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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물 Oct 23. 2024

5. 불입호혈부득호자(不入虎穴不得虎子)

과감하게 수련도감에 나타난 혜신옹주! 그런데 이게 웬 악연이람? 변복을 했지만 언국은 그녀를 한눈에 알아본다. 그뿐인가? 자강 역시 그녀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혜신은 온갖 구박에도 굴하지 않고 험한 수련을 꿋꿋하게 이겨내는데...

1.

날이 저물어 어둑어둑해진 저녁 무렵

종침교 밑으로 허름한 차림새의 사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종침교의 낮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어스름해지면 다리 밑으로 부랑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아까서부터 기웃거리는 언국을 발견한 똘만이가 손짓을 하며 불렀다.

“어이! 거기 너! 일루 와 봐! 어디서 많이 본 녀석인데?”

그때 곁에 있던 짱대가 언국을 알아보고는 말했다.

“어? 저 녀석 그때 왕초형님 멍석 훔쳐간 놈 아니야?”

그때 술이 거나하게 취한 왕초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매운맛을 덜 봤군. 여길 다시 기어들어오는 걸 보니. 배짱 하난 두둑한 놈일세!”

맹랑한 놈이라며 똘만이가 냉큼 달려가 언국의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그런데 그때

“어어!”“형님! 형님!”

거구의 왕초가 눈앞에서 지푸라기처럼 쓰러지자 깜짝 놀란 똘만이가 갑자기 손을 놓는 바람에 언국은 그만 고꾸라지고 말았다.

“어어! 형님! 왜 그러는 거요? 형님!”

주변에 있던 사내들이 당황하여 왕초를 흔들어 깨워보았지만 쓰러진 왕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언국이 일어나 보니 사람들이 왕초주위로 모여들었다.  짱대는 쓰러진 왕초를 붙들고 소리 질렀다.

“형님! 눈 좀 떠보쇼!

형님! 아유 이걸 어째! 누가 가서 냉큼 의원이라도 데리고 와 얼른! 여기 사람 죽는다! 사람 죽어!”


언국이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보니 왕초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언국은 쓰러진 왕초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왕초를 살피는 언국의 눈빛이 매우 날카로웠다. 재빨리 왕초의 호흡과 맥을 확인한 그가 물었다.

“원래 지병이 있었습니까?”모여선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곁에 있던 똘만이가 사납게 눈을 치켜뜨며 언국을 거칠게 밀쳤다.

“네깟 놈이 뭘 알기나 하고 지껄이는 거야?”넘어진 언국이 굳은 표정으로 똘만이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럼 지금 여기서 이 자를 치료할 사람이 있소?”

“뭐? 아니 그런데 이 자식이! 그럼 네 놈이 뭐 의원이라도 된단 말이냐? 이런 맹랑한 놈 누굴 속이려고 들어?”

똘만이가 험악한 얼굴로 언국의 멱살을 잡고 위협했다. 하지만 이번엔 언국도 지지 않고 버럭 소리 질렀다.


“지금 당장 의원을 이 앞에 데려올 수 있냐 말이오? 당장 손을 쓰지 않으면 이 자는 죽을 수도 있소!”죽을 수도 있다는 언국의 말에 똘만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똘만이는 왕초를 흔들며 울부짖었다. “형님! 형님! 이렇게 가면 억울해서 안 돼요! 형님! 형님! 눈 좀 뜨쇼 형님!”그때 갑자기 짱대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언국의 팔을 붙들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우리 형님 살릴 수 있겠는가? 그럼 자네가 살려주게! 도성에 우리들 말을 듣고 달려올 의원도 없고 의원을 데리러 간다 쳐도 그 사이에 우리 형님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는가? 제발 우리 형님 좀 살려주게. 내가 이렇게 간곡하게 부탁하네. 제발 좀 우리 형님 살려주게! 제발”

짱대의 말에 눈시울이 붉어진 똘만이가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더니 못마땅한 표정은 로 말을 내뱉었다.

“그럼 한번 해보든가! 하지만 만에 하나 우리 형님 잘못되기라도 하면 네 놈의 명줄은 내 손으로 끊을 것이니 명심하게!”

언국은 똘만이를 한번 쏘아보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원래 앓고 있던 병이 있었습니까?”그러자 짱대가 대답했다.

“우리 형님 엄청 건강했는데? 안 그래?”

“아 그럼! 만날 우리가 골골대지 형님은 말술을 먹어도 끄떡없었잖아”그때 똘만이가 대답했다.

“근데 좀 전에 형님이 술 마시고 와서는 이마를 짚으면서 어지럽다고 그러더라고”

사람들의 말을 들은 언국은 다시 왕초의 맥을 짚고는 팔다리를 만져보니 몸에 열이 있는 것처럼 따뜻하고 그의 입가에는 침이 고여 있었다. 언국은 신중하게 진찰하던 언국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병자가 갑자기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몸이 더워지고 침을 흘리는 것을 보니 이것은 분명 중풍이다’

언국이 입을 열었다.

“풍입니다”

“뭐? 풍?”

놀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언국은 엄지손가락으로 왕초의 인중을 세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주섬주섬 품을 뒤지던 언국이 뭔가 생각난 듯 한숨을 내쉬었다.‘아참! 침통이 그 아이한테 있지’

당황한  언국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혹시 침통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을까요?”둘러선 사람들은 “침통? 침통이 뭐여?”하며 웅성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 백성들 그것도 노숙을 하는 이들이 의원들이나 지니고 있을 침통을 가지고 다닐 리가 만무했다. 언국은 고민에 빠졌다. 중풍은 치료시기가 매우 중요하다. 빨리 치료하면 할수록 병자의 예후가 좋아지기 때문이었다. 왕초에게 침을 놓아 막힌 혈을 풀지 않으면 의식이 돌아오는 것은 물론 온몸이 마비될 수도 있기에 한시가 급했다. 하지만 어디서 침통을 구해 침을 놓는단 말인가? 언국이 한숨을 내쉬던 그때 짱대 가 주저하더니 품에서 뭔가를 꺼내 언국에게 내밀었다. “혹시 이게 자네가 찾는 건가?”언국이 보니 짱대가 내민 건 가죽으로 만든 침통이었다. 그가 침통을 열어보니 여 러 가지 침이 들어있었다. 이런 것은 평범한 의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내의원 어의나 지닐 법한 귀한 침통이었다.


언국이 깜짝 놀라 짱대를 쳐다보니 그가 멋쩍은 표정으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 이게 그러니까 아까 낮에 여기 지나가던 사람이 말에서 떨어졌는데 그때 이걸 떨어뜨리고 갔지 뭔가? 혹시나 팔아먹을 수 있겠다 싶어서 내가 슬쩍했는데 펼 쳐보니 침만 잔뜩 들어 있잖아. 그래서 내다 버리려고 했던 건데...”짱대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때 언국의 얼굴이 환해지며 소리쳤다. “이거면 됐습니다!”언국은 왕초 곁에 있던 술병을 열어 술을 호침에 한번 붓고는 백회(百會) 혈과 합곡 (合谷) 혈에 세 푼 깊이로 정확하게 침을 놓았다. 언국이 못 미더워 예의주시하던 똘만이는 그가 왕초에게 능숙하고 노련한 솜씨로 침을 놓는 모습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침을 놓는 언국의 이마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짱대도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똘만이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어 이 사기꾼 같은 놈!”


성난 똘만이가 언국의 멱살을 움켜 잡으려는 그때 짱대가 호들갑을 떨며 소리 질렀 다.

“어? 어! 형님이 눈 떴다! 눈 떴어!”

똘만이와 언국이 왕초를 보니 왕초가 눈을 뜨더니 한번 깜빡였다.

그때 똘만이가 왕초를 붙들고는 울부짖었다.

“아이고 형님! 살아났소? 정신이 좀 드시오?”

언국은 침착한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행히 의식은 돌아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 치료가 더 필요합니다. 복룡간1)과 우황이 필요한데... 지금 그걸 구하긴 어려우니 참기름이나 생강이라도 좀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짱대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참기름이랑 생강? 그까짓 것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져 올테니께 조금만 기다리쇼!”

언국은 정신을 차린 왕초에게 짱대가 구해온 참기름과 생강을 짓찧어 낸 즙을 먹였다. 그는 밤을 새워가며 왕초를 보살폈다.

며칠이 지나자 왕초는 말이 조금 어눌해지긴 했지만  걸을 수 있을 만큼 병세가 좋아졌다. 언국이 왕초에게 올려놓은 뜸을 하나 둘 내려놓자 왕초가 입을 열었다.


“고맙네! 이 은혠 내 절대 잊지 않겠네”

“내가 자네에게 뭘 주면 좋겠는가?”

그때 왕초 곁에 딱 붙어있던 짱대가 나서더니 촐싹대며 말했다.

“이보게! 뭐든 말해보게. 이 형님이 이래 봬도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아는가? 왕년에 조선에서 제일가는 착호갑사였다네. 그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 지 몇 년 전에도 함경도에 사는 양반이 호랑이를 잡아달라고 사정사정을 했다네”

“예? 정말입니까? 그런데 왜 여기서?”

“형님이 워낙 술과 노름을 좋아해서 근무 중에 술 퍼먹다가 걸려서 쫓겨났지 뭔가?”

그때 왕초의 얼굴이 갑자기 붉그락푸르락했다.

짱대는 아차 싶은지 자신의 주둥이를 손으로 연신 때렸다.

“아니 아니! 그 그게 아니고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우리 형님 같은 인재를 놓친 거지 암만!”

“인재는 무슨”

왕초가 손사래를 쳤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나이가 들어 머리가 희끗희끗하지만 부리부리한 눈에 어깨가 딱 벌어진 것이 매우 용맹해 보였다.

짱대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연신 자랑을 해댔다.

“형님도 참! 제 말이 틀렸습니까? 몇 해 전엔 인왕산에 그 뭐시긴가 아 맞다! 수련 도감에서 나온 분이 약에 쓰려고 한다고 호랑이를 잡아 달라 부탁하지 않았습니 까?”

수련도감이란 말에 언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엔 그저 종침교 밑에서 노숙하며 사는 부랑자정도로 여겼었는데 사정을 듣고 나니 순간 그가 달리 보였다.


2.


한편 언국이 왕초를 고쳤다는 소문이 종침교에 퍼지자 처음엔 언국을 깔보고 무시하던 사람들조차 그를 극진히 모시기 시작했다.

짱대는 그에게 제일 좋은 멍석을 깔아주고 끼니마다 먹을 것을 챙겨주었다. 하지만 언국은 더 이상 여기서 머무를 수는 없었다. 어느 날 언국은 왕초에게 이제 그만 가보겠다고 인사를 하며 종침교를 나섰다. 왕초는 꼭 다시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먹을 것과 옷가지를 싸주었다. 인왕산으로 발걸음을 옮긴 언국은 수련도감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증표로 내밀 침통이 없이는 들어갈 방도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젠 정말 뒤로 물러설 곳이 없다. 이번엔 어떻게 해서든 들어가서 자강선생을 만나야만 한다. 수련도감 앞에 선 언국은 힘차게 문을 두드렸다.

쾅! 쾅! 쾅!


노비 하나가 문을 빼꼼히 열어 언국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또 너니? 참! 끈질기다 너두”

그런데 갑자기 노비가 문을 활짝 열고는 허리를 90도로 굽혀 절을 하는 게 아닌가? 언국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그에게 맞절을 하듯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등 뒤가 서늘하게 느껴진 언국이 뒤를  돌아보니 글쎄  스승님이 서 있는 것이 아닌 가?

언국은 황급히 큰 절을 올렸다.

스승님의 곁에 있던 대벽과 수명이 팔짱을 끼고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오지 말라했던 것 같은데?”

“저를 받아주십시오”

“무슨 자격으로?”

“저를 시험해 보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네 놈을 시험해 보라? 허허! 배짱 한번 두둑한 놈이구나. 증표도 내놓지 못하는 한심한 놈을 뭘 시험하란 말이냐?”

스승은 매섭게 쏘아붙이고는 문으로 들어섰다.

그때 언국이 다급하게 스승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스승님! 스승님! 제발 저를 받아주십시오! 증표는 어떻게든 가져오겠습니다!”

대벽과 수명은 스승에게 매달린 언국을 거칠게 밀쳤다.

그때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증표라는 게 뭡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언국이 깜짝 놀랐다. 왕초를 필두로 그의 똘마니들이 일렬로 쫘악 도열해 있는 것이 아닌가?

어림잡아 삼십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왕초와 똘마니들은 하나같이 당당하고 늠름해 보였다. 왕초의 양 옆엔 똘만이와 짱대가 서 있었다. 짱대가 언국에게 눈을 한번 찡긋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자강과 제자들도 무척 놀란 눈치였다.


그때 왕초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증표가 내가 되어도 되겠소?”

자강은 의아한 표정으로 왕초를 보았다.

왕초가 말을 이었다. “내가 저 아이의 증표요!”

왕초가 자기의 왼팔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언국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많이 회복한 그였지만 그의 왼팔을 가슴 위로는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 팔? 팔이 올라가네요?”

언국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자 짱대가 못 참고 소리쳤다.

“다 나았어 다 낫았다고! 네 침 덕분에 형님이 다 나았어!”그 말을 들은 자강과 제자들은 깜짝 놀랐다.


자강은 제자들을 향해 언국을 들이도록 이르고는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대벽은 이제 신참신세 면했다고 좋아라 했지만 수명은 스승의 결정이 매우 못마땅한 눈치였다. 그동안 수련도감에 정식 시험절차를 거치지 않고 들어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언국이 오기 전에도 제자로 받아달라고 하는 사람들로 수련도감은 문전성시였다. 하지만 까다로운 수련도감의 시험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감히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런데 스승님이 이 녀석에게만큼은 왠지 너그럽게 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명은 스승님의 행동에 불만을 품었다. 스승이 대벽과 함께 도림원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히자 수명이 뒤돌아서서 언국을 쏘아보았다.


“네 놈이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네? 무슨 말씀이신지...”

“한때 네 놈의 아비가 스승님의 제자였다고 그걸 믿고 까부는 꼴을 도저히 못 봐주겠다!”

“예? 그 그럼 저분이 저희 아버지의 스승님이셨던 자강선생이 맞단 말입니까?”

수명은 언국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비아냥거렸다.

“난 네 놈이 참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언국은 한 대 맞은 것 마냥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스승님의 행동이 하나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절벽에 떨어져 거의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것도, 밥은 먹고 가라고 챙겨준 것도 모두 스승님이 자강이었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되었다. 언국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잠시 후 대벽과 수명이 언국을 불렀다. 수명이 종이를 언국 앞에 휙 내던졌다. 언국은 종이를 펼쳐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 이게 뭡니까?”

“수련도감 신참례! 여기 들어오려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라고나 할까?”

“못하겠으면 그냥 이 길로 내려가고”

언국은 눈앞이 캄캄했다. 종이엔 인왕산 호랑이의 앞발 관절과 가죽을 가져오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호랑이라니... 대체 호랑이를 어찌 잡는단 말인가?


“앞으로 사흘 말미를 주겠네” 수명이 야비한 웃음을 짓고는 돌아섰다. 그때 대벽이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신참례는 보통 의서 한 권을 외우고 선배들이 낸 문제를 풀면 통과하는 건데 호랑이를 잡아오라는 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그때 수명이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 놈이 어찌할는지 한번 두고 보세!”

언국은 힘없이 인왕산을 내려왔다.

부모님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호랑이를 잡으라니 눈앞이 캄캄했다.


언국이 종침교에 나타나자 사람들이 몰려들며 반겼다. 하지만 그는 이틀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얼굴을 파묻었다. 보다 못한 똘만이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왜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죽을 꼴이야?” 언국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내일까지 호랑이를 잡아야 합니다”

그때 왕초의 눈이 커졌다.

“호랑이?”

“신참례를 통과하려면 호랑이를 잡아와야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호랑이를 어찌 잡아? 그것도 인왕산 호랑이를? 저번에 호랑이가 임금님이 계신 대전 뜰까지 내려와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잖아?”

“맞아! 그때 그 호랑이가 얼마나 사나운지 착호갑사들이 진땀을 뺐다지?”

“하아! 그러니까요. 전 이제 틀렸습니다”

언국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런데 거긴 왜 그렇게 들어가려고 기를 쓰는 거냐?”

“전 아버지를 찾고 있습니다. 저희 아버지의 스승님이 그곳에 계시거든요. 아버지를 만나려면 그곳에 반드시 들어가야만 합니다”

“사정은 딱하네만 호랑이를 무슨 수로...”

그때 짱대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호랑이라면 우리 왕초형님 전문 아닙니까? 왕년에 형님이 착호갑사였잖아요!”

왕초가 짱대에게 눈알을 부라리며 윽박질렀다.

“야 인마! 조용히 안 해?”

“아 왜요? 제가 뭐 틀린 말 했습니까?”

“호랑이 잡던 게 언젠데?”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인 언국이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한 눈빛으로 왕초를 바라봤다. 왕초는 애써 언국의 눈길을 피했다.


“에헤이! 못한다니까”

“제발!!”

왕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손에서 목궁 놓은 지도 오래됐고 이젠 감도 다 잃어버렸어”

언국은 어깨가 축 처졌다.

“쯧쯧”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하나둘씩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3.


다음날 이른 아침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한 언국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가보자는 심정으로 인왕산에 올랐다.

호랑이가 자주 출몰한다는 곳은 인왕산에서도 가장 험한 바위절벽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일전에 언국이 발을 헛디뎌 죽을 뻔한 곳이었기 때문에 그는 발을 내딛을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침 몸을 숨기기 좋은 큰 바위가 보여 그 뒤로 가려고 발을 내딛는 순간 갑자기 발이 훅 빠졌다. “으악”그때 갑자기 어딘가에서 나타난 손이 언국의 팔을 힘껏 움켜잡았다.

“잡았다! 끌어당겨!”

“으쌰 으쌰!”

가까스로 위로 올라온 언국과 사내들이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언국이 일어나 보니 종침교 밑에 있던 왕초와 똘만이 그리고 짱대였다.

언국이 놀라며 입을 열었다.

“여길 어떻게?”

짱대가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며 말했다.

“대체 네 놈은 그 희멀건한 손으로 무슨 호랑이를 잡겠다는 거냐? 잡기는커녕 네 놈이 잡아먹히겠다”


언국은 짱대가 말은 그렇게 툭툭 내뱉어도 정이 많은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왕초도 손을 털며 입을 열었다.

“야 이놈아!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이건 호랑이를 잡으려고 파놓은 함정이야. 그런데 이 길은 호랑이가 다니는 길이 아닌데 왜 여기에 함정을 파놓았는지 모르겠네”

언국이 왕초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며 말했다.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호랑이는 식전엔 안 보여. 어둑어둑해져야 어슬렁거리며 내려오지”

그때 끼어들기 좋아하는 짱대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호랑이 이 놈들 오늘 내손에 다 죽었어!”

옆에 있던 똘만이가 짱대를 한 대 쥐어박으며 말했다.

“으이구! 그놈의 주둥이 좀 닥치지? 아까 호랑이 잡으러 가자고 할 땐 꽁무니 빼던 놈이 누구였더라?”

짱대가 똘만이를 흘겨보았다. 언국은 자신을 도우러 온 형님들이 한없이 고마웠다.


한편 수련도감 안 도림원에선 침술 수업이 끝나자 자강이 물었다. “그 녀석은 왜 안 보이는 것이냐?”그때 대벽이 입을 열었다. “신참례 문제를 푸느라 골몰 중이 온데 오늘 올 것입니다 하온데 스승님! 그 녀석을 정말 생도로 받아주실 것입니까?”

일순간 수련생도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스승이 일어서며 말했다.

“신참례까지 통과하면 생도가 되는 것이 관례가 아니냐?”

그때 수명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제껏 이런 경우가 없었는데 그 녀석에게만큼은 무척 관대하신 것 같습니다”

나가려던 스승이 뒤를 돌며 말했다.


“관대하다? 그럼 네 놈은 부당하다 생각하는 것이냐?”

“저는 정식 시험을 거쳐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녀석은 정식 시험도 치르지 않고 뒷구멍으로 들이시니 이건 좀 불공정하지 않습니까?”

생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흠... 정식 시험을 거쳐서 들어왔다? 무엇이 정식이고 무엇이 뒷구멍이냐? 정식시험도 내가 낸 것이고 뒷구멍문제도 나의 뜻이다. 내가 낸 뒷구멍문제가 실은 정식이었다면 그 녀석은 정식시험을 거친 것이 되고 너희들은 모두 뒷구멍으로 들어온 놈 들이 될 것이다. 더 할 말이 있느냐?”

수명은 기가 막혀 입을 다물었다. 수련도감에 들어와 단 한 번도 일등자리를 놓친 적이 없는 그였다. 하지만 그 녀석을 대하는 스승의 눈빛이 다르다는 것을 본 뒤론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몰려들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진 저녁 무렵  호랑이가 자주 출몰한다는 인왕산 중턱 큰 바위 뒤엔 언국과 왕초일행이 아까서부터 매복하고 있었다.

왕초를 비롯한 모두가 맨주먹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꼴이 호랑이는커녕 멧돼지도 잡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짱대가 지루한 나머지 하품을 하며 말했다.

“대체 호랑이는 언제 나오는 거유? 형님”

곁에 있던 똘만이가 짱대를 쥐어박았다.

“으이구! 조용히 해. 호랑이가 왔다가 도망가겠다” 짱대가 투덜거렸다.

“우이씨! 왜 나한테만 그래?”

그때 갑자기 왕초가 팔을 번쩍 들더니 짱대와 똘만이를 가로막았다.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저 멀리 수풀이 갑자기 흔들렸다. 수풀 사이로 날카롭게 번뜩이는 불빛!

호랑이였다.


잔뜩 긴장한 언국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데 갑자기 주위가 환해지더니 어디선가 횃불을 든 사냥꾼들이 나타났다. 갑자기 활시위를 당기는 소리가 나더니 언국이가 있는 쪽으로 화살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언국은 재빨리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사냥꾼들이 바위 쪽을 향해 달려오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으악”

사냥꾼들이 호랑이 함정에 빠진 것이었다. 왕초가 냅다 달려가더니 사냥 꾼들이 떨어뜨린 목궁을 집어 들고는 바로 뒤돌아 호랑이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왕초가 활시위에 건 대전(大箭)의 길이는 한눈에 봐도 5척은 넘는 길이였다. 목궁도 꽤 묵직한데 대전을 활시위에 당겨 겨누고 있는 왕초의 모습이 무척 위엄 있어 보였다. 그때 갑자기 수풀 속에 있던 호랑이가 풀쩍 뛰었다. 그때 화살이 날았다. 사람의 걸음으로 180보는 족히 넘는 먼 거리였다. 목궁은 정확히 호랑이에게 명중했다.

“퍽”

수풀 속에서 괴로운 듯 몸을 뒤틀며 울부짖는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왕초의 활솜씨에 놀란 똘만이와 짱대가 입을 틀어막았다. 왕초는 바닥에 떨어진 창 하나를 주워 들고는 지체 없이 달려가 호랑이의 급소를 찔렀다.


4.


이튿날 아침 빗자루를 들고 나오던 막개가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대문을 열다가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막개의 고함소리에 놀란 수련도감 사람들이 대문 밖으로 나왔다. 대문 앞엔 죽은 호랑이가 엎어져 있고 그 뒤에 언국과 왕초 무리가 서 있었다. 뒤늦게 나온 수명이 그 모습을 보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순간 수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때  자강이 문밖으로 나왔다. 언국이 자강에게 절했다. 자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게 무엇이냐?”

“문제를 풀었사옵니다”

“뭐라? 문제를 풀었다?”

자강의 뒤에 선 수명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자강이 말을 이었다.


“문제가 무엇이었느냐?”

“호랑이 앞발 관절과 가죽을 가져오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언국의 말을 들은 자강과 수련도감 생도들이 깜짝 놀랐다. 그때 저 멀리서 막동이와 사냥꾼 셋이 오고 있었다. 막개가 입을 열었다.

“넌 어디 갔다 오냐? 이 사람들은 누구고?”막동이가 약초가 든 바랑을 내려놓으며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약초 캐러 갔다가 함정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길래 내가 구해줬어”

사냥꾼들은 호랑이와 언국의 무리를 번갈아보더니 기막힌 표정이었다. 어젯밤 분명히 언국을 향해 화살을 쏘았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들은 수명의 사주를 받고 언국을 해하려 화살을 겨누었었다. 그들은 수명과 눈이 마주쳤다. 수명은 고개를 돌리고 사냥꾼들의 시선을 피하며 모른 척했다.


이를 지켜보던 자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는 신참례에 통과했다”

왕초와 똘만이 짱대가 얼떨떨한 표정의 언국을 얼싸안고 기뻐했다. 그때 자강이 생도들을 한번 휙 둘러보며 말했다.

“불공정이라 하였느냐? 그렇다면 진정으로 공정한 것은 무엇이냐? 정식으로 시험을 치렀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공정하다고 누가 자신할 수 있느냐? 불공정한 문제도 성실하게 풀어낸 이 아이는 또 어찌 설명할 것이냐?”수명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5.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고 처마 밑으로 하나 둘 떨어지는 물방울이 움푹 파인 댓돌 중앙에 고였다. 그 모습을 넋이 빠져서 지켜보던 언국은 다시 약초를 한 움큼 집어 들었다. 언국의 곁엔 캐다 놓은 약초가 앉은키만큼 수북이 쌓여있었다. 약초를 얼마나 만졌는지 그 의 손끝은 거무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한편 변복을 한 혜신이 야무지게 옷가지며 책을 고운 비단 보자기를 싸고 있었다. 보다 못한 강 상궁이 보따리를 빼앗아 들고는 말했다.

“마마! 못 나갑니다 “

“아이 참! 이리 내놓지 못해? 난 갈 거야”

“진짜 마마 때문에 제가 제 명에 못살겠습니다. 아무리 그러셔도 이건 안됩니다. 주상전하께서 아시는 날엔”

강 상궁은 상상도 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강 상궁의 말을 듣고 있던 혜신이 뭔가 생각 난 듯 갑자기 밖으로 튀어나갔다.

“마마! 마마! 아니 대체 왜 이렇게 맥락이 없이 뛰어다니시는지 원 마 마!”

당황한 강 상궁은 보따리를 품에 안고 혜신을 뒤쫓아 나갔다.

잠시 후 온양행궁을 떠나는 아바마마의 행렬을 의미심장한 얼굴로 지켜보던 혜신은 인왕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한편 언국은 잘 다듬은 약초들을 야무지게 묶어 하나 둘 쌓기 시작했다. 책보를 맨 혜신은 씩씩하게 수련도감을 향해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잠시 후 사립문이 열리며

“이리 오너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혜신은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다가 약초꾸러미를 들고 문을 나오던 언국과 부딪히고 말았다.

“아얏”

부딪힌 이마를 문지르며 언국이 혜신과 눈이 마주쳤다.

“어? 너는?”

혜신 역시 이마를 만지며 언국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네가 여긴 왜?”

그때 언국이 입을 열었다.

“지금 누가 할 소리? 넌 여긴 왜 온 거야? 복장은 또 왜 이래?”


그때 대벽이 오더니 혜신을 발견하고는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엥? 이 곱상하게 생긴 도련님은 뉘시온지? 못 보던 분인데?”

그때 혜신이 대벽을 향해 씩씩하게 인사하며 말했다.

“난 이 도겸이야”

“오! 극강 친화력! 너무 좋아 이런 타입! 난 김 대벽이야”대벽이 손을 내밀었다.

그때 언국이 황급히 대벽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라? 이건 뭔 시추에이션? 뭐 하는 짓이야?”언국이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침 인사하는걸세“

“이런 미친”

그때 혜신이 입을 열었다.

“나도 이제 여기 생도야. 잘 지내보자”언국이 혜신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이 이전과 매우 달랐다. 자세히 보니 그녀가 수련 도감 생도 의관을 갖추고 있었다. 언국은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했다. 혜신 역시 수련 도감에서 자신을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뿔싸!

언국을 여기서 만나다니! 그녀 역시 몹시 당황했다.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다 싶었다. 언국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어이없다는 듯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내 앞에서 그렇게 말하면 안 될 텐데...” 혜신은 대벽이 듣지 못하게 언국에게 귓속말로 당부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못 본 척해 줘”하지만 언국은 여전히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말했다.

“아무리 사정이 있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사내들만 우글거리는 곳에 있겠단 말이냐? 말도 안돼”그때 도겸이 발끈했다.

“왜 안되는데? 나도 엄연히 입학허가를 받은 몸이라구”


혜신이 갑자기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들고는 언국의 코앞에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난 학비도 챙겨 왔어! 자그마치 1년 치 학비!”

혜신의 두둑한 돈주머니를 낚아챈 대벽이 주머니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황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이렇게 귀한 분이 어디 있다가 이제야 들어온 것이요? 이것 좀 봐! 이 주머니는 명나라의 최고급 비단으로 지은 것이요. 그러고 보니 이 의관도? 어디 보자 그런데 이건 어디 것이요? 내 옷은 최근에 명나라에서 수입한 비단인데 이건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비단인데? 여인의 살결처럼 곱고 고급스러운 문양이 내 마음에 쏙 드오!”

대벽이 감탄사를 연발하는 사이 언국은 혜신의 옷과 자신의 초라한 옷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내들만 우글거리는 수련도감에 함께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그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여긴 엄연히 사내들만 수련받는 곳이야. 넌 어울리지 않아”

혜신이 언국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반박했다.

“내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어울린단 말이니?”

언국이 기가 막혀하자 대벽이 둘 사이에 어깨동무를 하더니 능글능글한 표정으로 번갈아 보며 말했다.

“뭐든 상관없고 돈 많은 쪽은 무조건 내편! 나 그동안 사실 좀 외로웠거든. 끼리끼리 논다고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 사람을 만났네!

자자! 싸우지들 말고 우리 사이좋게 지내보자고. 하하하”


6.


다음 날 새벽 물을 길어 들어오던 언국은 깜짝 놀랐다. 도겸이 마당에 서 있었다. 도겸은 두 팔을 걷어붙인 채 언국의 지게에서 물동이를 받아 들었다.

“어디에 두면 돼?”

언국이 당황하여 말을 더듬거렸다.

“어? 이거 엄청 무거울 텐데...”

도겸은 들은 척도 않고 부엌으로 호기롭게 들고 갔지만 어찌나 무거운지 몇 걸음 못 가 그만 바닥에 물동이를 엎고 말았다.

“아니 어찌 이리 무거운 것이냐?’

힘들게 길어온 물이 죄다 바닥에 쏟아지는 것을 보던 언국이 물동이를 집어 들던  도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언국은 도겸을 쏘아보았다. 도겸은 순간 자신의 두 뺨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도겸은 깜짝 놀라며 손을 뺐다.


“이게 무슨 짓이야?”

“아니 물이 다 쏟아졌잖아? 내가 얼마나 힘들게 길어온 건데?”

도겸은 부러 더 큰소리를 쳤다.

“거 사내대장부가 쫌생이같이! 그깟 물 다시 길어오면 되잖아?”

“뭐? 쫌생이? 우이씨!”

도겸이 당당하게 말했다.

“나도 이젠 어엿한 수련도감 생도라고! 같은 동무로써 이젠 예의를 갖추어주지 않겠니?”

“여긴 네가 있을 곳이 못된다고! 알겠어?”그때 수련도감 생도들이 들어왔다. 도겸을 본 생도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류성이 입을 열었다.


“쟨 뭐야? 못 보던 앤 데? 어떻게 들어온 거지? 시험 날짜 아직 멀었잖아?” 그때 찬랑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혹시 특전?”

“그게 뭔데?”

찬랑 주위로 생도들이 모여들었다. 생도들에게 둘러싸인 찬랑은 신이 나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수련도감 생도가 되려면 먼저 정식시험을 거쳐야 해. 그런데 사실 수련도감엔 일명 특전! 이름 하여 특별전형이란 게 있어”

“금시초문인데?”

“그러게”

“당연하지. 우리 중엔 그 전형으로 들어온 사람이 한 명도 없거든.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배려차원의 전형이라고나 할까?” 그때 류성이 삐딱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약자? 저 차림새가 약자라고? 네 눈엔 저게 안 보이냐? 한눈에 봐도 귀티가 줄줄 흐르는데?”찬랑은 당황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뭐 옷이야 어디서 얻어 입었을 수도 있지. 왜 얼마 전에 도망간 놈 있잖아? 우현이라고 대벽이랑 같은 방을 썼던 애! 그 친구 아버지가 실은 내의원 의관이야. 그런데 역모에 휘말려 부모들은 모두 능지처참을 당하고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었지. 그래서 우현이가 특전으로 들어왔더라고. 우현이가 나가는 바람에 자리가 하나 빈 셈이고”생도들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모두 의아한 눈치였다.


듣고 있던 언국의 표정도 순간 일그러졌다. 그때 도겸이 그들 앞에 나서며 말했다.

“맞아! 우리 집이 역모에 몰려 조실부모하고 집안은 풍비박산케이스! 됐지?”

생도들의 눈이 일순간 휘둥그레졌다. 엄청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도겸 앞에서 모두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때 대벽이 들어오더니 도겸을 보자마자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오! 나의 베프! 왔는가?”

대벽은 냅다 도겸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친한 척을 했다. 대벽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도겸이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자 언국은 재빨리 대벽의 손을 치웠다. 뒤늦게 들 어온 수명은 아름다운 도겸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만 넋을 잃었다. 곁에 있던 대벽이 황홀한 얼굴로 도겸을 바라보는 수명을 툭 치며 말했다.

“아니 자네! 사내를 보고 그렇게 넋을 잃다니! 당장 의원이라도 찾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 누가 보면 여기 아리따운 여인이라도 있는 줄 알겠네”

정신이 번쩍 든 수명이 당황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무슨 소리야?”

그때 도겸이 당차게 말했다.

“난 오늘부터 이곳에서 함께 수련을 받게 될 이 도겸이야”

그때 수명과 함께 온 생도 류성이 도겸을 보고 비꼬며 말했다.

“참! 수련도감도 예전 같지 않아”그때 천랑이 거들었다.

“물 많이 흐려졌지. 쯧쯧”

수명과 류성 그리고 찬랑이 혀를 끌끌 차며 들어갔다.


대벽과 함께 있던 생도 강산이 도겸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난 강산이다. 잘 지내보자!” 그때 대벽이 호들갑 떨며 말했다.

“강산이도 우리 편! 이 친구랑 친하게 지내. 강산이 아버지가 이조판서 이지황대감이거든! 이 친구 비록 서출이긴 하나 뒷배가 든든한 친구일세. 암튼 친하게 지내면 자네에게도 도움이 될 걸세” 도겸이 풋 하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대벽은 아랑곳하지 않고 촐랑대며 말했다.

“수련도감이 꽤 빡세지만 그래도 나름 소소한 재미가 있지. 그나저나 마침 어제 내 방 생도가 나가는 바람에 자리가 비었으니 거기서 같이 지내면 되겠네”


그때 언국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그건 절대 안 돼”

언국이 화를 내자 대벽은 의아해하며 말했다.

“뭐지? 이런 느닷없는 반응은?”대벽의 말에 언국은 딱히 할 말이 없어 둘러댔다.

“아 그 그게 새로 온 신입이 어떻게 하늘 같은 선배님이랑 한 방을 쓰겠습니까?” 눈치 없는 대벽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나는 저 친구들처럼 그렇게 권위적이진 않아. 매우 인간적이라구. 안 그런가?”

팔짱을 끼고 있던 강산이 한마디 툭 내뱉었다.

“너는 귀찮게 신입이랑 한 방을 쓰고 싶니? 지들끼리 있으라고 그래”

강산이 언국에게 도겸을 데리고 들어가라고 손짓하고는 대벽을 데리고 사라졌다.


언국과 도겸 둘만 남겨지자 둘은 민망한지 서로 다른 곳만 쳐다보았다. 한참을 아무 말없던 언국이 입을 열었다.

“저기 오른쪽 첫 번째 방이 내가 머무는 방이야. 가서 짐부터 풀든가”

도겸은 언국과 같이 한 방에서 지낼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내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머리가 복잡해진 도겸은 일단 방에 짐을 두 고 나와 침구수업이 있는 도림원으로 향했다.


도겸이 언국과 도림원에 들어서자 모여 있던 생도들이 휘파람을 불어댔다.

수명은 도겸을 보자마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혹시 누가 눈치라도 챌까 봐 고개를 푹 숙였다.

자강의 침구수업이 끝나고 자강이 생도들을 보며 물었다.

“오늘 배운 부분에 질문들 있나?”그때 류성이 손을 들고 말했다.

“스승님! 이번 신입들은 모두 특전으로 들어왔습니다. 저 친구들이 이 수업을 이해할 수 있을지 무척 걱정이 됩니다. 아무래도 반을 나누어 수업을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찬랑이 곁에 있다가 류성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들었다.


“맞습니다. 특전생들이 이렇게 어려운 수업을 알아듣긴 쉽지 않을 겁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강산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참나! 지들은 듣고 다 이해했나 보지?”대벽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유성이는 몰라도 찬랑이는 절반도 이해 못 했을 텐데 큭큭”

찬랑이 대벽을 노려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자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이번에 들어온 신입들을 걱정해 주는 마음들이 참 대견하구나. 그럼 오늘 수업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한번 물어보면 되겠지?”

자강이 도겸을 보고 말했다.

“병자의 몸에 종창이 생겼을 땐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대답해 보거라”

도겸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2) 먼저 온몸이 갑자기 붓고 얼굴이 크게 부어오른 경우에는 발 안쪽 복사뼈 아래피부색 경계에 3장 뜸을 뜨면 바로 효과가 나타납니다. 또한 수종과 복창이 생겼을 때는 배꼽을 중심으로 위쪽으로 1촌 되는 수분혈과 삼음교 음교에 모두 100장 뜸을 뜨고 아울러 오장수혈에 시술을 합니다. 중완에는 발침 후에 혈을 눌러 물이 나오지 않게 하고 음교에 일곱 장 뜸을 뜨면 좋아집니다.

팔다리 및 얼굴과 눈에 생긴 부종의 경우는 조해, 인중, 합곡, 족삼리, 절골, 곡지 혈에 침을 놓는데 중완침법을 쓰면 효험이 있고 완골, 비수, 위수, 삼음교에 침을 놓습니다. 부종 및 고창(鼓脹)에는 비수, 위수, 대장수, 방광수, 수분 혈에 침을 놓고 이 역시 중완침법을 쓰면 효험이 있습니다. 더하여 족삼리, 소장수, 삼음교 혈에 침을 놓으면 부종을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자강이 물었다.

“그렇다면 중완침법이 무엇이냐?”도겸이 대답했다.

“배꼽에서부터 4촌 길이 되는 곳을 중완 혈이라 하는데 이 중완 혈이나 주위 혈들을 자침하는 방법을 중완침법이라 하옵니다”

생도들 사이에선 가느다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생도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수업이 다름 아닌 바로 침구수업이었다.

그런데 이제 막 들어온 신입이 혈자리를 줄줄 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강은 흐뭇한 표정으로 도겸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어  언국을 향해 말했다.

“너는 풍에 걸린 병자를 치료했다 들었다. 어떻게 치료했는지 답해 보거라” 언국이 입을 열었다.

“병자는 쓰러지기 전에 어지러움을 호소했습니다. 병자는 몸이 비대하고 평소 과도한 음주와 불규칙적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쓰러진 병자를 살펴보니 팔다리가 따뜻하고 입가에 침을 흘리는 것을 보아 풍으로 진단하였습니다. 그래서 급히 인중인 수구 혈을 엄지손가락으로 세게 눌러 다섯을 세고 백회(百會) 혈과 합곡(合谷) 혈에 침을 놓았습니다. 3)의식을 회복했지만 말이 어눌하고 한쪽 팔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증세를 보며 백회, 풍시, 족삼리, 합곡, 위중, 태충 혈에 침을 놓고 뜸을 뜨면서 지켜보았습니다” 자강이 입을 열었다.

“제법이구나. 어떠냐? 이만하면 너희들과 같이 수업을 들어도 잘 따라올 수 있지 않겠느냐? 허허허”

찬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내둘렀다. 놀라기는 다른 생도들도 마찬가지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류성은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1) 복룡간[伏龍肝] : 동의보감상 약으로 사용하는 흙(출처:두산백과) 2) 침구경험방-허임(1644)

3) 침구경험방- 허임(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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