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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이스 Aug 30. 2024

4. 퇴사 이유 10가지

지극히 주관적인 Top 10

어느덧 자발적 백수가 된 지 두 달이 됐다. 애초에 오래 일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직이 아니라 백수가 될 줄은 몰랐다. 심지어 한국도 아니고 물가 높은 캐나다에서, 그것도 그나마 집세가 감당 가능한 다른 도시도 아닌 집세 가장 비싼 토론토 다운타운 한가운데서 백수가 됐다. 그리고 내년 5월 전까지 취업 계획이 없다. 앞으로의 백수 생활을 위해 한 번 정리해 보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적어 보는 퇴사 이유 10가지.   


1. 남을 위해 일한다는 것 

약 2년 반을 온전히 나를 위해 일했다. 오래 준비하고, 너무 하고 싶었던 창업을 하고 스트레스와 어려움도 있었지만 어쨌든 내 사업을 한다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 그래서 정리하고 다시 취업 준비를 했을 때, 이 부분이 가장 걱정 됐던 것이 사실이다. 과연 내가 다시 누구 밑에서, 누군가를 위해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래도 한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일단 캐나다로 돌아오기로 한 이상 다른 방법은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내 위로 상사가 없고 바로 대표인 작은 회사에 취직을 했다. 면접을 본 날, 2주 후에 출근하기로 했고 그날 저녁 예전에 같이 일했던 동료가 '다시 생각하라'며 조언을 해줬다. 하지만 그땐 다른 대안이 없었고 일단 출근을 했다. 남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일을 하는 데 있어 하나의 동기를 잃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직 월급과 단순히 경력 기간을 채우는 게 일을 하는 이유가 됐다. 그리고 난 그것이 매우 회의적이었다.   


2. 잘하려고 한 거지 다 하려고 한 건 아냐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 좀 그렇긴 한데 나는 일을 잘한다. 흔히 말하는 '일머리'가 좋은 편이고, 손도 빠르고 일 처리도 빠르며, 무엇보다 오너 마인드를 가지고 일한다. 라멘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손님이 없으면 핸드폰을 하며 노는 게 아니라 젓가락통을 엎어서 닦고, 포스 기를 정리하는 등 계속 일을 찾아서 했다. 성격상 주어진 일을 빠르게 처리했고 그러다 보니 내가 업무가 적은 줄 알았나 보다. 점점 일이 늘었다. 동료가 그만두자 회사에서 후임을 뽑지 않고 그 일을 나에게로 떠넘겼다. 두 가지 업무에 대한 공고를 보고 입사했으나 1년도 채 되지 않아 네 가지 업무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일을 잘하지만 그렇다고 일을 다 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3. 나의 의견은 개나 줘버려라

어느 정도 경력을 인정받아 회사에 입사했다. 대표는 나의 의견을 자주 물어봤으나 나의 대답을 언제나 반박했다. 벽에다 대고 말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 애초에 나의 의견이 궁금해서 물어본 게 아니구나'라는 ㅈ소기업 불변의 진리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본인의 의견이 있던 없던 그냥 묵묵히 시키는 일만 하는 직원들은 나름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게 안 되는 성격이었다. 수많은 단점과 문제들이 눈앞에 보이는데 그걸 바꿀 수 없을 때의 답답함과 무력감은 퇴사 욕구를 자극했다. 나는 나의 의견이 무시되는 것을 지나칠 정도로 싫어하는 사람인데 회사에서는 대놓고 싫어할 수도 없었다.   


4. 인간으로 출근해서 좀비로 퇴근하기 

나의 업무는 절반의 정적인 업무와 나머지 절반의 동적인 업무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책상에 앉아서 기본적인 일을 처리하는 일은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힘들어도 체력적으로는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나머지의 동적인 업무가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때로는 돌아다니기도 하는 일이라 지나치게 에너지를 많이 소모했다. 그냥 '기가 빨린다'라는 게 어떤 건지 깨달았다. '어린 나이도 아니고 체력적으로 이 업무는 힘들다. 내가 다른 업무도 많이 하니까 이건 사람을 뽑으셔라'라고 말해봤지만 '너처럼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불평 말고 그냥 해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퇴근길에 이미 좀비로 변해 집에 오면 바로 침대에 뻗어 버렸다. 몸도 마음도 방전된 느낌이라 퇴근 후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5. 10년 만에 찾아온 비염 

올해 초, 내 면역력이 약해진 탓도 있겠지만 회사 건물의 먼지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 여름엔 차가운 바람, 겨울엔 뜨거운 바람이 나오는 후드가 까맸다. 한 번은 동료가 의자를 밟고 올라가 물티슈로 닦아 봤는데 물티슈가 발로 밟은 것보다 더 더러워졌다. 이후 물티슈 4장을 쓰고 나서야 까만 게 안 묻어 나왔다. 오래 일한 동료에게 물어보니 본인이 아는 한 필터를 교체한 적이 없다고 한다. 내가 사는 집도 일 년에 세 번을 넘게 필터를 교체하는데 최소 10년 동안 필터를 교체를 안 했다고? 미친듯한 재채기가 찾아왔다. 한 번 재채기가 터지면 무려 5-6번을 연속으로 했고, 콧물은 계속 줄줄 이었다. 머리도 아프고 심지어 목소리도 갈라졌다. 그 당시 한 동료도 목소리가 완전히 쉬는 바람에 병원에 가서 폐 사진을 찍었는데 의사가 말하길 먼지가 많은데 오래 노출돼서 그렇다고 했단다. 나의 증상은 약간의 폐렴으로 악화됐고, 퇴사 한 달 후까지 무려 7개월을 넘게 약을 먹어도 낫지 않는 비염 증상으로 고생했다.   


6. 수면 장애와 악몽 

퇴사 직전에 특히 더욱 스트레스를 받았다. 협력 업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일을 더럽게 못 했고, 말귀를 못 알아먹었다. 나이도 많은 분인데 내가 볼 땐 치매 증상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헛소리를 해댔고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본인이 잘못을 했으면 사과라도 해야 하는데 내가 틀렸다고 우겨댔다. (이렇게 말 안 통하고 무조건 우기고 고집부리는 것도 치매 초기 증상이란 사실을 아는가?) 무튼 스트레스로 인해 매일 새벽 4시에 잠에서 깼고, 온갖 개꿈과 악몽을 꿨다. 퇴사를 확정하고 마지막으로 싸웠을 때 도저히 참지 못 하고 이렇게 이메일을 보냈다. '너는 내가 그만둬서 다행인 줄 알아라. 내가 계속 이 업무 했으면 너랑 협력 끊었어.'  


7. 신경질과 짜증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 특히 가까운 사람들에게 신경질과 짜증을 자주 내기 시작했다. 작은 일에도 화가 나는 것은 물론 굳이 무슨 일이 없더라도 항상 날이 서 있는 느낌이었다. 주변에서 "왜 그러는 거야?"라고 물었고 그때마다 '미안하다, 내가 요즘 스트레스가 심해서 그런 것 같다'라고 사과했다. 심지어 아무도 안 만나는 게 나을 것 같아 일부러 혼자 있기도 했다. 


8. 월급날에 느끼는 감정 

대부분의 직장인, 월급쟁이들은 가슴에 사직서를 품고 산다. 하지만 월급날 월급을 보며 참을 것이다. 회사 다니는 게 너무 행복하고, 일이 너무 좋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캐나다는 2주에 한 번 주급으로 받기 때문에 퇴사 욕구가 극에 달하면 돈을 받고 위안을 삼았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통장에 찍힌 월급을 보고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고작 이거 벌자고, 이거 받자고 그렇게 일한 거라니.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전부 쏟고, 엄청 스트레스받으며, 아무리 못 해도 두 명 분의 일을 했다니. 월급날에 오히려 퇴사를 위한 동기부여가 됐다. 일을 하는 이유가 돈과 경력 쌓기였는데 계속 이 업계에서 일할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에 후자는 진작에 사라졌고, 전자의 이유마저 사라지니 더 일할 이유가 없었다. 


9. 이직이라는 보이지 않는 희망 

주변 모두가 다른 일자리를 구한 후에 그만두라고 말했다. 현재 토론토에서 일을 구하는 게 너무 힘든 상황이었고, 물가는 비싸니까. 나 또한 이직을 생각하고 올해 초부터 가끔씩 구인글을 보며 지원을 했는데 단 한 군데도 연락 온 곳이 없었다. 심지어 같은 업계의 경쟁 업체가 부도로 문을 닫았다. 일할 사람은 넘쳐 나는데 일자리는 없었다. 이직을 하려면 너무 오랜 시간 이곳에서 버텨야 할 것 같았다. 도대체 언제 가능할지 알 수가 없었고, 나는 조금도 더 참을 수가 없었다. 


10. 인생에 한 번쯤은 꿈을 위해 올인해도 되잖아? 

경력을 다 버리고 다른 업계로 가서 다시 시작하는 것도 생각해 봤다. 은행이나 항공사가 그것이었다. 처음 입사 할 땐 최저시급 수준이지만 이후 승진이 빨랐고, 안정적이었다. 게다가 나는 일을 잘하니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하지만 난 퇴사를 했고 자발적 백수가 됐다. 요즘은 매일 영화 한 편을 보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예전에는 드라마 공모전만 준비했지만 이제는 신춘문예나 다른 공모전을 위해 단편 소설도 쓰고, 처음으로 웹소설도 쓰고 있다. 심지어 내가 한국이 아닌 캐나다에서 산다는 점을 이용하기 위해 영어로 단편 소설과 단편 영화의 대본도 도전하고 있다. 나는 죽어도 '작가'가 되고 싶다. 내 작품을 세상에 내놓고 싶다. 이렇게 간절한데 출근하지 않고 매일 글 쓰며 꿈을 향해 도전해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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