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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이스 Mar 26. 2019

1-10 일은 미친 듯이, 파티는 더 미친 듯이

1장 워킹홀리데이보다 큰 기회는 없다

앞서 말했듯이 정말 미친 듯이 일했다. 워홀 비자가 끝나고 난 후에 북미 지역을 여행할 예정이라 여행비가 필요하기도 했지만 그 당시 내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한국에서 혹시 모를 미래를 위해 돈을 모았듯이 이곳에서 돈을 벌 수 있는 비자가 있을 때 최대한 벌어놔야 한다고 생각했다. 팁이 아주 잘 나오는 식당이나 술집에서 일하면 돈을 많이 벌기도 하지만 팁이 전혀 없는 일을 하면서 만불 이상 모은 경우는 정말 드문데, 내가 바로 그 드문 케이스가 되었다. 처음 캐나다에 와서 3개월은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았으니 총 9개월 만에, 많이 벌 수 있기로 유명한 호주도 아닌 캐나다에서 천만 원을 모은 것이다. 그리고 이때 모아둔 돈 덕에 이후 컬리지에 가서도 계좌 잔액이 간당간당하는 그런 일은 겪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사실 한국에서 흔히들 말하는 일명 '집순이'였는데, 기존에 알던 친구들과는 생활이 달라 점점 멀어졌고 새로 사람을 사귀기도 쉽지 않고, 무엇보다도 뭘 하든 재미가 없었다. 오로지 출퇴근만을 위하여 버스를 타고, 가끔 부모님과 외식하는 걸 제외하고는 주로 집에만 있었다. 날씨가 아주 좋았던 어느 봄, 주말에 나갈 채비를 하던 엄마가 거실에서 누워서 TV를 보는 나를 향해 "넌 약속도 없냐?"라고 물을 정도였다. 내가 뭘 하던, 심지어 입학한 대학교를 그만두고 입시를 다시 할 때도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엄마였다. 나의 낙은 그저 미드와 TV에서 해주는 각종 해외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보는 거, 그게 다였다. 


그런 내가 캐나다에 와서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마냥 다르게 살았다. 두 군데서 일을 하면서도 각종 친구들 모임, 파티, 토론토 축제를 빠질 수가 없었다. 나에게 캐나다에서 보내는 2014년 8월 16일은 그날 하루뿐이기 때문이었는데, 이후에 줄곧 토론토에서 살 거라고 그때는 상상도 못 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처럼 하루하루가 의미 있었고 소중했다. 

얼마나 파티를 찾아다녔냐 하면 나는 그들을 모르는데 나에 대해 아는 애들이 많았고, 내가 가능한 날짜로 맞추어 파티를 열겠다고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길을 걷고 있었는데 친구로부터 연락이 와서 내가 모르는 그 친구의 친구가 나를 보고 알려줬다며 어디서 뭐 하냐는 연락도 받았다. 나는 파티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가면 그 자리에서 가장 예쁜 여자이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고, 그 자리에서 가장 웃기고 재밌는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하기 때문에 언제나 말을 많이 했고, 농담을 던지고 남들을 웃기며 희열을 느꼈고, 술도 잘 마셨으며, 흥이 오르면 춤도 잘 췄다.


이런 생활을 했으니 집에 붙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언제나 집에 들어가자마자 씻고 바로 잤고, 일어나자마자 바로 또 씻고 나왔다. 늦잠을 잔 적도 없었다. 오죽했으면 집주인 언니가 내가 없어진 줄 알고 내 옷장을 열어본 적도 있었다. 다행히 내 이민가방과 짐을 보고 연락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우스파티에 갈 땐 내가 마실 술만 사서 가면 됐으므로 크게 돈이 들지 않았고, 토론토의 각종 축제들도 대부분 입장료가 없거나 매우 저렴해서 큰돈을 쓰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토론토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까지 외향적인, 사교적인 사람이었다니!!'. 캐나다에서의 1년뿐만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이렇게 열심히, 바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하우스 파티는 언제나 옳다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게 좋았다





친구의 친구들을 모두 부르면 큰 그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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