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래이스 Jul 22. 2019

애증의 관계(1)

한국에서 

기다리다 미쳐버리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간절하게 출국 날만 기다렸던 이유는 안 좋을 데로 안 좋아진 내 몸상태 때문도 있었지만 5년 동안 많은 일을 겪으면서 이제 이 곳과는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사랑과 전쟁'을 방불케 했던 긴 연애가 끝난 느낌이었다. 그것도 끝난 관계임을 뻔히 알면서 어쩔 수 없이 매일 얼굴을 봐야 하는 상황이라 깔끔하게 끝내지도 못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관계를 유지하며 시간낭비하는 것 같은 상황이랄까...


이 당시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내가 했던 말은 '이 도시와 나는 끝났어', '나는 이 지긋지긋한 도시를 이제 떠나겠어'였다.  

렌트는 매년 말 같지도 않게 오르고 갑자기 올려버린 최저임금 때문에 물가도 많이 올랐지만 내 연봉은 그대로였다. 굳이 일한 시간을 나눠서 계산해보니 팁을 받는 레스토랑 알바보다도 적은 액수일 것이 분명했다. 매일매일 내 삶과 시간을 이 추위에 파묻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하루라도 더 이 곳에 남아 있고 싶지 않아 졌다. 


이 곳에서 살고 있는, 앞으로도 계속 살 계획인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나는 이 도시가 싫어서 곧 떠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이 도시에 정이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미운 정도 정이었나 보다. 

동남아 배낭여행 중 캐나다 사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5년을 살았던 곳이고 캐나다식 영어가 더 익숙하니까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다양한 국적의 배낭여행자들과 승합차를 타고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데 뒤에서 "얘는 캐나다에서 왔어"라고 말하는 게 들렸다. 슬쩍 고개를 돌려 확인해보니 캐나다에서 왔다는 그 남자는 미국 농구팀 유니폼을 입고 있었는데 토론토 농구팀의 엄청난 팬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를 보자 왠지 인사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이후에도 캐나다 사람이라고 해서 반가워하는 게 아니라 토론토와 같은 주에서 온 사람들을 반가워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사실 캐나다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영토를 가지고 있고 동부와 서부는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른 점이 상당히 많은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우연일지도 모르겠지만 밴쿠버와 같은 서부에서 온 사람들하고는 확실히 덜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어디에서 왔냐는 질문을 받으면 항상 한국에서 왔다고 말한다. 영어로 어디서 왔냐는 질문은 곧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뜻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왔다고 하는 것인데 간혹 사람들이 그런데 왜 영어를 잘하냐고 되물으면 그제야 캐나다에 산다고 말한다.

한 번은 베트남에서 5-6명의 여행자들과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중 한 여자가 대뜸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나는 갑자기 내게만 그런 질문을 하는 게 의아했지만 한국에서 왔다고 답했고, 이후 이런저런 여행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여행이 끝나면 캐나다로 돌아간다고 했더니 내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던 그 여자가 몹시 반가워하며 캐나다 어디서 사냐고 물었다. 토론토에서 산다고 했더니 자기도 토론토 산다며, 내 영어를 듣고 그쪽 출신인 것 같아 물어본 거였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나 조차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싫다고 떠났지만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어떤 식으로든 내게 영향을 주는 그 도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토론토 농구팀의 결승 경기 소식에 함께 기뻐하며 점점 이 도시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 다음에 계속 )


 


  

매거진의 이전글 익숙한 듯 낯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