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으로
이곳에 온 지 두 달째 되던 달에 드디어 방을 얻었다. 위치가 좋고, 혼자 쓰기에 꽤 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내 방 창문에서 도시의 명물 타워(CN타워)가 보인다는 게 맘에 들어 다른 부분은 크게 고려하지 않고 결정했다. 막상 이사를 들어와 보니 방을 보러 왔을 때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방바닥이 화장실 바닥 같은 타일이라 방 다운 아늑함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과는 달리 4월인데도 여전히 눈이 내리고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고, 바닥 보일러 시설이 없으므로 뜨거운 바람이 나와도 여전히 벽과 바닥에서 찬기운이 느껴졌다.
룸메이트들은 나를 제외하고 6명 모두 캐나다 현지 백인 여자애들이었는데 영어로 수다를 나눌 수준이 안되다 보니 가끔씩 주방이나 현관에서 마주칠 때 가볍게 인사하는 정도 말고는 크게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여러 명이 동시에 쓰는 곳이다 보니 주방은 전혀 깨끗하지 않았고 괜히 한국음식을 먹다가 김치 냄새, 마늘냄새 때문에 나를 더 싫어하게 될까 걱정돼 집에서는 3달 동안 누룽지에 김만 먹었다. 아주 가끔씩 라면을 끓여 먹을 땐 냄새 때문에 특히 더 신경을 썼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그땐 오만가지를 다 신경 쓰며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워낙 한국에서 주눅 들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어느 날, 주방 식탁에 앉아 혼자 라면을 먹고 있었는데 마치 할리우드 하이틴 영화에 나올 것 같이 까칠하게 생긴 금발의 백인 여자애가 "넌 냄비채 그렇게 먹니?"라고 말하며 지나갔다. 사실 한국에서 라면은 냄비에 끓여 그 채로 먹는 게 너무나 당연한 건데 외국인 입장에서는 조리도구에서 그대로 음식을 먹는 내 행동이 무척이나 이상했나보다. 그런데 이 일도 지나와 생각해 보니 그렇게 충격받을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나는 그 여자애의 놀라면서도 약간은 무시하는 듯한 눈빛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여러 가지로 쭈구리 상태였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며칠 후, 백인 귀신에게 가위를 눌리는 꿈을 꾸었다. 겨우 잠에서 깨고 나니 놀랍고 무서운 동시에 살다 보니 별 경험을 다 해본다는 생각이 들어 어이가 없었다. '세상에... 백인 귀신이라니.' 한국에선 무서운 꿈을 꾸고 새벽에 깰 때마다 조용히 일어나 자고 있는 엄마 얼굴을 한 번 확인하고 안심한 뒤에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 자곤 했는데 그러기에 엄마는 너무 먼 곳에 있었다.
방의 불을 켜고 엄마에게 연락을 해봤다. 다행히도 시차 때문에 한국은 낮 시간이라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엄마에게 악몽을 꾸었다 말하고 간단하게 대화를 나누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잠을 청했다.
깜깜하고 찬기가 도는 그 방에서 나는 이제 철저하게 혼자라는 사실이 외롭다 못해 무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