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하기
내게는 고통을, 상대에게는 오해를 부르는 잘못된 거절
경영악화에 따른 권고사직으로 회사를 나오게 될 즈음, 먼저 퇴사한 동료에게 연락이 왔었다.
"잘 지내시죠? 다름이 아니라 저 지금 A사 다니는데 OO님 업무에 적합한 포지션이 공석이라서 함께 일할 생각 있으신지 연락드려요!"
퇴사를 앞두고 있었고 A사 규모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절한 스카우트 제의였다.
그러나 그 자리는 내게 맞는 자리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의 나는 클레임과 관련된 업무에 공포가 가득했고 다시는 이 일을 하지 않겠노라 다짐의 다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막연한 상상 외 구체적인 계획은 전혀 없었음에도 말이다.
당연히, 그러나 힘들게 겨우 거절했다.
좋은 조건이라고, 누구한테 함께 일하자는 말 자주 하는 사람 아니라며, 힘든 부분은 다 맞춰주겠다는 동료의 말이 들려왔다.
물론 진심인 것도 알고 있었고 정말 고마웠지만 여전히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에 아주 구구절절이 이유를 갖다 붙이면서 다시 거절했다.
"나는 이제 이쪽 일을 할 생각이 없어요. 그럼에도 꼭 내가 가야만 한다면 솔직히 나는 이 몇 가지 요소가 충족되어야 할 것 같아요. 연봉 얼마, 업무 중 이 부분 제외, 입사일은 언제로. 미안하지만 정말 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이런 조건이라도 맞아야 눈 딱 감고 갈 것 같은데 기분 나빴다면 정말 너무나 미안해요."
정말로 그런 조건이라도 있어야 갈 마음에 생길 것 같아 한 말이었다.
하지만 말을 마치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간단명료하게 거절하는 게 낫지, 기분 나쁠 걸 알면서 왜 그렇게 말했을까"
역시나 동료는 그냥 거절 의사가 낫겠다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과한 요구인 걸 알면서 그러냐고 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일단 지원하고 면접이라도 보기를 요청해오니 더는 거절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원치 않으면서도 급히 지원서를 작성, 제출했다.
구구절절한 핑계보단 차라리 솔직하기
지원일로부터 3일 후쯤으로 면접 일정이 잡혔다.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하기 싫은 일을, 아니 무서운 일을 해야 한다는 걱정과 함께 '만약 이렇게까지 해놓고 거절하면 엄청 싫어하고 비난하려나?'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차라리 내가 부적합하다며 그쪽에서 거절하길 바라며 고통의 3일을 보냈다.
면접날이 왔다.
앞서 말한 조건의 거의 대부분을 이야기했고, 간 김에 그 동료를 만났다.
대체 뭐가 그렇게 싫어서 거절했냐며 그냥 솔직히 말해달라는 동료의 말.
오해를 살 바에는 그냥 다 말하자는 생각으로 털어놓았다.
"이전 직장에서 큰 트라우마가 생겼어요. 그것 때문에 말할 때 심히 긴장하고 목소리가 떨리는 거 아마 봤을 거예요. 그래서 이 업무, 아니 그냥 회사생활 자체가 좀 힘들어요.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늦기 전에 새로운 거 해보려 했던 거예요. 이 상태로 입사해봤자 대리님한테 민폐나 끼치거나 심하면 도망가버릴지도 몰라요. 그럴 인간 데려가서 뭐해요. 그리고 그래서 이 정도 조건은 되어야 공포 누르고 가겠다 싶어서 그렇게 말해던 거예요."
반은 체념한 듯한 모습으로 날 위로하면서도 그래도, 그러니까 많이 도울 테니 한 번만 더 고려해달라는 말을 듣고 집으로 왔다.
이후 이틀쯤 지났을까?
동료로부터 긍정적인 말이 오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더 괴로웠다.
그 정도 조건이어도 나를 뽑는다는 건 그만큼 의 책임감이 더 더해진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잘할 자신이 더더욱 없어졌다.
결국 5일 내내 괴로워하다 동료에게 안 되겠다 이야기하고 회사에도 지원 철회 의사를 밝혔다.
내 조건을 맞추기 위해 내부 회의를 거듭하고 있었는데 아쉽다는 면접관의 대답이 돌아왔다.
전혀 아깝지 않았다.
다만, 끝까지 질질 끌다가 갖은 이유로 거절하는 나를 동료가 싫어할까 봐 그 걱정만 있었다.
거절이 곧 단절은 아님을 명심하기
약 일주일 후.
그 포지션에 구인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문제가 터졌다며 도움을 요청하는 동료의 전화를 받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고 그 이후로도 간단하게나마 도움을 요청받았다.
무례하지도, 반감을 가진 목소리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포지션의 업무가 이렇게 힘들다는 걸 체감했다는 듯, 약간은 내 마음을 이해하는 것 같은 마음도 보였다.
그 이후 몇 개월이 지난 최근까지 더 이상 연락이 없어서 '그땐 급해서 어쩔 수 없이 연락한 거지 사실은 내가 싫어졌던 게 맞는 걸까?' 하는 생각도 솔직히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제 생각을 달리 하려고 한다.
'그저 그 포지션에 적절한 사람이 나타나 원활히 돌아가고 있으니 굳이 연락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닐까?', '어쩌면 고통스럽다는 내게, 다른 일을 준비한다는 내게 계속 연락하며 묻기가 미안한 것일 뿐이지 않을까?'로 말이다.
직장 동료 시절 나쁜 사이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친밀하지도 않았으니 이유 없이 연락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유가 있어야만 연락하는 것 또한 미안했을지도 모른다.
나도 연락한 적 없으면서, 그리고 거절 후 나쁜 의사를 비춘 적도 없는데 굳이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자존감이 낮으면 거절하기가 어렵다.
내가 거절하면 날 싫어할지도 모른다거나 상대방의 힘든 상황을 외면해버리는 기분에 쉽지 않다.
그러나 사실 대부분의 상황에서 부탁을 해오는 상대방은, 내가 희생해 가면서까지 돕기를 바라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만약 희생을 바랐는데 거절을 당해 나를 비난한다면, 그것은 그 자의 잘못된 판단과 예의 없는 행동이 문제이지 결코 나의 문제가 아니다.
거절을 당할 때도 같은 생각으로 대하면, 상대를 미워하거나 서운해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부탁이 민폐라 느껴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다 번아웃이 오지도 않을 수 있다.
자존감을 지키려면 건강한 거절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