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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물 Oct 24. 2024

10.일촉즉발-5

   

드디어 왕을 알현하기 위해 세 사람은 대전 앞에 나란히 섰다. 대전 뜰엔 자강이 들어왔다는 소식에 어의 김 정한과 의관들이 모여 있었다. 자강이 나타나자 그들은 자강을 노려보았다. 자강은 한양 도성에선 이름난 의원이었지만 궐 안에선 그저 내의원을 박차고 나간 부적응자일 뿐이었다. 그런 자가 주상전하를 치료할 때 어의를 포함해 내의원 의관들은 얼씬도 하지 말라는 조건을 달았다는 사실에 몹시 불쾌했다. 그들은 만에 하나 자강이 실수라도 하면 즉각 대응할 태세였다.     


따가운 시선을 뒤로 한 채 강녕전에 들어선 자강과 두 사람은 왕에게 큰 절을 올렸다. 밤새 통증에 시달린 왕은 만사가 귀찮은 표정으로 손짓하며 치료부터 서두르라 명했다. 자강은 왕의 곁에 다가가 앉아 왕의 왼쪽 손목의 완골을 눌러 관맥을 잡기 시작했다. 곧이어 관맥 앞 촌맥을 잡았다. 진맥하던 자강이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삼부구후맥법을 시행할 것이다. 앞으로 와서 각각 한 부분씩 맡아 진맥하거라”

류성과 수명이 조심스럽게 왕 앞으로 다가가 앉아 온몸의 동맥 아홉 군데를 나누어 진맥하기 시작했다. 촌맥을 잡던 자강이 왕에게 물었다.

“촌맥이 위로 치받치고 현삭하옵니다. 혹시 두통도 있으십니까?”

“그렇다. 통증 때문에 며칠 동안 시달렸더니 어제부턴 머리까지 지끈거려서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

“좌촌이 가라앉고 가늘어진 것을 보니 요즘 부쩍 신경을 쓰실 일이 많으신 듯하옵니다”

왕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맥을 마친 자강이 이번에는 망진을 시작했다. 그는 왕의 용안부터 발끝까지 면밀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자강의 시선이 멈춘 곳은 왕의 발이었다. 그의 발가락 끝엔 좁쌀알 같은 뾰두라지가 나있었고 피부는 붉었다. 부어있는 발가락 피부를 만지니 왕은 아프다며 소리를 질렀다. 스승이 망진하는 동안 왕의 용태를 함께 살피던 류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스승님! 손가락에도 비슷한 병변이 보입니다” 

곁에 있던 수명도 질 수 없다는 표정으로 거들었다.

“예. 스승님 전하의 왼손과 오른손 손가락 끝이 피부가 붉어지다 못해 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듣고 있던 상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왕의 병세가 심각하다 여긴 상선의 얼굴이 굳어졌다. 진찰을 마친 자강이 입을 열었다.  

“전하께선 소갈증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기름진 음식과 지나친 주색으로 인해 생긴 병증이옵니다”


자강의 말을 듣던 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불편한 왕의 심기를 감지한 상선 역시 잔뜩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자강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앞으로 당분간은 기름진 음식과 주색을 피하셔야 하옵니다”  

사실 자강의 말이 사실이기는 하나 왕의 눈치를 살피느라 그동안 내의원 의관들 중 그 누구도 대놓고 그 사실을 언급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자강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전하의 병은 괴질이 아니라 탈저이옵니다. 태충, 태계, 부양 맥이 느껴지긴 하나 몹시 미약하고 피부에 좁쌀알처럼 생긴 것을 시작으로 피부 빛이 붉어져 있습니다. 만약 병증이 더욱 진행되어 피부가 대춧빛처럼 붉어지고 검은 기가 퍼지면 부패하기 시작하면서 심하면 다섯 발가락에 모두 퍼지고 발가락이 썩어 떨어져 나가는 병이 옵니다” 

왕이 자강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네가 지금 뭐라 하는 것이냐? 그러면 내 발이 썩는단 말이냐?” 

분노한 왕의 목소리가 대전 밖까지 쩌렁쩌렁 울리자 밖에 있던 어의 김 정한이 기다렸다는 듯 우렁찬 목소리로 고했다.

“전하! 소인 전하의 어의로써 전하의 옥체를 돌볼 의무와 책무가 있사옵니다. 더 이상 저 자의 의술만 믿고 기다릴 수가 없사옵니다. 지금이라도 신이 들어가 전하의 옥체를 살피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때 자강이 입을 열었다.

“전하! 제가 전하를 진료하는 동안 내의원 의관을 들이지 않기로 한 약조를 지켜주시옵소서”


하지만 왕은 자신의 발이 썩을 수도 있다는 말에 온통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러면 네가 고칠 수 있는 것이냐?” 

자강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소인도 치료해 봐야 알 수 있사옵니다”

왕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뭣이? 그렇다면 장담할 수 없단 말이냐?”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왕 앞에서도 자강은 흔들림 없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병자가 의원을 믿지 못한다면 치료의 예후 또한 그리 좋지 못할 것입니다. 저에게 전하의 환후를 치료하도록 허락하셨으면 끝까지 저를 믿으셔야 할 것이옵니다”

둘 사이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자강을 노려보던 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다 내 너를 믿어보겠다. 허나 만에 하나 내 살점 하나라도 잘못되는 날엔 네 목숨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예 전하”


자강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지만 엎드려있던 류성과 수명은 식은땀이 목덜미를 흘러내리고 있었다. 왕은 자강이 치료하는 동안 아무도 안으로 들이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자강은 그제서야 왕에게 자신의 소견을 밝혔다.

“탈저의 예후는 그리 좋지 못하지만 다행히 전하의 병증이 많이 진행되지 않아 지금 치료를 서두르면 나을 수 있습니다. 한 번의 치료로는 효과를 보기가 어려우며 며칠 동안 병증의 경과를 지켜보며 치료하겠사옵니다”

왕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자강을 보았지만 자강은 흔들림 없이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치료를 시작하겠사옵니다. 먼저 삼리, 대추, 위중, 양릉천, 곡지, 합곡, 소해, 음릉천, 삼음교, 대돈에 침을 놓겠습니다. 그리고 관원, 기해, 폐유, 기해유, 팔료에도 침을 놓겠습니다. 침을 놓은 후 기죽마혈에 뜸을 뜨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자강은 류성과 수명에게 부용고를 붙이라 명하고는 침통에서 침을 꺼내 혈 자리를 짚어가며 침을 놓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목표를 항해 정교하고 날렵하게 휘두르는 검객의 칼날과 같았다. 류성과 수명은 왕의 발가락에 부기를 가라앉히고 어혈을 없애기 위해 부용고를 붙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뜸을 준비하려던 수명이 깜짝 놀랐다. 분명 오기 전에 치료에 쓸 도구를 빠짐없이 싸두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뜸 재료가 보이지 않았다. 수명이 당황한 것을 눈치 챈 류성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큰일 났어. 보따리 하나가 빠졌나봐 ”

“뭐라고? 이를 어쩌면 좋은가? 우린 이제 큰일 났네”

이를 눈치 빠르게 알아차린 상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치료를 한다는 의원이 치료에 사용할 도구를 가져오지 않은 것은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가 칼과 활도 없이 맨손으로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침을 다 놓은 자강이 땀을 닦다가 제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고는 바로 상황을 알아차렸다. 수명의 얼굴은 이미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자강이 왕에게 엎드리며 고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무슨 일이냐?”

“궐에 들어오기 전 치료에 사용할 약재를 모두 준비했으나 미처 들고 오지 못한 것이 있사옵니다. 치료에 꼭 필요한 재료이오니 사람을 보내 속히 가져오도록 허락하여주시옵소서”

침을 맞고 통증이 조금 가라앉자 한결 기분이 좋아진 왕은 너그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가 뭐가 있는가? 여기 내의원엔 자네가 필요한 약재는 얼마든지 있으니 없는 재료가 있으면 내의원에 기별하여 가져오도록 하게. 마침 밖에 어의가 있으니 잘 되었네”

그때 자강이 간청했다.

“전하! 전하의 넓은 아량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오나 제가 사용하는 재료들로 전하를 치료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옵소서”

한참 아무 말없던 왕은 마지못해 자강의 청대로 하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두 시각을 넘겨서는 안된다고 못을 박았다.

     

그 소식을 들은 수련도감은 누가 갈 것인지 제비를 뽑느라 난리법석이었다. 처음 자강이 궐에 들어간다고 할 때는 서로 가고 싶어 난리더니 이번엔 서로 미루기 바빴다. 그때 대벽이 일어서더니 생도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자자 이럴게 아니라 한시가 급하니 빨리 자원자를 뽑자구”

찬랑이 손을 들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신입들을 보내는 게 어떻겠는가?”

사실 찬랑은 류성과 수명이 궐 안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소식에 겁을 잔뜩 집어먹었다. 모여 있던 생도들은 그거 좋은 생각이라며 물개 박수를 쳤다. 팔짱을 끼고 있던 강산이 비아냥거렸다.

“궐 구경 가고 싶다던 놈들은 다 어디 가고 신입을 보내래?”

찬랑이 강산을 쏘아보았다.

“그럼 네가 가든가?”

“못 갈껀 또 뭔데?”

찬랑과 강산 사이에 신경전이 팽팽했다. 대벽이 둘을 진정시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자! 신입을 보내자는 의견이 대다수이니 그럼 신입들이 가는 걸로! 탕탕탕!”     


가만히 듣고만 있던 언국과 도겸은 망치로 한 대 맞은 얼굴이었다. 특히 도겸은 입궐해야한다는 사실에 눈앞이 깜깜했다. 제아무리 아끼는 여식이어도 일국의 왕을 능멸한 죄를 피하기는 어렵기 때문이었다. 도겸은 다급하게 강 상궁에게 도움을 청했다. 강 상궁은 분대 화장으로 짙게 얼굴을 꾸미면 주상전하께서도 알아보지 못할 거라 했다. 잠시 후 분대 화장을 한 혜신이 경대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하지만 평소에 화장을 거의 하지 않던 혜신이 분대 화장을 하니 오히려 더 우스꽝스러웠다. 이건 도저히 안 되겠다면서 옷소매로 화장을 쓱쓱 지운 혜신은 도겸으로 다시 변복한 후 먹을 진하게 갈아 붓으로 찍어 콧수염을 그렸다. 강 상궁은 그 꼴은 더 못 봐주겠다고 깔깔거리며 떼굴떼굴 굴렀다. 혜신은 울상이 되었다. 도저히 뾰족한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혜신에게 좋은 묘안이 떠올랐다. 도겸을 기다리던 언국은 흰 천으로 입과 코를 가리고 나타난 도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언국은 이게 무슨 꼴이냐며 의아해했다. 그때 도겸은 나오지 않은 재채기를 연신 해대며 대답했다.

“어제부터 폭풍이 일어 먼지가 많이 날리고 있잖아? 난 먼지가 날리면 코가 간지럽고 콧물이 흐르며 재채기가 나는 병이 있는데 감히 주상전하 앞에서 그런 결례를 할 수 없어 복면 한 거야” 

언국은 도겸의 모습이 여간 낯선 것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궐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두 시각 안에 궐에 도착해야만 했기에 둘은 단숨에 궐을 향해 뛰었다.      


약재를 가져온 도겸과 언국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수명이 자강에게 고했다.

“스승님 제가 나가서 약재를 가지고 들어오겠습니다”

그때 자강이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수명에게 입을 열었다. 

“아니다. 그 아이들도 들어오도록 해라”

그때 상선이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소리 하는 것이요? 여러 사람을 들여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말고 약재만 들이시오”

자강이 상선을 쏘아보았다.

“제가 제자들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신 것은 전하십니다”

왕이 허락했다는 말에 상선의 얼굴이 울그락 붉그락했다. 상선은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강녕전 앞에선 언국과 도겸을 본 상선이 도겸을 보더니 엄한 소리로 호통을 쳤다.

“너는 왜 얼굴을 가린 것이냐? 전하 앞에선 그 누구도 얼굴을 가리면 안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어서 복면을 벗어라” 

당황한 도겸은 어쩔 줄 몰라 숨을 죽인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곁에 선 지밀상궁이 도겸을 재촉했다.

“빨리 안 벗고 뭘 꾸물거리느냐?”

도겸은 당황하여 동공이 흔들렸다. 그때 안에서 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데 이리 소란스러운 것이냐?”


당황한 상선이 얼른 들어가 왕에게 이 사실을 고했다. 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 그는 둘을 안으로 들이라 명했다. 도겸과 언국은 허리를 숙인 채 안으로 들어가 엎드렸다. 언국이 고개를 살짝 돌려 곁에 엎드린 도겸을 보니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때 언국이 황급히 이마를 바닥에 대고 엎드리며 주상전하에게 말했다.

“전하! 이 자는 저와 같은 스승님의 제자이온데 오늘처럼 폭풍이 많이 이는 날이면 먼지가 많아 콧물과 재채기가 쉴 새 없이 나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감히 높으신 주상전하를 진료하는 엄중한 시간에 콧물을 흘리고 재채기하는 무례를 범하고 싶지 않아 부득이하게 복면하였사오니 전하의 넓은 아량으로 허하여 주시옵소서”

언국의 목소리가 말하는 내내 떨렸다. 잠시 침묵이 흐르며 방안엔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수명은 조마조마한 마음에 도겸을 쏘아보며 연신 식은땀만 닦았다. 


언국과 도겸을 유심히 보고 있던 왕은 복면을 벗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다. 언국의 등줄기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위기를 모면한 도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도겸은 목숨을 걸고 나서준 언국이 한없이 고마웠다. 뜸을 놓을 준비를 마친 언국과 도겸은 콩알크기의 뜸봉을 올려놓으면서도 자강이 왕에게 침을 놓는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차례대로 침을 다 놓은 자강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고는 품에서 긴 끈을 꺼냈다. 상선은 물론 왕도 의아했다. 내의원 의관들이 치료할 때는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자강은 왕의 몸을 끈으로 길이를 재고 먹으로 표시하면서 아홉 번째 흉추의 양측 1촌 되는 기죽마 혈에 뜸을 뜨기 시작했다. 도겸은 처음 보는 자강의 치료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두 눈을 부릅떴다. 자강은 왕의 통증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뜸봉을 올리기 시작했다. 침을 맞은 후 여섯 번째로 뜸을 뜨자 왕은 이제야 살 것 같다며 표정이 환해졌다. 시종일관 긴장했던 상선과 지밀상궁도 한숨을 돌렸다. 치료를 마친 자강은 해독제생탕과 양화탕을 처방해 올리겠다 고하고는 왕의 처소를 나섰다. 자강과 함께 대전을 나선 생도들은 얼마나 긴장했는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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