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주관적인 Top 10
브레인포그를 겪어 본 적이 있는가? 그게 뭔지 몰라서 그렇지 뭔지 알면 아마 꽤 많은 사람들이 아? 싶을 거다. 나는 아빠한테 "너 왜 이렇게 나사 빠진 애 같냐! 정신 좀 차려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게 바로 브레인포그 증상이었다.
브레인 포그란 말 그대로 뇌에 안개가 꼈다는 건데 우울증이나 스트레스로 인해 약간 머리가 멍~한 상태를 말한다. 혹은 항우울제를 갑자기 복용하거나 갑자기 복용을 중단할 경우에 생기기도 한다고 한다. 나 조차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몰랐기 때문에 솔직히 이러다 치매가 오는 건 아닐까 무섭기까지 했다. 내가 겪은, 겪고 있는, 어쩌면 앞으로도 겪을 브레인포그 증상 10가지를 정리해 봤다.
1. 책 한 장 겨우 읽기
나는 책을 매일 읽는 사람인데 도무지 책이 집중이 안 돼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ADHD가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을 만큼 읽고 싶지만 읽을 수 없었다. 정신이 산만해서 무엇 하나에 딱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종이 위에서 글자들이 문양처럼 보였다. 읽히지가 않았다. 한 단어를 보면 그 단어의 뜻은 아는데 쭉쭉 문장으로 읽어 나가지를 못 했다. 내가 모르는 외국어로 된 책을 보면 이런 느낌일까?
2. 주전자 태워먹기
벌써 한 15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 나는 우울감과 스트레스가 만성염증처럼 깔려 있는 상태였다. 이미 엄청난 조울증 증세를 겪은 후, 감정의 롤러코스터는 지났다고 생각했던 때였다. 하지만 여전히 정상은 아니었다. 당시 우리 집은 가스불에 주전자를 쓰고 있었는데 갑자기 삐!!! 소리가 나서 가보니 주전자가 타고 있었다. 부모님은 타 버린 주전자를 버리고 새 주전자를 샀는데 며칠 후 내가 또 태워 먹었다. 소름인 건 주전자를 태워 먹고는 일주일 후에 새 주전자를 또 태워 먹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부모님에게 엄청 혼이 났고, 부모님은 일반 주전자가 아닌 전기 포트를 구입했다. 물이 끓으면 자동으로 꺼지는...
3. 친구에게 같은 질문 반복하기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통하는 게 많을 것 같았고 착해 보였고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에 기쁘고 신이 났다. 그런데 두 번째로 만났을 때 본인은 술을 못 마신다는 게 아닌가. 내가 "진짜?"라고 되물으니 분명히 나한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된 친구와 대화를 할 땐 같은 질문을 두세 번 반복한 적이 있다. 친구가 "너 이 질문 또 하냐.", "내가 저번에 말해줬잖아!"라고 해도 전혀 물어본 기억이 없다. 응? 내가?
4. 결정 장애
'아. 어떡하지?' 그냥 사막 한가운데 떨어져서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야 할지 모르겠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아주 쉽고 간단한 것조차도 결정하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우왕좌왕했다. 남이 결정해서 나를 끌고 가 주길 바라며 결정을 미룬다. 약간 '에헷. 나몰랑~' 상태를 말한다.
5. 멍 때리기
한강에서 멍 때리기 대회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와. 내가 참가하면 무조건 1등인데... 심지어 2등 하고 차이도 심하게 날 것 같은데'라고 생각할 정도로 멍 때리기 전문가가 됐다. 한 때는 내 안의 수많은 생각들과 감정들을 텅 비우고 싶어서 명상을 시도하고, 요가도 해보고 했는데... 이젠 그냥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머리가 텅 비워진다. 한 방에 모든 짐과 가구들이 치워져서 딱 그 방과 공간만 남은 느낌. 내 안에 스위치가 있어서 누가 그걸 OFF로 꺼 버린 느낌.
6. 수면장애
사실 브레인포그는 우울증이나 스트레스 같은 감정 문제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수면 부족으로 인해 생기는 경우도 많다. 나의 경우는 우울증/스트레스 -> 수면장애 -> 브레인포그인 건지 아니면 우울증/스트레스 -> 브레인포그 -> 수면장애인 건지 확실하지 않은데 아마 둘 다의 경우가 복합적으로 일어나지 않을까 싶다.
7. 무기력함
사실 무기력한 게 꼭 브레인 포그의 증상이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하지만 엄연히 무기력함은 브레인포그의 증상 중 하나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떴는데 우울감이 없는데 무기력한 게 포인트!! 본인의 감정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 우울감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침대를 벗어나기 싫은 것. (피곤한 거나 몸 아픈 것 제외)
8. 답장 까먹기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답장을 꼬박꼬박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문자를 받고 'ㅎㅎ'라도 보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이 있다. 문자 알림을 보는 순간 문자를 바로 읽어야 하고, 읽었으면 바로 답장을 보내야 한다. 안 보내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닦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귀찮을 때는 일부러 안 읽는 경우는 가끔 있지만 읽었음에도 답장을 안 하는 경우는 없었는데 브레인포그 기간(?)에는 읽었음에도 답장을 안 보내고, 심지어 내가 그 문자를 읽은 기억이 없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다.
9. 다치기
내가 볼 땐 아빠가 나에게 말한 '나사 빠진 애'라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움직이기 때문에 어딘가에 부딪히거나 박는 경우가 생긴다. 핸드폰을 보면서 걷는 것도 아닌데 멀쩡히 걷다가 넘어질 뻔한 적도 많다. 이런 경우는 발을 몇 번 구르면 진짜 넘어지진 않지만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니까 굉장히 민망하다. 의자나 테이블에 무릎을 박으면 마치 누군가 '정신 차려!'라고 혼내는 것 같고 그 순간은 정신이 바짝! 든다.
10. 귀신 씐 느낌
대망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귀신 씐 느낌인데 나도 태어나서 딱 한 번 경험했다. 앞서 말했듯이 주전자를 태워먹고 두 번째 주전자를 샀을 때의 일이다. 초저녁에 혼자서 티브이를 보고 있었는데 문득 믹스커피를 마시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주전자에 물을 담아 가스불에 올려놓고 컵에 인스턴트 믹스커피를 부어놨다. 한참 후, 번뜩 가스불 생각이 났고 부랴부랴 주방에 가보니 가스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뭐지? 내가 가스불을 안 켰었나?' 해서 보니 커피를 담은 잔이 사라져 있었다. '뭐지? 어디 갔지?'하고 보니까 싱크대에 그 커피잔이 놓여 있었다. 커피잔을 들어보니 심지어 그 안에 커피 얼룩이 남아 있었다. 내가 커피를 마신 거였다. 가스불을 끄고, 뜨거운 물을 붓고, 커피를 마시고 (뜨거우니 원샷도 못 했을 것이다), 다 마신 커피잔을 싱크대에 놓고, 다시 티브이 앞으로 돌아오는 그 일련의 과정들이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너무 허탈하고 심지어 무섭기까지 했다. 집엔 아무도 없었다. 입에서 커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지만 확실하진 않았다.
브레인포그 증상은 크게 말하면 집중력, 주의력, 기억력 저하라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내가 겪은 증상들을 조금 구체적으로 적어 봤다. 그리고 최근에 냄비를 인덕션 위에 올려놓고 장을 보러 나가는 바람에 냄비를 까맣게 태우고 온 집안을 연기로 가득 채운 적이 있었다. 온 집안에 나는 탄 냄새는 약 3주가 지났을 때야 겨우 사라졌다. 나는 이게 마치 치매의 전조 증상 같아서 솔직히 많이 무서웠다. 그리고 우연히 읽은 책에서 이게 '브레인포그'라고 불리는 증상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젊을 때 이런 증상을 종종 겪으면 늙어서는 진짜 치매에 걸리는 게 아닐까 매우 걱정되긴 한다. (치매 가족력이 있음) 난 인간의 병 중에서 치매가 제일 무섭다.
우리 모두 정신 똑바로 붙들고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