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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숲풀 May 07. 2022

또다시 염소가 되었다(1)

결핍 욕구 채우기 두 번째(1)


지속되는 무기력을 이겨내고자 '우울증 회복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유튜브 촬영에 지원했다.

정말 그 덕에 무기력에서 벗어났고 촬영 후 관계자분들의 응원과 칭찬도 받았다.

하지만 정작 나는 실패라고 생각했다. 왜일까?




내 안의 염소를 다시 마주한 날


지난주 주말, 공모전에 서류 합격을 했다.

합격 발표 바로 다음날 저녁에 멘토링을 받았고, 다음날 오전 9시까지 발표자료를 제출해야 했다.

사실 합격할 거란 생각 없이 다소 가볍게 응모한 터라 미리 방대한 자료를 준비해 두지 못했다.

게다가 역할 분담이 아주 잘 되어 있는 타 팀과 달리 나는 혼자였다.

나름 밤을 새워 준비했지만, 앞서 말한 그럴싸한 핑계 덕에 불안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대본도 준비되어 있고 비대면 발표라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밀려오는 불안감을 억누르고 '괜찮아. 1차 합격도 생각지도 않은 건데 2차는 바라지도 않잖아? 그냥 경험이야. 이건.' 하며 시작했다.

'자존감 스피치'에서 배운 대로 불안을 잘 감추고 매끄럽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관계자의 제지가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PPT를 원격 화면에 공유하여 진행 중이었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표자님. PPT를 쇼 보기로 하시면 공유 화면에서는 화면이 멈춰 있어요. 죄송하지만 쇼보기를 멈추고 진행해주시겠어요?"

갑자기 생각지 못한 상황에 놓인 것에 더불어 준비했던 애니메이션 효과를 전혀 보여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까지 겹치자 저만치 감춰두었던 불안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 상황을 정리하면서 주어진 5분 중 얼마간의 시간이 소요되었는지 몰라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점점 생략하게 되어버리며 '망했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목소리는 갈수록 더 염소처럼 떨리고 있었다.

때마침 노트북 화면에 '배터리가 부족합니다.'라는 문구가 떴다.

PPT 쇼 보기를 멈추는 과정에서 충전기가 빠져버렸지만 모르고 있던 탓에 발생한 사건이었고 그렇게 불안은 정점을 찍었다.

발표를 다 마치지 못할까 봐 할 말도 생략했는데 배터리 부족으로 꺼져버리면 그것은 최악이었다.

급하게 발표를 마치고 확인하자 남은 시간은 몇십여 초나 있었다.


2차 합격자 발표 명단에 내 팀명은 당연히 없었다.

내게 남은 건 성장으로 인해 사라진, 혹은 충분히 감출 수 있는 줄 알았던 발표에 대한 불안감뿐이었다.


그저 '실패'의 한 사건이라 생각했다.


유튜브 촬영은 공모전 합격 전에 이미 정해진 건이었다.

물론 정말 괴로웠다면 취소할 수도 있었겠지만, 다행히도 가면을 쓰고 말하는 컨셉이었고 공모전처럼 합격 여부가 나뉘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진행 상황에 따라 추가 질의응답은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인 질문과 답의 내용은 모두 준비해 둘 수도 있었기에 한번 더 부딪혀 보고픈 마음 또한 컸다.


촬영 장소로 가기 전까지 느낀 긴장감은 꽤나 감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진행자분의 말씀 한마디에 또 당황하기 시작했다.

"가면을 쓰면 대본이 잘 안 보일 수도 있는데 괜찮으세요?"

질문만 보고 대답할 수 있을까 싶어 대답 부분을 가리고 연습했지만 머리 이미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촬영지에 도착해 대본을 보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긴장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역시나 하고픈 말을 다 하지 못한 탓에 진행자분은 오해가 섞인 질문을 하셨고 긴장은 이내 불안으로 바뀌며 목소리는 또 떨리고 있었다.

두 번째 촬영에서 염소 같은 목소리는 꽤나 줄었지만 하고픈 여러 말들을 또 다 하지 못하고 말았다.


'실패'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진단명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번의 두 경험을 엮어 학창 시절의 오답노트처럼 '인생의 실패 노트'로 만들고자 했다.

오답노트는 틀린 문제를 모아 다시 써 보고 정답을 찾아 작성하는 과정에서 왜 그 문제를 틀렸는지 정확하게 짚고 이해하면서 다음에는 정답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왜 목소리가 떨리는지, 떨리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보다가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정신과로부터 정식으로 받은 진단명은 '번아웃 증후군'과 '우울증'이었다.

'불안장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나만의 회복 매뉴얼을 만들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증상들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기에 발표나 보고에 대한 공포도 그 증상 중 하나겠거니, 곧 사라지겠거니 해버리고 말았다.


오늘 새롭게 얻은 나의 진단명은 '사회 공포증'.

'인생 클레임 처리 매뉴얼' 2부로 '자존감'을 관리하기에 앞서 또 하나의 결핍 욕구를 발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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