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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이스 Mar 30. 2019

2-1 한 달간의 여행과 캐나다 국경

2장. 왜 캐나다인가?

2015년 4월 2일. 

1년간의 워킹 홀리데이 (Working Holiday) 비자가 끝이 났다. 일하던 곳에 일할 수 있는 비자가 만료되어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했더니 쉽게 시프트를 정리해 주었고, 비자의 마지막 날인 2일에 마지막 출근을 했다. 


지난 1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심각한 집순이였던 내가 언제 또 캐나다에 있을지 모른다며 하루하루매 시간들을 알차게 보냈고, 대학 입시에 실패한 후 새로 사귄 친구도 없고 심지어 오래된 친구들과도 멀어졌던 내가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심지어 토론토 내의 어학연수생들과 유학생들 모임에서 나름 유명해져 Party Animal 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만약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누군가 내게 다시 이때처럼 열심히 살라고 요구한다면 얼마나 줄 수 있는지 물어보고 꽤 고민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이때가 그립기도 하다.) 


워홀 비자가 끝나기 전에 관광비자를 신청했다. 기본적으로 6개월짜리 비자였지만 잔고가 충분해서 그런지 8개월이 나왔고, 이 비자는 원칙적으로 캐나다 밖을 나가면 끝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어리석게도 비자 만료 날짜인 8개월 후까지 자유롭게 캐나다 입출국이 가능한 줄 알았다. 1년 동안 열심히 일하며 돈을 벌었고,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 돈도 냈으니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 없이 한 달 동안의 북미 여행을 떠났다. 

캐나다에서 밴쿠버로 간 후, 빅토리아에서 페리를 타고 미국의 시애틀로 들어갔다. 배에서 내리자 시애틀엔 이미 어둠이 깊게 깔려 있었다. 지도를 보며 숙소를 찾아 체크인을 하고 허기가 져 숙소 바로 옆에 있던 서브웨이에 가서 샌드위치를 사 먹었는데 캐나다에선 쓰지 않는 1센트 동전들을 잔돈으로 주어 꽤나 당황했다. 이 감격적인 미국에서의 첫 식사는 아직도 내 머릿속에 깊게 박혀 있다. 어릴 적부터 막연하게 미국이란 나라를 동경했고 한때는 머릿속으로 뉴욕 지도를 그릴 수 있을 만큼 나에게 미국은 그저 '언젠가 한번 여행하고 싶은 곳'이 아니라 내 인생의 목표 그 자체였다. '어떻게 하면 미국에서 살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이후 포틀랜드, 워싱턴 DC, 필라델피아를 거쳐 뉴욕까지 여행했다. 한국에 있을 때 '미국이나 캐나다나 북미니까 그게 그거겠지'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워 참을 수가 없을 만큼 미국은 캐나다와 달랐다. 

시애틀에 도착한 그날 밤, 미국은 캐나다와 공기마저 다름을 피부로 느꼈지만 그런 이유 없는 느낌적인 다름이 아니라 실제로 문화, 언어, 사회 분위기, 사람들 등 모든 게 완전히 달랐다. 

그 당시 나는 '이제 뭐 하지'라는 생각에 밤잠을 설칠 지경이었는데, 솔직하게 들여다본 내 마음속은 첫째, 이곳에서 더 살고 싶다. 둘째, 미국이라면 좋겠지만 그건 방법이 없다. 셋째, 지금 당장 뭔가를 결정하고 싶지 않다. 였다. 나름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한지 고작 1년이 지난 후였다. 그리고 그 1년은 내 인생에 어쩌면 다시없을 열정 가득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장 아무것도 결정할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던 한 달간의 북미 여행 후, 내가 내린 결론은 '일단 모아놓은 돈과 비자가 있으니 토론토에서 더 지내며 생각해 보자'였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뉴욕에서 토론토로 돌아오던 버스길에 캐나다 국경에서 잡힌 것이다. 나는 내가 종이로 가지고 있는 관광비자가 8개월 후까지 유효한 줄 알았고, 한국 가는 비행기표가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될 줄 몰랐으며, 또 오랫동안 동경했던 미국이란 나라를 마침내 보게 되어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내게 '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표가 없느냐', '한 달 방값으로 얼마를 내느냐' 같은 질문에 솔직하게 모두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심사하던 이민관이 한 말은 '나는 네가 캐나다를 떠날 거라는 걸 믿을 수가 없다'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때 나는 꿈에 그리던 미국을 본 후(심지어 여행도 아무 문제 없이 재밌었다)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굉장히 기분이 나쁘다는 내 감정을 표정으로 그대로 분출하며 '나 캐나다에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 없는데?'라고 말했다.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채 이민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로 가버렸고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나를 제외한 모든 버스 승객들이 이미 버스에 탑승한 상태였다. 그제야 나는 사태가 심각함을 인지했다.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세계적으로 여권 파워 3위 안에 드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니던가. 그 버스엔 분명 개발도상국가의 여권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이민관은 나에게 작은 사무실 같은 곳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그곳에는 굉장히 자유분방한 (마약도 할 것 같은) 백인 여자가 남자 친구와 함께 의자에 앉아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내가 어떤 상황에 놓인 건지 실감이 났다. 나는 다른 이민관을 만났고 거의 같은 질문들을 받았지만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상냥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러자 이민관이 '너 이제 더 이상 캐나다에서 일 못하는 거 알지?'라고 물었고 그제야 나는 내가 워홀 비자를 가지고 일을 했다는 기록이 오히려 더 그들의 의심을 샀음을 알게 되었다. '나 일 너무 많이 해서 이제 진짜 일하고 싶지 않아. 번 돈으로 여행 다니고 한국 갈 거야'라고 대답했더니 여권을 돌려주었고 나는 무사히 토론토행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이 일로 인해 나는 '미국보다 별로네'라고 생각했던 캐나다에 사실은 몹시도 더 살고 싶음을 깨달았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면 더 하고 싶어 지듯이 나를 캐나다란 나라에 못 들어오게 하자 더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결국 '어떻게 하면 캐나다에서 더 있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여행 중 갔던 중국식당에서 받았던 포춘쿠키로 부터






밴쿠버. 혼자 떠난 여행은 언제나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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