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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물 Oct 24. 2024

9.일촉즉발-4


1.     

다음 날 정 참봉이 자강을 찾아왔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안부나 물으려고 온건 아닐 테고 그만 내려가시게”

“차나 한 잔 하러 왔습니다”

“차 한 잔 마시러 오는데 이리 요란하게 오는가?”

정 참봉 뒤로 화려한 가마를 든 가마꾼들과 궁녀들 십여 명이 서 있었다. 그때 정 참봉이 그들에게 물러가 있도록 손짓했다.  

    

천천히 따라주는 차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 참봉이 차를 한 모금 머금다가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스승님! 지금 궐 안이 뒤숭숭합니다. 얼마 전 후궁인 숙의 엄 씨가 목을 맸고 대비전과 대신들은 중전간택을 서두르라 재촉하는 바람에 전하께서 요 며칠 심기가 몹시 좋지 않습니다. 밤잠도 제대로 못 이루시고 식사도 거르시더니 지금 심한 괴질을 앓고 계십니다. 어떤 치료를 해도 낫질 않아 전하께서 스승님을 모셔오라 명하셨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자강은 깊은 한숨을 쉬더니 눈을 감았다. 

“같이 내려가시지요”

정 참봉은 자강에게 궐에 함께 갈 것을 청했다. 하지만 자강의 반응은 싸늘했다.  

“나는 다신 궐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네”


실은 자강도 내의원 의관이었다. 그러나 자유로운 영혼인 자강에게 규율이 엄격한 내의원은 적성에 맞질 않았고 견디다 못한 자강은 궐을 뛰쳐나왔다. 자강은 정 참봉의 간곡한 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차가 식은 걸 보니 이제 일어날 시간이 된 것 같네!”

“스승님 한 번만 더 생각해주십시오!” 

정 참봉은 간곡히 부탁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자강은 생각이 많아졌다. 궐 안의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현실이 자강의 불편한 심기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왕의 병세를 모른 척 하는 것도 그에게는 무척 괴로운 일이었다.

“정히 그렇다면 내 제자들을 데리고 들어가겠네”

자강의 말에 정 참봉은 두 말도 하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스승님”

“한 가지 더 있네”

“무엇입니까?”

“내가 전하를 치료하는 동안 내의원의 어떤 의관도 들이지 말아야 하네”

순간 정 참봉의 얼굴이 굳어졌다. 왕의 전권을 들고 왔지만 이건 궐에서 특히 어의 김 정한이 크게 반발할 사안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떤 조건도 다 수렴하라는 왕의 명이 있었기에 정 참봉은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받아들였다.      


같은 시각 수련도감 안은 정참봉의 행렬을 두고 떠들썩했다. 그때 찬랑이 뛰어 들어오자 생도들의 눈이 일제히 찬랑에게 향했다.

“스승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입궐하겠다고 하셨대”

생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도들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제자들을? 그럼 우리 중에 누굴 데리고 가겠다는 거야?”

찬랑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혹시 나님 일수도? 빨리 짐부터 좀 싸야겠다”

대벽이 찬랑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김칫국도 분수껏 마셔야지. 스승님이 널 데려가겠냐? 차라리 날 데려가면 모를까?”

찬랑이 대벽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아유 진짜 이 자식! 넌 좀 맞아야겠다”

강산이 둘을 겨우 뜯어말렸다.


“그만들 좀 하지? 이젠 지겹지도 않냐? 스승님이 제일 똑똑한 녀석들을 데려가지 너희들을 데려가겠니 설마?”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찬랑과 대벽이 돌아보니 이 난리통에도 류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책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 없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수명은 내심 스승님께서 자신을 지명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짐을 싸는 자강에게 막동이가 조용히 물었다.

“스승님 어느 생도들에게 준비하라고 할까요?”

“준비할 것도 없다. 가는 길에 내가 조용히 데리고 갈 것이니”

막동이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언국은 아까서부터 도겸의 안색만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왕이 괴질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도겸의 안색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도겸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도겸이 걱정된 언국은 잠시 뒤 뒤따라 나갔다. 도겸은 정참봉이 돌아갔다는 말에 일행을 뒤쫓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산을 내려가는 정참봉 일행을 발견한 도겸은 큰 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정참봉이 하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생도 하나가 뒤쫓아 오고 있습니다”

“멈추게”


정참봉 일행이 멈춰 서자 도겸이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숨을 몰아쉬었다.

“나리! 주상 전하의 환후는 어떠십니까? 전하는 괜찮으십니까?”

정참봉이 도겸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말에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정참봉은 짐짓 모른 체 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수련생인 자네가 알바가 아니네”

도겸이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러면 전하께서 아침 타락죽도 거르고 계십니까?”

정참봉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바마마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타락죽을 거르실 때는 환후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였다. 정 참봉의 가마가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겸은 그 자리에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잠시 후 도겸이 힘없이 산길을 터덜터덜 올라오고 있었다. 그때 그녀를 찾으러 다니던 언국과 마주쳤다. 도겸의 두 눈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2.     

어의 김 정한은 자강이 궐에 들어온다는 소식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대체 이런 법도가 어디 있단 말이냐?”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지 못한 정한은 책상을 쾅 내려쳤다. 함께 있던 의관들도 흥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의 영감! 이게 무슨 일입니까? 엄연히 내의원에 최고 의원인 어의가 있는데 내의원 의관도 아닌 듣보잡을 들여서 전하의 환후를 살피게 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의관들은 주상전하께서 내의원을 멸시하는 처사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정한은 자강에게 더욱 신경이 쓰였다. 그는 자강이 궐에 들어온다는 것이 못마땅했다. 정한은 골똘히 생각했다.


‘그는 절대 궐에 다시 들어올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 무슨 연유로 궐에 들어오겠다는 거지?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야. 아니면 혹시 형우 그 자의 일 때문인가?’

그는 형우의 아들을 찾아내기 위해 은밀히 매수했던 자를 급히 불러들였다. 

“찾았느냐?”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혹시 몰라 방도 붙여보고 도성 안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지만 이상하게 그 날 이후로 그 자의 아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는 자가 없습니다”

정한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놈을 찾아내야 해. 시신이라도 찾아서 내 앞에 대령해 놓으란 말이다!”

“지금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으니 조만간 기별을 드리겠습니다”

“그 녀석이 꽤 영특하다 들었다. 그러니 아예 싹을 잘라내야지. 아무튼 빠른 시일 안에 그 놈을 찾아야 한다. 알겠느냐?”

“예”     


한편 떠들썩하던 수련도감에 갑자기 자강이 나타났다. 수련도감 안은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자강은 생도들을 한번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왔는지 알고 있을 테니 전후 상황은 거두절미하고 류성이와 수명이는 내려갈 채비를 하거라”

수련 도감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때 대벽이 용기 있게 손을 번쩍 들고 입을 열었다.

“스승님! 둘만 데리고 가시는 겁니까?”

자강이 대벽을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주상전하를 치료하는 일은 목숨과 맞바꾸는 일이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다”


그 말을 들은 찬랑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휴 난 오래 살고 싶어. 목숨까지 걸고 들어가는 건 미친 짓 아니야?”  

대벽이 비아냥거렸다.

“넌 애시 당초 그런 걱정일랑은 하질 말라니까?”

찬랑은 주먹을 움켜쥐며 대벽을 노려보았다. 자강이 말을 이었다.

“류성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끝까지 정확하게 진단을 해내는 아이다. 그리고 수명이는 혈자리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재주가 있다. 왕을 치료하는 일엔 무엇보다 협업이 중요하다. 하여 같이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자강이 말을 마치자 아무도 그의 말에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  

    

류성은 치료에 사용할 참침부터 대침까지 아홉 가지의 침을 크기별로 촤르륵 펼쳐놓았다. 그는 침을 하나 하나 들어 보며 가장 좋은 상태의 침만 골라 넣었다. 침을 고르는 그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특히 종기 치료에 사용할 피침은 날이 무뎌지지 않도록 다시 한 번 숫돌에 갈았다. 그는 신중하게 고른 침들을 모두 소독해 침통에 가지런히 꽂고 야무지게 말아 단단히 묶어두었다.      

그때 막동이가 말린 약초를 들고 왔다.

“말린 쑥은 상태 좋은 것들로만 골라왔습니다”

수명은 막동이가 골라온 쑥을 펼쳐 놓고 그중에서도 뜸에 사용할 최상급의 쑥만 직접 골라 정성스럽게 싸기 시작했다. 궐에 들어갈 채비를 하는 내내 수명은 이번 일이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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