궐에선 숙의 엄 씨가 사망하고 이 일로 고민하던 왕은 괴질을 앓게 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도겸은 침술공부에만 열중한다. 급기야 왕은 자강을 불러들이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1.
같은 시각 궐 안은 매서운 한기가 감돌았다. 몇달 전 돌림병으로 죽은 중전의 자리를 노리던 숙의 엄 씨는 때를 기다리라던 대왕대비의 말을 무시하고 틈만 나면 중전 간택문제를 꺼내 왕의 심기를 건드렸다. 화가 치민 왕은 숙의 엄 씨를 움직이는 배후가 누구인지 은밀히 추적하라는 명을 내렸다.
대왕대비는 깊은 밤 숙의 엄 씨를 처소로 불러들였다. 대비전엔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그녀 앞에 엎드린 숙의 엄 씨가 입을 열었다.
“마마! 이 야심한 밤에 무슨 일이시옵니까?”
그때 눈을 감고 있던 대왕대비가 숙의 엄 씨를 노려보더니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숙의는 나와의 약조를 어겼습니다. 내가 분명 때를 기다리라 하였는데 말입니다”
대왕대비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었다. 하여 좀처럼 그녀의 속내를 알기가 어려웠다. 그녀의 낮으면서도 준엄한 목소리에 숙의 엄 씨는 선뜻 입을 떼지 못하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였다.
“마마! 전하께서는 얼마전 죽은 김숙의를 잊지 못하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이 모든 것이 중전자리가 비어있기에 더욱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중전간택을 하시어 상심을 거두시라는 간언을 드린다는 것이 그만...”
대왕대비의 목소리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숙의는 정녕 아직도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요? 내 말을 무시하고 주상의 심기를 어지럽힌 죄!”
숙의 엄씨는 이마가 바닥에 닿을 듯이 납작 엎드렸다.
“마마! 제발 소인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래도 소인이 마마를 도와 일을 도모했던 옛정을 생각해서라도...”대왕대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뭐라? 나를 도왔다? 허!”
대왕대비는 정색하고 추상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숙의! 돕는다는 말은 그럴 때 사용하면 안 되지요. 지체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때 돕는다는 말을 씁니다! 그럴 때 사용하는 거예요. 아시겠습니까?”
엄숙의의 불안한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하면 모면할 수 있을까 그녀는 머리를 굴렸다.
“마마! 제발 소인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소인 마마의 은혜가 아니면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
대왕대비는 눈을 지그시 감더니 입을 열었다.
“죄를 지었으면 그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하는 법! 그리 알고 그만 물러가게”
숙의 엄 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물러가라니 숙의 엄 씨는 엄습해오는 두려움에 차마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충격을 받은 숙의 엄 씨는 일어서려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는 궁녀들의 도움으로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처소로 돌아가는 숙의 엄 씨는 두려움에 계속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대왕대비가 숙의 김 씨에 관해 이야기할 때 같은 말을 했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처소로 돌아온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부들부들 떨었다.
다음 날 새벽 엄 씨 처소 뜰에 서 있는 오래된 버드나무가지들이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소리없이 휘청이고 있었다. 새벽마다 유난히 지저귀던 새들도 오늘따라 조용했다. 그녀의 방 안엔 비단금침이 곱게 개어 있고 소복차림의 엄 씨가 눈을 다 감지 못한 채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강녕전으로 엄씨의 소식이 발빠르게 전해지고 왕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녀가 왜?’
그는 궁녀였던 엄 씨의 아름다운 외모에 한 눈에 반해 그녀를 후궁으로 삼았다. 하지만 질투심 많은 그녀의 성품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그녀를 대하는 것을 무척 피곤하게 여겼다. 사실 왕은 며칠 전 중전을 속히 간택하라며 졸라대는 엄 씨에게 버럭 화를 냈었다. 아직 숙의 김 씨의 상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 충격이 가시지 않은 왕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목을 매다니...
이 소식을 전해들은 대신들은 어전에 모여 수군거렸다. 왕이 들어오자 신하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왕은 이런 신하들의 기색을 놓칠 리가 없다. 왕이 앉자마자 이조판서 이지황이 입을 열었다.
“전하! 숙의마마들께서 연달아 죽음에 이르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옵니다. 도성엔 벌써 흉흉한 소문들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중전 간택을 서두르셔야 하옵니다”
왕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냉소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사람이 목을 매었소. 이 일의 전후사정도 모르고 아직 장례도 수습하지 않은 마당에 중전을 간택하라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온단 말씀입니까?”
일순간 어전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하지만 이지황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중전마마께서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아 궐 안에 숙의마마들께서 계속 죽어나가는 것은 백성들이 보기에도 모양새가 좋지 못하고 만에 하나 도성에 흉흉한 소문이 떠돌까 염려되어...”
왕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말했다.
“경은 숙의들이 연달아 죽은 것에는 아무런 의구심도 들지 않소?"
"전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신 역시 애통하고 비통하지요. 하오나 김숙의마마께서는 오랜 병환으로 돌아가신 것이온데 의구심이라 하시오면..."
"아무튼 지금은 엄 숙의가 왜 스스로 목을 맸는지를 밝히고 장례를 치르는 것이 우선이요”
왕의 단호한 반응에 신하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아무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경들이 이처럼 숙의들의 사인에 대해 명명백백 밝히기를 원하니 의금부에 일러 상세히 사인을 밝히라 이르시오”
왕의 말에 이지황대감의 표정이 굳어졌다.
2.
한편 수련도감은 벽보 앞에 모여든 생도들로 북새통이었다.
“시험 범위랑 날짜 나왔어”
“뭐? 진짜? 우이씨 안보여! 좀 저리 비켜봐”
찬랑이 생도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더니 벽보 앞에 섰다. 벽보를 읽어 내려가던 찬랑의 얼굴이 점점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많은 걸 언제 다 해?”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와중에 재빠르게 시험범위를 파악한 류성과 수명은 생도들이 웅성거리는 사이 시험공부하기 좋은 자리부터 선점해 책을 펼쳐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대벽이 비아냥거렸다.
“하여간 머리 좋은 놈들이 더하다니까? 벌써 공부하는 것 좀 봐. 정떨어지게”
대벽은 곁에 있던 강산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이번 시험 족보 좀 구해보게. 이 많은 범위를 언제 다 보겠나? 우리 짧고 굵게 공부해서 사이좋게 통과해보세”
“으이구! 넌 잔머리 좀 그만 굴려!”
강산이 대벽을 쥐어박았다. 발 빠른 찬랑은 벌써 몸종을 시켜 족보를 구해오도록 심부름을 보냈다.
그때 대벽이 류성에게 꿀팁이라도 얻을까 싶어 옆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찰나 갑자기 대벽이 앉으려던 책상위로 책 한 권이 휙 날아왔다.
“헐! 이건 뭔 시츄에이션?”
찬랑이 뛰어오더니 대벽을 밀쳤다.
“내가 먼저 찜!”
그때 대벽이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나 참! 이 자식 진짜 어이없네”
찬랑은 대벽이 그러던 말던 책상을 꿰차고 앉으려 했다. 대벽은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책상을 잡고 버텼다. 둘이 서로 실랑이를 벌이던 그때 류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조용히들 좀 해! 시끄러워서 집중이 안되잖아?”
뻘쭘해진 대벽과 찬랑은 류성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시험을 치른다는 소식에 주위가 소란스럽자 수명은 신경질적으로 보던 책을 탁 덮었다. 수명의 아버지는 내의원 종4품 첨정 조 영현. 그는 어의가 되고 싶었으나 이루지 못한 자신의 꿈을 아들인 수명이 대신 이루어주기를 바랬다. 그는 무조건 1등으로 수련도감을 졸업해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지만, 수련도감의 시험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수명은 늘 머리 좋은 류성에서 1등자리를 내주었다. 수명은 더 이상 집중이 안 되는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자리에 앉은 언국은 차분하게 의서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뒤늦게 도겸이 들어오자 언국은 그녀가 신경 쓰이는지 계속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도겸은 그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뒤를 휙 돌아보았다. 언국은 도겸과 눈이 마주치자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두리번거리며 공부할 자리부터 찾았다. 도겸은 조용히 구석진 자리를 찾았다. 도겸이 자리를 옮기자 언국은 다시 저도 모르게 그녀가 움직이는 대로 시선이 머물렀다. 도겸이 아무렇지도 않게 팔을 걷어붙이자 언국은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도겸은 자기 손과 팔의 혈자릴 짚어가며 거침없이 침을 놓기 시작했다. 도겸의 팔에 침이 꽂히는 것을 본 언국은 혀를 내둘렀다.
‘와! 지독한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