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같은 시각 대왕대비가 예고 없이 강녕전에 들이닥쳤다. 지밀상궁이 왕에게 급히 고했다. 순간 왕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녀 역시 그동안 중전 간택을 서두르라고 그를 압박해왔기 때문이었다. 대왕대비는 왕의 안색부터 살피며 말했다.
“잠을 설치신 모양입니다. 하긴 그럴 수밖에요”
왕은 짜증스러운 마음을 누르고 최대한 예를 갖추어 말했다.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할마마마”
대왕대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숙의 엄 씨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이렇게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주상!”
왕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주상! 할미는 두렵습니다. 엄숙의가 자결한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 일로 도성에 흉흉한 소문이라도 퍼지면 어쩝니까? 그러니 중전의 자리를 속히 세워 소문을 잠재우고 조선왕실의 견고함을 보이셔야 할 것입니다”
그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꾹 누르며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할마마마! 그 일은 내명부에서 나설 일은 아닙니다. 제가 알아서 할 것이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대왕대비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숙의는 내명부사람입니다. 그런데 어찌 내명부의 일이 아니라 하십니까? 숙의가 그렇게 된 것은 이 할미도 가슴이 아파요. 황망한 마음 금할 길이 없지만, 주상은 이 나라 조선의 왕이에요. 주군으로써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백성들을 위해서도 좋지 않습니다”
왕은 하마터면 책상을 내리칠 뻔했다.
“할마마마!”
그의 목소리엔 원망과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그간 사사건건 그의 결정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자신을 몹시 위하는 척하는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을 누구보다 꿰뚫고 있는 왕이었다.
“주상의 마음을 잘 압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어요. 그러나 이 할미의 말을 새겨들으셔야 합니다”
대왕대비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주상을 보필할 중전을 하루빨리 세우는 것이 이 할미의 소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중전을 간택하라는 상소가 빗발치고 있다지요? 백성들의 마음도 이 할미의 마음과 같지 않겠습니까?”
그는 그녀가 왜 이 일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지 잘 알고 있었다. 왕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2.
도림원을 나선 자강은 몹시 화가 난 사람처럼 수련도감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막동이는 자강의 눈치만 살피느라 안절부절했다.
“스승님 노여움을 푸시고 진정하시옵...”
자강은 막동이의 말은 들은 체 만 체 하며 수련도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강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수련도감 안은 도겸의 활약에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어디 있느냐?”
그때 눈치 없는 대벽이 자강을 반겼다.
“스승님! 스승님도 소문 듣고 오셨습니까? 아 글쎄”
그때 자강이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
“병자를 치료한 것이 누구냐?”
순간 수련 도감 안에 있던 생도들은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때 도겸이 눈치를 보다가 용기를 내었다.
"접니다”
그때 자강이 찬랑의 맥을 짚고 환부를 살피더니 도겸을 쏘아보며 말했다.
“네 놈이냐? 너 같은 놈이 병자를 살리겠다고 설치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순간 수련 도감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도겸은 스승님이 왜 발끈하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진단이 정확했을 뿐 아니라 병자의 위급한 통증을 가라앉힌 것을 오히려 칭찬받을 거라 생각했다.
“무지몽매한 놈이 병자 하나를 죽일 수도 있었어”
자강의 말에 모두 깜짝 놀랐다. 도겸은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는데 자강이 생도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찬랑의 병증은 역절풍이 맞다. 하지만 역절풍만으로 이렇게까지 신열이 나고 식은땀을 흘리진 않아. 자세히 보면 발가락 뒤에 창종이 생겨 이렇게 부은 것이다. 지금 당장 고름을 빼지 않으면 발가락을 절단해야 할 수도 있다.”
찬랑은 발가락을 자를 수도 있다는 말에 비명을 지르며 벌벌 떨었다. 자강은 도겸을 향해 말을 이었다.
“너는 의원의 가장 기본이 되는 진찰인 망문문절(望聞問切)의 사진(四診)을 소홀히 했다. 하여 찬랑이의 환부를 자세히 살피지 않은 것은 물론 언제부터 이 증상이 시작되었는지 묻지도 않았어. 이 아이의 병은 꽤 오래전부터 진행되었다. 자세히 보면 발가락의 뼈마디가 어긋나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거기다 종기까지 났으니 그 통증이 어떠했겠느냐?”
도겸은 깜짝 놀랐다. 그녀가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증세를 자강은 하나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강이 생도들을 향해 말했다.
“의원 된 자는 자만하지 말고 끊임없이 묻고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너희가 본 병증은 고작 손에 꼽을 정도지. 하지만 도성엔 수많은 병자들이 있고 그들의 병증 또한 다 제각각이다. 만약 너희들이 조금 안다고 오만한 태도로 병자에게 달려들었다간 네 놈들이 든 침은 사람을 살리는 침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베는 검이 될 것이다”
자강은 침통에서 피침을 꺼내들더니 찬랑의 종기를 조심스럽게 가른 뒤 고름을 쏟아냈다.
깊은 밤 도겸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텅 빈 수련도감 뜰에 앉아 있었다. 그때 자강이 도겸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
“아직도 분하더냐?”
도겸이 자강을 보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자강은 잠시 별이 총총 뜬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찬랑의 병증이 백호역절풍인 것은 어찌 알았느냐?”
도겸은 갑자기 자강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놀라며 입을 열었다.
“그 자의 몸집이 비대했고 통증이 유독 심하며 발끝에 잔뜩 힘을 주고 있는 모양새가 발에 병증이 있다 생각되어 벗겨보니 과연 발이 부어 있어서”
자강이 말했다.
“도성에 백호역절풍을 진단할 수 있는 의원은 몇 안 될 것이다. 기근이 심한 도성안에선 볼 수 없는 병이지. 이 병은 돈 많은 양반네들과 왕실에서나 볼 수 있는 병이다. 그런데 네가 그 병증을 단번에 알고 있더구나. 대단한 눈썰미를 가졌구나”
사실 역절풍은 그녀가 정 참봉에게 의술을 배울 때 들었던 병증이었다. 자강의 말대로 먹을 것이 풍족한 왕실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병이었기 때문이었다.
도겸은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아까는 왜 그리 호되게 나무라셨습니까?”
자강이 너털웃음을 웃었다.
“허허허! 서운했느냐? 칭찬이 때론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지. 내가 그랬다. 주변에서 하도 의술이 뛰어나다고 칭찬해대니 내 재주가 정말 뛰어난 줄만 알았지. 그러다 그만....”
자강은 말꼬리를 흐렸다.
도겸은 그런 자강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마침내 자강이 입을 열었다.
“욕심이 앞서면 마음이 조급해져 병증을 세밀하게 살피기 어렵다. 침은 제법 놓더구나. 하지만 잘 하려는 욕심을 먼저 내려놓아야 해”
자강의 말에 도겸은 제자를 생각하는 그의 진심이 느껴져 뭉클했다.
“고맙습니다 스승님! 스승님께서 가르쳐주지 않으셨다면 오히려 찬랑에게 큰 화를 입힐 수도 있었습니다”
그때 자강이 입을 열었다.
“이 정도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앞으로 너의 의술이 깊어질수록 부딪혀야 하는 병증은 그리 녹록치 않을 거야. 침을 든 것을 후회하진 않느냐?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어”
그때 도겸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스승님! 제가 옹주의 의복을 처음 벗었을 때 저는 이미 모든 것을 받아들일 각오를 했습니다”
"흐음"
자강이 도겸의 결연한 눈빛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그 정도 결심이라면 이 정도 일로 축 쳐져서야 되겠느냐? 이러고 있을 시간에 병증 하나라도 더 공부해야 할 것이 아니냐?” "이래서 스승님을 괴짜라고 하나봅니다"
"뭐야? 이 녀석이!"
도겸은 잽싸게 인사를 하고는 도감으로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