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주관적인 Top10
지난 연재 글에서 밝혔듯이 나는 수도 없이 일본어 공부를 결심했고 또 수도 없이 포기했다. 단순히 그냥 공부하기 싫어서 포기한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포기한 이유가 너무 많아서 10가지를 엄선하는데도 고민을 했을 정도다. 가끔 외국인들이 한국어랑 일본어 중에 뭐가 더 배우기 어려워?라고 묻는데 나는 무조건 일본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한국어가 모국어라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나도 외국어로서 한국어가 얼마나 배우기 까다로운 언어인지 잘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내 영국인 친구의 경우 뜻은 몰라도 한글을 읽는다. 유튜브 영상 보고 20분 만에 깨우쳤단다. 일본어는 그것조차 안 된다.
사실 처음에는 내가 아시안이고 한국 사람이라 중국어나 일본어를 할 줄 알 거라고 생각하는 무례한 서양인들이 싫어서 중국어나 일본어는 배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대신 독일어나 불어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영화감독, 작곡가, 소설가가 모두 일본인인 관계로 일본어로 기본 소통 정도는 가능한 상태가 되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 길은 멀고도 험하기만 한 것 같다.
무튼 내가 일본어를 포기한 10가지 이유 (시간 순)
1. 히라가나 열심히 외웠는데 가타카나는 뭐야?
그래! 일본어를 공부해 보자! 히라가나? 귀엽네! 열심히 외워보자! 아이우에오~ 카키쿠케코~
열심히 외우고 다음 장을 넘겼더니 똑같이 생긴 표에, 발음기호에 전혀 다른 글자가 있네? 이건 뭐야.
가타카나? 그래. 외워보자! 열심히 외웠더니 히라가나를 까먹었다. 정녕 내 뇌의 용량은 정해져 있고 가타카나를 외우면서 히라가나를 지운 건가? 그리고 왜 이렇게 비슷비슷하게 생긴 게 많아?
히라가나를 조금 까먹더라도 열심히 가타카나를 외우고 읽으려고 보니 왜 하나도 못 읽겠지? 분명 열심히 외웠는데... 한 글자 한 글자는 읽었는데 붙어 있으면 못 읽겠는 마법. 난독증이 이런 기분인가 봐.
2. 한자도 외워야 한다고?
일본어를 잘하는 한국인들이 가타카나는 일단 그냥 넘기라고 조언해 줬다. 당장 일본어를 공부하는데 가타카나는 크게 필요하지 않으니까 여기서 멈추면 진도가 안 나간단다. 넘기라고? 좋지!!
근데 웬걸. 한자가 왜 이렇게 많아. 그럼 그냥 다 한자로 쓰지 왜 히라가나도 있고 가타카나도 있는 거야. 일본어라는 이 언어의 시스템이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 형용사나 동사 단어를 외우려고 보면 한자+히라가나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히라가나를 변형해서 문장을 만든다. 중국어처럼 아는 단어가 아니면 읽을 수 조차 없는 언어가 일본어였던 것이었다! 차라리 중국어는 한자만 외우면 되지. 다시 가타카나의 악몽이 떠 오르면서 일본어는 공부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3. 근데 그 한자가 단어마다 읽는 법이 다르다고?
그래도 이렇게 포기할 순 없지. 한자? 외워보자. 나는 어릴 때 한자 수업을 들은 밀레니얼 세대가 아니던가!
일단 보면 뜻은 안다. 아비부 한자를 보면 'Father 란 뜻이구나' 정도는 아니까 서양인들보다 낫지 않은가.
게다가 한국어랑 어순도 똑같다. 이 고비(?)만 넘기면 중국어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하며 한자를 외우려고 했는데... 이 한자가!!! 같은 단어인데도 단어마다 읽는 법이 다르단다.
똑같은 한자인데 왜 읽는 법이 달라? 이게 무슨 강아지가 짖는 소리인 걸까.
다시 또 일본어를 잘하는 한국인이 소환됐다. 단어에 따라 어떤 한자는 뜻으로 읽고 어떤 한자는 음으로 읽는다고 생각하면 된단다. 근데 한 한자가 두 개 이상의 소리를 갖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건데!!!
이때쯤엔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일본어에 대한 영상들이 꼴 보기 싫어졌다. 왜 이런 거 미리 알려줘서 사람 겁먹게 하는 걸까.
4. 내가 한자를 그리고 있다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한자 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다. 어릴 때 한자를 공부했고 중학교 과목에도 '한자'가 있었다. 일본어 시험도 낮은 단계에선 한자 위에 어떻게 읽는지 히라가나로 쓰여 있다고 하니까 겁먹지 말고 해보자 싶었다. 일본어 문법책을 펼쳤다. 한자를 외워서도 아니고 본 데로 따라 쓰는데도 내가 뭘 쓰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 획이 짧아서 다시 덧대서 쭉 긋기도 하고, 다 쓰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한자가 되어 있기도 하고... 그때 깨달았다. 나는 한자를 그리고 있구나. 괜찮아. 한자는 어차피 생긴 모양을 본떠서 만든 상형문자니까! 하하하하!!!
5. 일본어 공부를 열심히 해도 Business 일본어는 또 다른 언어 수준이라고?
어딜 가나 '카더라' 통신이 문제다. 인터넷에 자꾸 일본어 관련 웃긴 동영상이 알고리즘에 의해 뜨는데 하나도 웃기지 않다. 일본어는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회사에서 쓰는 업무용 일본어가 따로 있단다. 심지어 일본애들도 취업하면 비즈니스용 일본어부터 배운다고 한다. 단어가 완전 다른 게 마치 다른 세상 같다. 그럼 내가 아무리 일본어를 열심히 해도 일본 회사에 취업하는 건 무리라는 얘기네? 물론 일본 회사에서 일하는 멋진 한국인들도 많다. 하지만 난 멋지지 않다. (흑흑...)
무튼 이렇게 또 동기를 잃고, 배우자 하는 의지가 꺾였다.
6. 동음이의어가 사실 동음이 아니라고?
어느 언어에나 동음이의어가 있다. 한국어로 치면 바람이 분다. 바람을 피우다. (왜 하필 예시가 바람일까)
일본어에도 당연히 발음이 같은 단어들이 있다. 근데 그게 발음만 같지 소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중국어나 베트남어에만 성조가 있는 줄 알았지 일본어도 악센트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단어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 봤다. 예를 들어 '모모'라는 단어를 배웠다. 사람 이름 모모, 닭다리 살 모모, 그리고 복숭아 모모. 일본인 동료에게 '모모'를 사러 갔어.라고 하는데 계속 못 알아듣는 게 아닌가. 모모! 과일! 모모! 결국 복숭아! 모모!라고 하자 그제야 조금 다른 억양으로 "아~~ 모모~~" -_-+...
못 알아들을 정도구나.. 그럼 그것도 또 외워야 되는 거네...?
하하하하!!! 또 웃음이 나왔다.
7. 내가 츠, 쯔, 스 발음이 안 된다고?
내가 일했던 회사 건너편에 일본 녹차... 아니 맛차 가게가 있다. 가게 이름은 '츠지리"
츠지리? 쯔지리? 쓰지리?
일본인의 발음을 듣고 바로 따라 하기를 수 차례. "맞아! 그거야!" 소리를 들었는데 뭐가 맞다는 건지
내가 뭘 다르게 발음한 건지 모르겠다. 뭐 이거 발음뿐만이겠는가. 몰라서 그렇지 안 되는 발음이 더 있겠지.
문자가 어려우면 적어도 소리는 쉬워야 할 게 아닌가. 경상도 사투리 같은 그 어조도 외워야 하고 발음도 연습해야 한다니. 이런 식이면 나 그냥 불어 배워???? (누구한테 협박하는 거야...)
8. 그냥 다 시끄럽다고?
일본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자막 없이도 이해하고 싶다'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대사에 뉘앙스를 제대로 느끼고 싶었다. 일본 소설을 읽으며 '번역본이 아닌 원서를 읽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들이 본인들의 언어로 쓴 글을 번역가의 개입 없이 그대로 흡수하고 싶었다.
그런데 일본어를 조금 공부하고 나니 일본어가 너무 시끄럽게 들린다. 특히 집에서 들리는 일본 예능 티브이들은 왜 이리도 시끄러운지. 그냥 다 꺼버리고 싶다. (추신, 나는 일본인 남자 3명과 한 지붕 아래에 살고 있다.) 친구 파티에 가면 친구가 일본인 여성과 결혼한 관계로 언제나 4-6명 무리의 일본인들이 있는데 이 일본인들은 꼭 자기네들끼리 모여 앉아 일본어로 대화를 한다. 외국인 친구를 사귀고 싶은 생각이 없나? 영어 실력을 늘리고 싶지 않은가? 하는 오지랖이 생기면서 '일본어로 대화를 좀 멈춰줬으면....' 하는 생각까지 하고야 만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오히려 조금 공부를 하고 나니 더 듣기가 싫어졌다. '공부'로 느껴져서 그런가.
9. 히라가나가 눈에 안 들어온다고?
24년 4월, 아직 칼바람이 두는 캐나다를 뒤로 하고 벚꽃 시즌이 이미 지난 일본 후쿠오카로 떠났다. 거의 12년 만의 일본이었다. 아리가또 밖에 모르던 그때와는 달리 할 줄 아는 일본말도 많았고 히라가나도 읽을 줄 알았으며, 무엇보다도 일본인과 함께인 여행이었다. 후쿠오카는 관광객이 많은 도시기 때문에 모든 표지판이 일본어+영어+한국어 가끔은 여기에 중국어까지 표시가 되어 있었는데 내 눈에 쏙쏙 들어오는 건 크기도 작은 영어뿐이었다. (심지어 한국어도 눈에 안 들어옴) 물론 대부분의 안내 표지판은 한자와 가타카나가 많아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정말 '검은 것은 글자요 흰 것은 배경이다' 정도로 밖에 인식이 되지 않았다. 계속 공부를 해서 저걸 읽어 내야 한다고? 표지판은 3개 국어가 아니라 히라가나, 가타카나, 한자, 영어 알파벳, 한글 5개의 문자로 뒤섞여 어지럽기까지 했다. "나는 저걸 다 읽어 낼 자신이 없어."
10. 일본... 에 갈지 말 지 모른다고?
사실 일본어를 배우면 써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일본에 갈 계획이 없는데도 일본어를 배우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사실 외국어는 취미나 자기 계발로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그곳에 갈 계획이 없어도 배우는 경우가 꽤 많다.) 나의 경우 일본에서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 정도 살아보고 싶었기 때문에 위의 9가지 이유를 모두 극복(?)하고도 일본어를 배우려고 했다.
일본 회사는 힘들어도 인터내셔널 한 회사에 취업을 한다거나 공항이나 호텔에서 일한다거나 필라테스를 열심히 배워 강사를 한다거나 한국 식당이나 술집, 아니면 카페를 오픈한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웹소설을 열심히 써서 기본적인 수입을 유지하며 일본에서 산다던가. 방법은 많았고 그건 모두 일본어를 공부하며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했다. 막연한 계획들은 언제나 바뀔 수 있는 법.
일본보다는 싱가포르가 낫지 않을까? 아님 제작사와 계약을 맺고 글을 쓰게 되면 한국에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굳이 일본어를 공부할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10번을 포기하면 11번을 결심하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
100번을 포기하면 101번 결심하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
나는 추진력이 정말 좋은데, 꾸준히 하는 끈기는 정말 부족한 인간이다. 그래서 길고 오래 하기 위해 하루에 30분만 투자하고 있다. 단어를 달달 외우지도, 한자를 깜지 쓰지도 않지만 일단은 꾸준히 하고 있다. (워낙 초급 단계라 가능한 듯)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포기하고 싶은 게 있다면 포기해라! 다음 날 다시 마음먹고 도전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