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주관적인 Top 10
앞서 말했듯이(아마도?) 나는 현재 백수다. 일을 하지 않고 하루하루 사는 삶이 처음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고 나 스스로 '잉여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내 손으로 일을 그만둬 놓고 그만두고 나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게 좀 아이러니하기도 했다. 퇴사 한지 6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벌써 반년이라니. 시간 참 빠르다. 성격상 매일 정해진 시간에 무언가를 하지는 못 한다. 하지만 적어도 매일매일 같은 일을 반복해서 하려고 하고 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내가 요즘 매일 하는 나의 데일리 루틴 10가지를 소개한다.
1. 독서 (feat. 밀리의 서재)
아침에 눈을 뜨면 아이패드부터 켠다. 밀리의 서재나 리디북스 같은 전자책 구독 사이트들이 많이 생겨서 해외에서도 한국 책을 볼 수 있어 참 좋다. 기술의 발달은 점점 물리적 거리를 좁혀주는 것 같다. 무튼 아침에 일어나면 밀리의 서재를 켜서 책을 읽는다. 나는 원래 안 읽은 자기 계발서가 없었을 만큼 자기 계발서에 미친 인간이었는데 요즘은 너무 길거나 어렵지 않은 소설책도 읽는다. 특히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을 많이 읽고 있다. 어릴 땐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란 말을 듣고 콧방귀를 뀌었는데 커서 책을 매일 읽으니 그 말이 진짜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몰랐는데 나는 속독을 한다. 나 스스로 이 속도를 조절할 수도 있다. 그래서 자기 계발서는 굉장히 빨리 읽고, 소설은 그것보단 천천히 읽고, 뉴스 기사는 더 천천히, 공부할 땐 가능한 가장 느린 속도로 읽는다. 그래서 아침 2-3시간 동안 책 한 권을 읽을 수 있다.
2. 첫끼를 위한 요리
책을 2-3시간 정도 읽다 보면 대충 10시쯤이 된다. 10시 전엔 가능한 먹지 않으려고 한다. 10시쯤에 슬슬 침대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간다. 나는 하루에 두 끼를 먹는데 10시쯤 아점을 먹고 4시쯤 점저를 먹는다. 아주 가끔 약간의 허기짐을 참지 못하고 7시나 8시쯤 뭘 먹기도 하지만 이를 지양한다. 살이 15킬로나 쪘고 현재 5킬로를 뺀 상태라 식단이 중요하다. 이때 더 시간이 걸리는 요리를 하는 편이다. 출근하지 않는 백수의 오전은 이렇게나 여유롭다.
3. 커피 내리기 (+Orzo)
웃긴 얘기가 있다. 출근길에 매일 커피를 사 먹는 게 지출이 크니까 코스트코에서 큰 통에 들어 있는 커피를 샀다. 당연히 뜨거운 물을 붓고 바로 마시는 인스턴트커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커피를 내려 마셔야 하는 원두 가루였다. 아니... 난 머신이 없는데? 에스프레소 원두 가루가 아닌 게 그나마 다행이다 생각하며 핸드드립 종이 필터를 사러 마트에 갔다. 갔더니 커피 메이커에 넣는 망을 파는 게 아닌가! 남들은 그걸 사서 커피 메이커에 넣어 커피를 만들겠지만 말했다시피 나는 커피 메이커가 없다. 그렇게 텀블러 위에 그 망을 올려두고 뜨거운 물을 부어 핸드드립을 내리기 시작했다. 아점을 먹고 나면 항상 이렇게 커피를 만든다. 최근에는 이탈리아 보리 가루인 Orzo를 커피 대신 먹기도 한다. 커피랑 굉장히 비슷한 맛이 나서 커피를 줄이는 데 도움을 준다.
4. 요가 수업
아점을 먹고 12시 15분 수업을 듣던가 아니면 5시, 가끔은 6시 수업을 듣는다. 요가 학원은 집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작년 가을에 도전했다가 딱 한 달 다니고 그만뒀는데 다시 돌아간 요가 학원엔 필라테스 수업이 새로 생겼다. 물론 필라테스 기구가 없으니 홈트레이닝 느낌으로 매트 위에서 운동하듯 하는 수업이다. 기본 요가 동작 수업을 들을 때도 있고, 수업 후에 명상하듯 하는 Yin 요가 수업도 추가로 들을 때도 있다. 2주 무제한 수강권이라 초반에는 하루에 이 모든 수업을 각각 한 개씩 총 3개를 듣기도 했다.
요가를 다시 시작한 지 딱 4주가 됐고 2-3킬로 정도 빠졌지만 요가수업의 가장 순기능은 수업 시간 동안 핸드폰을 만질 수 없다는 것. 도파민에 중독된 나의 뇌를 구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는데 요가 수업은 이에 가장 큰 도움을 준다.
5. 글 쓰기
퇴사한 이유? 살면서 한 번쯤은 나의 목표를 위해 올인해 보고 싶었다. 남들은 퇴근하고, 저녁 먹고 자기 전에 3-4시간씩 글을 쓴다던데 난 도무지 퇴근하고 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됐다. '무능'의 상태. 뭔가를 해야겠다는 에너지도 의지도 없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퇴사를 선택했다. 그러니 당연히 매일 글을 써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려고 퇴사했고 이러려고 일을 안 하고 있는데! 처음엔 일을 안 한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죄책감이 들었는데 글을 안 쓰면 그 죄책감은 더욱 심했다. 그래서 그 죄책감을 덜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현재 1월에 있는 공모전을 준비 중이다.
6. 집 상태 체크
나는 집주인은 아니지만, 개뿔 내 명의의 집은 없지만 내 명의의 계약서는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우리나라에서 전세 계약서, 월세 계약서를 쓰는 것처럼 이곳 캐나다 토론토에서 내 이름과 신용, 월세 6개월치를 이용해 방 2개짜리 집을 1년 단위로 계약했다. 그리고 일본인 남자 룸메이트들과 살고 있다. 룸메이트로서 나는 한국인보다 일본인을, 여자보단 남자를 선호한다. 그 이유는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겠다. 무튼 남자애들과 살기 때문에 아무래도 주방이 깨끗하게 관리되진 못 한다. 그래서 내가 수시로 주방 상태를 체크하고, 정리하고, 닦는다. 가끔 청소기 필터도 비우고, 세탁기 청소도 하고, 밥솥과 전자레인지도 닦는다. 덕분에 월세를 남들보다 적게 내고 있어 불만은 없다. 그리고 어차피 혼자 살아도 다 해야 하는 일들이다.
7. 스레드
앞서 말했듯이 도파민에 절여진 나의 뇌를 구하고자 인스타그램 어플을 지웠다. 아직도 많은 친구들이 나에게 인스타로 DM을 보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터넷 브라우저로 가끔 들어가 보긴 한다. 하지만 어플이 없으면 확인하는 횟수가 훨씬 적어진다. 하지만 최근에 시작한 스레드는 멈출 수가 없다. 이 어플도 지워야 하나 고민할 만큼 자주 들어가서 확인한다. 스레드엔 DM 기능도, 실제 친구도 두 명 밖에 없지만 얼굴도 모르는 많은 스친들과 소통하고 있다. 생각보다 유용한 정보를 얻을 때도 많고, 꽤 재미가 쏠쏠하다. 그래도 횟수를 좀 줄이긴 해야 할 것 같다.
8. 30년 지기 친구와의 톡!
어플을 하고, 친구랑 수다 떠는 걸 데일리 루틴에 넣을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는데 어쨌든 내가 매일 하는 일을 적는 건데 Why not? 괜히 제목을 '데일리 루틴'이라고 자기 계발서에 나올 법한 단어로 적어서 찔리긴 하는데 꼭 자기 발전에 도움이 되는 내용만 적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와 매일 카톡을 주고받는 일은 엄청난 스트레스 해소와 힐링, 가끔은 동기부여도 된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면,
나 : 난 오늘 낮에 뭐 먹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 미쳤나 봐. 늙은 건가?
친구 : 원래 크게 성공하는 사람은 자잘한 건 기억을 못 하는 법이야.
나 : ㅋㅋㅋㅋ
이 친구와의 대화는 자존감을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니 어떻게 멈출 수가 있겠는가!
9. 일본어 공부
나는 프로페셔널 한 '작심 삼 일러' 다. 옛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다더니 마치 마법에 걸린 듯 3일째에 포기한다. 유독 다이어트가 그랬다. 식단을 하다가도 삼일 쨉에 포기한다. 아무리 강하게 마음을 먹어도 마찬가지다. 일본어의 경우 공부를 포기한 이유가 수도 없이 많다. (아마 다음 편은 내가 일본어 공부를 포기한 10가지 이유가 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3일까지 하고 포기하고 그다음 날, 그러니까 5일 차가 되는 날에 다시 마음을 먹고 시작한다. 4일마다 결심을 하면 꾸준히 할 수 있다. 가끔은 그 하루가 이틀이 되기도, 삼일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 다시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 일본어 공부만큼 많이 포기한 적이 없고, 또 일본어 공부만큼 다시 마음먹고 시작한 적도 없는 것 같다. 무튼 요즘은 일본어 문법 책을 매일 한 챕터씩 풀고 있다. 요즘은 '나' 형용사의 쓰임을 끝내고 '이' 형용사의 쓰임을 거의 끝내는 중!
10. 하루 일과 적기
최근에 아주 우연히 2019년에 남긴 나의 메모를 본 적이 있다.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것들을 적은 메모였는데 그중 3개를 이뤘더라. 나는 무언가를 리스트로 정리하는 걸 좋아하는데 최근에 유튜브에서 '불렛 플랜'이라는 플래너 정리법을 보고 나도 다시 플래너를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매년 플래너를 사서 To do list (해야 할 일들 리스트)와 Done list (내가 한 일 들 리스트)를 작성했었는데 웬일인지 2년 전, 캐나다로 돌아오면서는 플래너나 리스트를 따로 작성하지 않고 그냥 핸드폰 달력 어플에 중요한 일정과 약속만 정리하고 있었다. 한 때 친한 동생과 일주일 동안 한 일과 다음 주에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한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서로 동기부여를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작은 노트를 하나 사서 매일매일 하루일과를 적은 후에 자기 전에 사진을 찍어 친한 언니에게 보내고 있다. 내가 오늘 하루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는 자기 위로이고 특별히 한 게 없는 날에는 내일부턴 다시 열심히 살아야지 다짐하는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