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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혜 Apr 28. 2019

이 구역의 톡 쏘는 방송작가 되는 법

'계약서' 입에 올리면 됩니다


"또박또박~할 말 다 하는 스타일이구나?"


"아주 톡 쏘는구먼"



방송작가로 살아오면서 어쩌다 한 번 씩 들었던 말들이다. 이 문장들만 놓고 보면 단단한 월동무 같은 성정이 연상되실 터. 나도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살캉살캉 삶은 무 같았던 시절도 있었다. 불과 십 년도 되지 않았는데 돌아보니 아득하다. 내가 어쩌다 '이 구역 톡 쏘는 방송 작가'로 거듭났는지 썰을 풀어볼까 한다. 마침 백수가 되기도 했고.




나이 서른에 화창한 꿈을 안고 방송 작가로 전직했다. 하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처럼 다른 업계에 있다가 방송작가로 전직을 하게 되는 경우 대부분 '충격과 공포의 3단계'를 거치게 된다.



"선배, 저 계약서는 언제 쓰나요?"


"계약서? 그런 거 쓰나?"



이게 1단계.



"그럼 급여는 어떻게 산정되는 거예요?"


"아니 그게... 다음달에 나와보면 알 거야"



이게 2단계다. 자, 한 단계만 더 버티면 된다. 힘을 내자.



"그래도 얼마인지 대충 알아야...."


"아니 거 참 말하기 민망한데....%$#정도로 알고있어"



마지막 3단계다. 선배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들어보니 과연 말하기 민망한 액수였다. 자, 여기까지 버텨냈다면 방송작가로 첫 발을 무사히 내디뎠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나는 운명을 얌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만 질문을 던지고야 말았다. 페이(작가들의 급여는 월급, 연봉 대신 페이라는 단어가 주로 쓰인다.)는 매년 오르는 거냐고 감히 물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말이지 궁금했다. 나는 고양이 사료도 사야 하고 가끔 외식도 해야 하는데... 입에 풀칠만 하게 생겼으니. 그러자 정규직 선배가 온화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너는 또박또박~할 말 다 하는 스타일이구나?"



그렇게 안면 트고 얼마 안 되는 시점부터 나는 톡 쏘는 그 작가, 내지는 할 말 다 하는 걔로 통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새로 들어온 작가가 계약서를 쓰자는 말을 꺼냈다는 것 자체가 꽤 이슈였을 것이다. (물론 계약서는 쓰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방송작가로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해 준 곳이기에 은은한 고마움이 남아있다. 비록 그들은 나를 돌아이로 반추할지라도...




이 일화 이후로도 계약서와 페이는 방송작가 일을 하면서 가장 큰 숙제가 되었다. 꼭 풀고 싶은데 내 힘만으로는 풀 수가 없는, 반드시 상대방의 공조가 필요한 숙제. 이 숙제 앞에서는 톡 쏘는 그 애가 되어도 어쩔 수 없었다. 텔레파시로 '계약서 쓰나요?' 물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최대한 신중하게 물어도 계약서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상대는 경직되곤 했다. 좀 억울한 마음도 든다. 나는 방송작가라는 일을 오래 하고 싶어서 꺼낸 이야기들이었는데. 좋아하는 일을 지속 가능하게 하고 싶다는 것은 누구나 품는 고민 아니었나.


이 글을 마무리하면 나는 바로 잠자리에 들까? 아마 방송작가 구인구직 사이트를 클릭할 것이다. 신형철 평론가가 <몰락의 에티카>를 통해 ‘나는 문학을 사랑한다. 문학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어쩔 수가 없다’고 고백한 것처럼 나는 원고를, 라디오를, 라디오 너머 듣는 이들을 수줍게 연모한다.


내 연모하는 마음은 곧 약점이다. 계약서도 페이도 이 약점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아이러니하게도 방송을 좋아해서 계약서를 쓰지 않고도 일을 한다. 알면서도 좋아하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지고 들어간다. 나 같은 전현직 방송작가들이 얼마나 될까. 문득 궁금해지는 밤이다.


그래도 언젠가 방송작가들이 '지지 않고'도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오기를. 기왕이면 내가 늙기 전에 오기를. 그때까지 이 구역의 톡 쏘는 방송 작가들이 속속 등장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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