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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이스 Jan 10. 2019

0. 프롤로그 - 지구 반대편으로

언젠가 지구 반대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돌아오는 티켓이 없는 내 생애 첫 편도 비행기였다. 그때만 해도 내가 이곳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얼마 동안 이곳에 머물게 될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 당시에 내가 처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고,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여행의 설렘보다는 '잘 해낼 수 있을까?', '아니. 잘 해내야만 한다'는 부담감이 더 컸다.  


나는 사람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고 믿었다. 하지만 나는 죽을 만큼 나 자신을 바꾸고 싶었다. 

낮은 자존감과 자격지심에 꽁꽁 둘러 쌓여 일을 제외한 사회생활은 하지 않았고, 주말엔 언제나 집에만 있는 나 자신이 너무도 싫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전혀 없었고, 기존에 알던 친구들과도 멀어지기 시작했다. 날이 좋던 어느 토요일, 아빠는 이미 집에 없었고 엄마도 나갈 준비에 한창이다 거실에 누워 TV를 보고 있는 날 보며 말했다. "날씨도 좋은데 넌 어디 안 나가니? 친구도 좀 만나고 하지 왜."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몇 년 전에 입시에 실패하고 일주일 동안 내 방에서 조차 안 나왔던 적이 있더랬다. 그래서 나는 히키코모리 즉 은둔형 외톨이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이후 다시 괜찮아지기 위해 일도 다니고 사람들도 만나며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그럴수록 내 영혼이 더 갉아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점점 세상과 소통하지 않았고, 결국 혼자 남겨진 내가 나 자신에게 지치고 질려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마치 마법의 주문을 외우듯이 간단하고 쉽게 이 모든 것을 멈추고, 내가 어릴 적부터 꿈꿨던 모습의 내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은 내 맘 같지 않았다. 이 거지 같은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끝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지만 겁이 많았다.  


그때 즈음, 우연히 영화 <여인의 향기>를 봤다. 자살 여행을 떠난 알파치노의 마음을 십분 알 것만 같았다. 어릴 때부터 할리우드 영화와 뉴욕이란 도시에 심취해 있던 나로서는 '그래. 어차피 모은 돈도 좀 있는데 뉴욕이나 가보고 죽자' 싶었다. 마지막이라는 절실함, 죽고 싶을 만큼 나 자신을 포함한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바꾸고 싶은 간절함. 그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떠나기로 했다. 

지구 반대편인 그곳에서 진정 나 자신을 바꿀 수 있을지, 내가 원하던 모습의 내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끝이 무엇이든지 간에 시도해보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되던 그 상황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무모한 도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오직 살기 위해 떠난 것이었다. 외국을 가더라도 도피성은 싫다고, 한국에서 최대한 노력해서 뭐라도 이루고 나가겠다고 다짐했건만 결국은 그렇게 허겁지겁 한국을 떠났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계획 없이, 1년 후의 내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할 거라는 계획 없이 딱 1년짜리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지구 반대편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1년 후, 5년 후, 10년 후의 내 모습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항상 가지고 있던 내가 가장 친한 친구에게 '무계획이 계획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처음으로 아무 계획 없이 중요한 결정을 했다. 계획을 세운다고 해서 인생이 그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란 사실을, 되려 그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의 충격과 허무, 슬픔이 너무 크다는 사실을 결국 알아버렸기에 아무런 계획 없이 우선은 살아남자는 마음가짐으로 버텼다.   


뚜렷한 목적지가 없는 삶은 인생의 갈림길마다 선택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올 때마다 딱 한 가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 길을 선택 한 이후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지 그려지지 않는지. 그래서 더 예측하기 힘든 쪽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선택이라는 문제에 대한 답을 고르는 나만의 방법이 되었다. 한국에 남아 예측 가능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내 앞에 어떤 일들이 펼쳐질 줄도 모른 채,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지금, 나는 그때의 선택에 있어 조금의 후회도 없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많은 일들이 있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나 자신을 바꾸고, 다시 꿈을 꾸고, 계획을 세우기에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 타지에서 혼자 살면서 한 없이 무너졌던 순간도 있었고, 외롭기도 했고, 당장 짐 싸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 모든 순간들도 이제는 전부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전보다 훨씬 편한 마음으로, 그 순간들을 글로 써 보려고 한다.   


편도 티켓이 비싸서 직항이 아닌 홍콩 경유 편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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