 김 씨는 혜신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라고 왜 하나밖에 없는 딸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하지만 조선에서 그것도 규율이 지엄한 왕실에서 살아남으려면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숙명이다. 성균관 사성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대신들의 잘못된 관행을 주상전하에게 상소했다가 대신들의 음해로 역모에 휘말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그 후로 그녀의 아비는 모진 고문을 받고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목숨을 잃었다. 김 씨는 그녀의 어머니와 관노로 일하다가 우연히 제조상궁의 눈에 띄어 궁녀로 궐에 들어왔다. 숙의 김 씨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난했던 그간의 삶이 그녀의 머릿속에 흘러갔다. 그녀는 혜신옹주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혜신을 낳은 후부터 병을 달고 살았던 그녀는 한 해가 다르게 몸이 쇠약해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저녁 무렵 강상궁을 따로 부른 숙의 김 씨는 곁에 두었던 보자기를 내밀었다. 강 상궁이 보자기를 풀어보니 그 속엔 고이 접어놓은 여러 장의 무명천이 있었고 천에는 홍매화가 곱게 수놓아져 있었다. 강 상궁이 의아해하며 숙의 김 씨를 쳐다보자 숙의 김 씨가 입을 열었다.

“혜신이가 달거리를 시작하게 되면 자네가 챙겨주게”

“하오나 마마! 이건 마마께서 직접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몸이 하루가 다르다는 게 느껴져. 앞으로 얼마나 더 살게 될지 모르겠다네. 혜신이가 당황하지 않도록 부디 자네가 잘 도와주게”

“마마”

강 상궁은 차오르는 눈물을 삼켰다.

“자네가 우리 혜신이 때문에 정말 고생이 많다는 거 잘 알고 있네”

“마마! 당치 않으십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숙의 김 씨가 강 상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내가 자네를 혜신이 곁에 있게 해 달라 청을 올리지만 않았어도 자네도 지금쯤은 편히 지내고 있었을 텐데... 자네에겐 두고두고 미안하네”

강 상궁은 목이 메었다.

“마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소인 이젠 대단히 즐거울 일도, 새로울 것도 없는 나이지요. 그런데 요즘 몸은 힘들어도 혜신아기씨 덕분에 매일 웃으며 살고 있습니다. 모두 마마님 덕분이지요”

강 상궁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마마! 저는 보모상궁으로 30년을 살았습니다. 늘 어린 아기씨들만 키웠죠. 그런데 혜신아기씨가 꼬물거리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것 또한 제겐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은 거두시옵소서! 그리고 마마! 그보다 먼저 심기를 굳건히 하시옵소서! 혜신 아기씨가 혼례를 올리는 것도 지켜보시고 손주도 안아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숙의 김 씨가 쓸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도 그리하고 싶네만 인명은 재천이라 하지 않는가?”

숙의 김 씨 처소를 나서는 강 상궁은 연신 눈물을 훔쳤다. 이대로는 도저히 혜신의 처소로 갈 수가 없었다. 한적한 뜰에 앉은 강 상궁은 숙의 김 씨가 그녀에게 전해준 보자기를 가만히 쓸어보았다. 이걸 한 땀 한 땀 수놓으면서 얼마나 눈물을 지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혜신옹주는 그녀에게도 특별한 아이였다. 혜신이 태어났을 때부터 키우기 시작해 10년이 훌쩍 지났으니 온갖 정이 듬뿍 들었다. 그런데 숙의마마께서 요즘 부쩍 저리 심약한 소리를 자주 하시니 마음이 여간 심란한 것이 아니었다.  

숙의 김 씨는 다른 후궁들과 달리 아랫사람들에게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특히 강 상궁에겐 더욱 각별했다. 유난스러운 자신의 딸을 돌보는 보모상궁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숙의 김 씨의 성품이 워낙 섬세하고 따뜻해 아무리 아랫사람이어도 어려움은 없는지 살폈다.  

일찍 부모를 여읜 강 상궁은 여섯 살 어린 나이에 생 각시로 궐에 들어왔다. 고단한 궐 생활에 너무 배가 고파 소주방에서 음식을 몰래 훔쳐 먹다가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기도 했다. 모진 세월을 견디며 살아왔지만 그녀는 혜신의 보모상궁으로 사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꼈다.

혜신옹주는 그녀에게도 매우 특별했다. 어릴 때부터 밤잠 없이 울어대 밤새도록 안고 돌아다니기를 수도 없이 했다. 사실 숙의 김 씨가 강상궁을 혜신의 처소상궁으로 청을 올릴 때는 속으로 잘되었다 싶었다. 혜신옹주가 어려서부터 까탈스럽긴 했어도 이젠 훌쩍 컸고 그녀도 이젠 나이가 많아 어린 아기를 키우는 일은 무척 벅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혜신의 처소에 들어온 날부터 그녀는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호기심 많은 혜신옹주는 잠시도 방안에 붙어있는 날이 없었다. 그녀를 쫓아다니느라 강 상궁의 궁혜는 늘 닳아서 구멍 나 있었다.


그녀는 지금도 혜신옹주가 숭문당에 뛰어들던 날을 생각하면 식은땀이 흐른다.

그날도 혜신옹주는 다도를 배우는 시간이 지루해 몰래 영춘헌을 빠져나갔다.

혜신은 글공부하는 것은 좋아했지만 다도를 배우고 수를 놓는 것은 질색했다.

혜신이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까 궁리를 해대는 바람에 그녀는 매번 잔뜩 긴장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날도 몰래 도망치는 혜신을 붙잡으려고 버선발로 뛰었다. 저만치 달아다는 혜신을 잡으려고 뛰던 강상궁은 더 이상 뛸 수 없는지 멈춰서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아이고! 어린 아기씨가 뜀박질을 어찌 이리 잘하시는 겁니까? 헉헉”

그때 혜신이 멈춰 선 강 상궁을 휙 돌아보더니 치맛자락을 야무지게 움켜쥐고는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멀리 달아나는 혜신을 보자 숨을 고르던 강 상궁이 당황했다.

“아기씨! 아기씨!”

혜신이 뛰어가다가 힘겹게 쫓아오는 강 씨를 한번 뒤돌아보고는 장난기 많은 얼굴로 씩 웃더니 다시 달렸다. 혜신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렸다. 뒤따라오던 강 상궁은 혜신이 명정 문을 지나 숭문당 뒷문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기겁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혜신은 기어코 숭문당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녀는 다급하게 혜신을 불렀다.

“아기씨!”

숭문당 안에선 당상관과 시강관들이 왕과 함께 경연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지자 왕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신하들도 왕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눈치채고 술렁이기 시작했다. 왕은 거슬린다는 듯 고개를 들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신나게 뛰어 들어가던 혜신은 문을 확 열어젖히고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기겁했다. 혜신은 당상관과 시강관들이 도열해 앉아있는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온몸이 굳어버렸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녀는 저 멀리 앉아 있는 아바마마를 보고는 겸연쩍게 배시시 웃었다.

“아바마마”

좌의정 김자운은 고개를 돌리고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그를 포함한 공신들은 최근 왕이 공포하는 정책마다 모두 삼사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에 불만이 있었던 터라 이번 경연에서 삼사의 부정부패를 낱낱이 고발하려 마음먹었다. 마침 그가 침을 튀기며 열심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던 중이었는데 혜신옹주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갑자기 말이 끊기자 불편한 심기를 역력히 드러냈다.  

때마침 헐레벌떡 혜신을 뒤따라 들어온 강 상궁은 왕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데 그녀의 동공이 흔들리고 이마에선 식은땀이 삐질거렸다.   

왕의 곁에 서 있던 상선이 강 상궁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살짝 고개를 들던 강 상궁은 상선의 눈빛에 움찔하며 황급히 고개를 푹 숙이고는 죽었다 싶어 빠져나갈 궁리를 해보지만 긴장한 탓에 머릿속은 하얗기만 하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곁에 선 혜신의 치맛자락엔 흙이 묻어 엉망인 것이 눈에 띄었다. 강 상궁이 눈치껏 툭툭 털어내곤 매만져주는데 손놀림이 어찌나 빠른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그때 왕이 혜신을 보고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이게 누구냐? 우리 어여쁜 혜신 옹주가 아니냐?”

혜신은 싸늘한 분위기를 무마하려는 듯 더 해맑게 웃으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예! 아바마마”

혜신옹주를 바라보는 왕의 눈에선 꿀이 뚝뚝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왕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혜신아! 이리 오너라”     

당상관들과 시강관들의 눈이 혜신에게로 쏠렸다. 옹주로 인해 경연이 중단된 것이 내심 못마땅한 표정들이었다. 혜신은 대신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한 몸에 받는 것을 의식이라도 한 듯 쭈뼛거리며 걸어 들어갔다. 왕의 곁에 앉은 혜신은 자신을 쏘아보는 눈초리들에 눈을 둘 곳이 없어 아바마마의 책상에만 시선을 두었다. 그때 왕이 혜신에게 책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얼핏 보이는 책의 겉면엔 대학이라 쓰여 있었다.

“이 책을 아느냐?”

당황한 혜신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예? 예 그러하옵니다”

신하들은 흠칫 놀랐다. 어린 옹주가 감히 읽었을 법한 책이 아니기에 의심스러운 표정이었다. 왕은 펼쳐진 부분을 손으로 짚으며 물었다.

“읽어 볼 수 있겠느냐?”

혜신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소위치국 필선제기가자(所謂治國 必先齊其家者)는 기가불가교(其家不可敎) 요 이능교인자무지(而能敎人者 無之)라”

신하들 사이에선 탄성이 흘러나왔다. 왕은 뿌듯한 표정으로 대신들을 한번 둘러보고는 혜신에게 다정하게 물었다.

“뜻도 아느냐?”

혜신은 잔뜩 긴장한 나머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반드시 먼저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해야 함은 집안을 가르치지 못하면서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라는 뜻이 옵니다”

왕은 호탕하게 웃었다.

“어허 허허! 경들도 들었소? 이 아이가 이렇게 영특합니다. 하하하!”

신하들은 내심 놀라면서도 한낱 옹주가 어떻게 이런 학문을 익혔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그들은 영특한 옹주를 진심으로 칭찬할 만한 여유가 별로 없어 보였다. 그들의 머릿속은 이 일을 앞으로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할지 계산하느라 바빴다. 그들은 마지못해 왕을 따라 웃기 시작했다.

밖에 서 있던 강 상궁은 위기를 모면했다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상선을 힐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상선은 심기가 편치 않아 보였다. 그는 좌의정 김자운의 굳은 표정에 더 마음이 쓰였다. 그때 일어서던 혜신 옹주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혜신은 그의 얼굴을 보더니 활짝 웃어 보였다. 상선은 해맑은 혜신의 얼굴을 보고는 표정 관리가 안 되는지 고개를 돌려 헛기침만 해댔다.

그때 일을 떠올리던 강 상궁이 피식 웃었다. 강 상궁의 다른 동무들은 강 상궁이 혜신옹주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느라 늘그막에 고생길이 열렸다면서 그녀를 측은히 여겼다. 하지만 강 상궁은 혜신옹주가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그녀 역시 때로는 혜신옹주를 모시는 것이 너무 힘들어 싫은 소리도 해대고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표독스러운 웃전을 모시는 것보단 백 배 천 배 낫다 생각했다.

2.

늦은 오후 공신옹주 처소 앞엔 고운 비단 꽃신 두 켤레가 나란히 놓여 있다.

방안엔 명나라에서 들여와 조선에선 보기 드문 문갑과 병풍 그리고 온갖 진귀한 세간들이 눈에 띄었다. 경대 위엔 각종 패물들로 어지럽혀져 있다. 한껏 치장한 숙의 엄 씨 딸인 공신옹주는 한눈에 봐도 사치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숙의 정 씨 딸인 정혜옹주와 함께 명나라에서 갓 들여온 청화백자분합과 노리개며 가락지 같은 패물들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정혜옹주가 청화백자 분합을 들고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했다.

“이게 이번에 명나라에서 온 사신단과 함께 들어온 따끈따끈한 신상이랍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공신옹주는 영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한땐 이 청화백자분합에 꽂혔답니다. 한데 외명부 여인들 사이에서 너도나도 찾는다고 하니 이젠 너무 흔해져서 좀 질리네요. 조선에 단 하나뿐인 거라면 또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장신구뿐 아니라 공신이 걸친 옷도 범상치 않은 것이 조선에선 찾기 힘든 명나라에서 온 비단으로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들이 지니지 않은 것만 소장하고 싶어 하는 희귀 아이템 마니아다. 정혜옹주는 그런 공신옹주의 기색을 살피다가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그건 그렇지요 흔하게 봐서 그런가 이젠 저도 좀 질리네요. 호호! 그럼 이번에 노리개도 몇 개 들어왔는데 한번 보시렵니까? 이건 마음에 쏙 드실 것입니다”

공신은 별 기대 없이 정혜가 내놓은 노리개를 쓱 훑어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럼 어디 한번 구경이나 해볼까요?”

정혜옹주가 붉은색 삼작노리개를 들어 보이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건 이번에 명에서 들여온 조선에 하나밖에 없는 노리개랍니다”  

공신이 삼작노리개를 들고 이리저리 살피더니 눈빛이 달라졌다.

“어머나! 이 오묘한 빛깔 좀 봐 어쩜 이리 곱답니까? 실을 꼬아 만든 모양새며 옥에 새겨진 무늬가 이전엔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정혜는 이제야 안심이라는 듯 표정이 밝아지며 목소리가 높아졌다.

“호호호 제가 뭐라 했습니까? 마음에 꼭 드실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공신옹주는 삼작노리개를 달고는 이리저리 보며 흐뭇하게 말했다.

“어때요? 잘 어울립니까?”  

정혜옹주가 감탄하며 말했다.

“가뜩이나 어여쁘신데 삼작노리개까지 더하니 더욱 세련되어 보이십니다. 그 아이랑은 비교 불가예요 호호”  

공신옹주는 정혜옹주가 혜신을 거론하는 것 때문에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자신이 혜신을 늘 의식하고 있는 속내를 정혜옹주에게 들킨 것만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혜신의 집안은 성균관 사성 가문이었다고는 하나 역모에 휘말려 몰락했다. 혜신 옹주가 그렇게 망한 가문 그것도 노비로 전락했던 어머니의 딸이란 사실은 왕실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바마마가 유독 천한 노비 출신의 딸인 혜신이만 예뻐하는 것이 큰 불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에게는 그렇게 특별한 눈길로 바라봐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던 아바마마가 혜신을 보며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눈빛을 목격하고 말았다. 그날 밤 그녀는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이기지 못해 어머니의 치마폭에서 엉엉 울었다. 그 후로 공신은 더욱 화려하게 치장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아바마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었다. 이렇게 귀한 장식품으로 치장하면 더욱 돋보이겠다고 생각하니 잠시 불편했던 심기가 누그러졌다.

 

사실 정혜옹주는 공신옹주를 그 아이와 비교하는 것이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항상 공신옹주의 눈치를 살폈다. 어머니인 숙의 정 씨는 정혜옹주에게 늘 신신당부했다. 공신의 비위를 적당히 잘 맞추라고... 그래야 궐에서 무탈하게 살 수 있다고 말이다. 그녀는 어머니의 말에 처음엔 저항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머니의 말이 아예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번듯하게 내세울 가문이 없는 우리 집안이 궐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누군가의 그늘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인 숙의 정 씨 역시 숙의 엄 씨에게 잘 보이려 무던히도 애썼다. 그녀는 같은 궁녀였지만 종 3품 절도사 윤지광의 수양딸이 된 숙의 엄 씨가 내심 부러웠다. 숙의 엄 씨는 수양딸이 된 후론 콧대가 하늘을 찔렀다. 또한 대왕대비 역시 엄 씨를 유독 특별하게 여기는 것 같아 숙의 정 씨는 점점 불안했다. 그녀 역시 잘난척하는 숙의 엄 씨가 못마땅했지만, 숙의 엄 씨와 가까이 지내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정혜옹주 역시 치장하기 좋아하고 뽐내는 성품은 공신 옹주와 죽이 잘 맞았다.

삼작노리개는 다행히 공신의 마음을 완전히 녹였다.

공신은 흐뭇한 표정으로 정혜 옹주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어쩜! 이리도 제 마음을 족집게같이 잘 아십니까? 호호호”

둘은 서로 마주 보며 깔깔깔 웃었다.

공신 옹주와 정혜 옹주가 사이좋게 처소를 나섰다. 때마침 숙의 엄 씨와 숙의 정 씨도 함께 영춘헌 뜰로 들어섰다. 그때 혜신 옹주가 두 손에 개구리 한 마리를 고이 들고 뛰어왔다. 팔을 걷어붙인 혜신의 손에 들린 것을 유심히 보던 숙의 엄 씨가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으악! 대체 저 저게 뭐 뭡니까?”

혜신은 그런 숙의 엄 씨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숙의 엄 씨가 깜짝 놀라며 뒤로 넘어질 뻔하는 것을 곁에 있던 숙의 정 씨가 황급히 붙들었다. 정혜 옹주 역시 혜신의 손에 든 개구리를 보자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소리 질렀다.

“아악! 이건 개구리 아닙니까?”

공신옹주는 이마에 손을 대고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어휴! 저러고 다니는 걸 아바마마께서 보셔야 할 텐데... 다소곳함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천방지축인데 아바마마 앞에서만 귀여운 척 하니 아바마마께서 깜빡 속으시는 게지요!”

정혜 옹주는 혜신을 경멸하는 눈초리로 흘깃 보며 말했다.

“우리와는 근본부터 다르지 않습니까? 그 천한 피가 어디 가겠습니까?”

하지만 혜신은 개구리에 집중하느라 숙의들과 옹주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녀는 때마침 처소 밖으로 나오던 숙의 김 씨를 발견하고는 “어머니”하고 부르며 달려갔다. 안색이 좋지 않은 숙의 김 씨는 힘없이 처소를 나서다가 혜신을 발견하자 활짝 웃어 보였다.

혜신 옹주는 어머니에게 두 손 안의 개구리를 조심스럽게 보여주며 말했다.

“어머니! 이것 좀 보셔요! 제가 연지를 지나가다 이 개구리를 발견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가까이 다가가는데도 도망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아니겠어요? 아무래도 어딘가 아픈 것 같아 이렇게 데리고 왔어요”

숙의 김 씨는 혜신이 두 손에  든 개구리를 보았다. 작은 청개구리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 역시 개구리는 몹시 징그러웠지만 의연하게 말했다.

“우리 혜신이가 가여운 개구리를 지나치지 않았구나. 하지만 아픈 개구리를 어찌할 수 있겠느냐?”

혜신은 씩씩하게 자기 생각을 말했다.

“어머니! 제가 어떻게든 개구리를 고쳐주고 싶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숙의들과 옹주들은 기함했다. 숙의 엄 씨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대체 김숙의는 어떻게 아이를 가르치면 조선의 옹주가 개구리 따위를 들고 궐 안을 휘젓고 돌아다닙니까? 왕실의 여인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예절과 법도는 가르치지 않고 이렇게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것을 그냥 가만두고 본단 말입니까?”

그때 숙의 정 씨가 김 숙의를 흘깃 보며 말했다.

“마마님 고정하시옵소서 본디 배운 것이 없는 천출이 아니 옵니까?”

숙의 엄 씨는 혜신을 보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당장 그 더러운 개구리를 내다 버리지 못하겠느냐?”

혜신은 숙의 엄 씨와 정 씨를 노려보았다. 그들이 한낱 미물이라는 이유로 개구리를 멸시하듯 말하는 태도에 분노했다. 작은 생명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한 맹자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지만 그래봤자 더 큰 싸움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몇 번 경험했기에 꾹 누를 수밖에 없었다.

긴장감이 흐르던 그때 가만히 듣기만 하던 숙의 김 씨는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고 미소 지으며 숙의 엄 씨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마마님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지요. 아직은 철없는 어린아이가 아닙니까? 혜신이가 워낙 호기심이 많아 작은 미물도 그저 지나치질 못하는 고운 심성을 가진 아이지요. 마마님의 넓으신 아량으로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지만 숙의 엄 씨의 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개구리 따위를 궐 안에 들여오다니 해괴망측하게 이게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한낱 미물이라고는 하나 이것이 궐에 큰 화를 미치게 될지 어찌 안단 말입니까? 아무리 천출이라지만 어찌 이리 근본 없는 망나니처럼 날뛰는지 원!”

혜신은 개구리를 쥔 두 손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숙의 김 씨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마마! 이 작은 개구리가 뭐라고 궐에 화를 부르겠사옵니까? 사실 개구리는 마마님들 머리에도 한 마리씩 올라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 숙의 엄 씨와 숙의 정 씨가 머리 위에 정말 개구리가 올라가 있는 줄 알고 “으아악”소리 지르며 허둥댔다. 하지만 이내 숙의 김 씨에게 깜빡 속았다 여긴 숙의 엄 씨는 분을 참지 못하고 숙의 김 씨의 멱살을 잡았다.

“감히 네까짓 것이 나를 능멸하려 들어? 네 년이 주상전하의 총애를 받는다고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것이냐?”

순간 숙의 김 씨가 휘청했다. 하지만 그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혜신은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그만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상궁들과 숙의 정 씨가 엄 씨를 가까스로 뜯어말렸다. 숙의 김 씨는 흐트러진 옷의 매무새를 가다듬고는 엄 씨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마마님! 마마님의 머리 위에 얹은 고운 첩지에 장식된 동물이 옥으로 만든 개구리가 아닙니까? 비록 살아있는 생물은 아니 오나 첩지는 매일 머리 위에 곱게 얹으시면서 혜신옹주가 아픈 개구리를 지나치지 못하고 가엾게 여기는 귀한 마음은 어찌 그리 노여워하신단 말입니까?”

숙의 엄 씨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숙의 김 씨의 말에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 주먹을 꽉 쥐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3.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무렵 종침교에 가까이 오자 숙의 김 씨가 걸음을 멈췄다. 그 곁에 나란히 걷고 있던 혜신은 사실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종침교는 궐 밖 나들이를 좋아하는 혜신이 어머니와 자주 들르던 곳이라 혜신에게는 각별한 곳이었지만 오늘은 다르다. 아까 낮의 일로 어머니의 심기가 불편하겠다고 생각한 혜신은 종침교로 오는 내내 어머니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약한 어머니가 자신 때문에 멱살까지 잡혔으니 혜신은 아까 왜 하필 그때 개구리를 들고 왔을까 내내 후회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걷기만 하던 숙의 김 씨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혜신아”

그런데 의외로 따뜻한 숙의 김 씨의 목소리에 혜신은 깜짝 놀랐다. 엄하게 가르칠 때는 매를 드는 것도 서슴지 않던 숙의 김 씨였기 때문에 혜신은 아까 낮에 있었던 일로 단단히 꾸중을 들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어머니의 따뜻한 목소리에 그동안 긴장했던 마음이 녹아내렸다.

“네 어머니”

숙의 김 씨가 혜신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까는 많이 놀라지 않았느냐?”

혜신은 어머니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죄송해요. 어머니 아까는 괜히 저 때문에...”

김 씨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혜신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말했다.

“어미는 네가 한낱 미물인 작은 생명도 지나치지 않고 귀히 여기는 마음이 참 예쁘다”

어머니에게 단단히 혼날 준비를 하고 있던 혜신은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머니!”

숙의 김 씨는 가만히 혜신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혜신아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이 어미도 좋단다”

혜신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머니! 전 침술이 너무 재미있어요. 열심히 배워서 저도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숙의 김 씨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혜신아, 침술이 그리 재미있느냐?”

혜신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네! 머리카락같이 얇고 가느다란 침이 사람의 몸에 들어갔다가 나왔을 뿐인데 아픈 곳이 낫고 통증이 가라앉는 것이 너무 신기합니다. 어머니! 제가 어머니도 놓아드릴까요? 어머니께서 자주 허리가 아프다고 하시질 않습니까?”

순간 숙의 김 씨의 이마에서 땀이 삐질거렸지만 애써 괜찮은 척 웃으며 말했다.

“아 아니다 되었다. 나는 괜찮다”

혜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어머니! 혹시 제게 침을 맞는 것이 걱정되십니까?”

숙의 김 씨가 손 사레를 치며 말했다.

“그 그럴 리가 있느냐? 아니다 나는 허리가 다 나았다 이제 괜찮다”

그녀는 한참 동안  혜신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혜신아! 네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으면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단다. 반드시 이 궐에서 살아남아야 한단다. 그래야 네가 정말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어”

혜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머니의 어깨에 기대어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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