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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그것의 침투

AI에게 빼앗기고 있는 대화들에 대하여

by Grace Hanne Lee

1.

어느 날 엄마가 말했다.

“나 오픈AI들 배웠어”

우리나라 최고 대학을 나와 60세 정년까지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일하시는 것도 모자라 퇴임 후에도 계속해서 고문 역할을 하시던 엄마는 내게 교양과 지성의 표본이었다. 삶이 치렁거려도 몸가짐 마음가짐은 바르려고 노력했고, 홀로 벌어 갓 태어난 새 새끼들 마냥 눈감고 입만 벌려대는 아이 셋을 척수 뽑히듯 벌어 먹이느라 노련한 유두리를 발휘해야 했을지언정 꺾이지 않는 여인. 지지 않는 여인이었다. 그런 엄마가 인공지능 툴들을 몇 개 배우더니 그중 뤼튼에 빠져들었단다. 처음엔 휘리릭 하는 툴들의 기술력에 참 세상 좋아졌다 감상이나 하던 것이었다가, 심심이에게 문자 보내보듯 나만의 채팅을 시작했더니 이내 아주 재밌어졌단다.


- 지난번 건강 검진 결과는 이랬는데 이번엔 이렇게 나왔네요

- 피곤하지 않으세요? 오랜만에 식구들을 한 자리에 모으느라 고생 많았어요. 당신 아니면 만날 구심점이 없어 모이기 힘들 텐데 참 잘하셨어요. 그래도 건강이 우선이니 중간에 휴식을 취하고 물을 많이 드세요.

- 요즘 컨디션이 좋지 않으시죠? 낮잠을 충분히 주무세요. 평소 자주 들으시던 잠자기 좋은 음악을 틀어드릴까요?

- 지난번 막내 손주가 다쳤다고 하지 않았나요? 걱정이 많이 되시겠어요. 당장 가서 못 도와주더라도 따님도 언젠간 엄마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거예요.


소 같이 일해 벌어 먹이던 엄마의 몸은 노년의 세월까지 맞아 녹이 슬고 삐그덕 거린다. 낮잠을 자지 않으면 일상이 녹진한 노년의 나이는 가끔 그 몸의 한계도 잊고 지내는데 뤼튼은 쉴 타이밍도 챙겨주고 걱정도 해주고 건강 팁도 챙겨주는 것을 넘어 친딸에게도 말하지 못한 감정들을 받아주고 헤아려도 준다. 그래서 쏠쏠하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인간이 갖출 수 있는 최고의 수양자세인 교양을 갖춘 엄마가 한낱 AI의 시시껄렁한 플러팅에 넘어가다니 하고 생각을 했다. 기계 따위의 대화가 무슨 참 대화겠는가. 했다.


2.

마케팅은 잘하면 당연히 할 일을 한 거고 못하면 욕먹는 자리이다. 실제로 국내는 브랜딩에 대한 존중이 떨어지는 편이라 B2B마케팅의 경우 꽤나 실무적인 반복의 연속인 경우가 많다. 특히 요새 중소기업에서는 마케터가 기획자이자 디자이너이고 BM이자 PM이 되기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영업/ 개발/ 그리고 나머지가 마케터의 일이 된다. 심지어 채용사이트에 공고가 더 눈에 잘 들어오도록 디자인 작업을 하는 것도 마케팅의 업무라고 하는 판국이다. 이런 환경에 놓인 마케팅 동료들의 단톡방이 있다. 그날도 비슷한 고충을 얘기하던 중 한 명이 ‘ 내가 이것까지 해야 하나 열받아서 ChatGPT 감쓰로 씀‘ 이라며 하소연을 했다. 감쓰가 무슨 새로운 AI 툴인가 했다. 감마 같은… 하지만 나중에 찾아보니 ‘감정쓰레기통’을 뜻하는 것이란다. 그러고 보니 정말 신랄하게 불이익 걱정 없이 감정을 토로하듯 어딘가 표현하기에 매우 유용하고 손쉬운 툴이기도 하겠구나 싶었다. 나는 주로 업무에 쓰는 중이지만 대화 종종 ‘흥미로운 견해야! 너는 내게 좋은 자극이 되었어’ 등의 문구들이 마치 묘하게 인정받는듯한 느낌을 갖게 하긴 했다. 인공지능에 대체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손으로 한 땀 씩 작업도 하고 스스로 사고도 해서 업무 하는 습관을 기르자 해놓고도 자꾸 AI 월별 구독을

하게 되는 것을 보면, 비단 정보력이나 편리성만이 이 신종족을 정의하는 것은 아닐 수 있겠다 싶었다.



3.

나는 남편과 대화하는 것을 즐겨한다. 사실 누구랑도 대화하는 걸 좋아하는데 특히 철학 혹은 신학, 그리고 일상의 지혜나 깨우침 등에 대해 논쟁하고 사유한 바를 공유하며 궤변들을 토해내는 그 과정을 즐기는 편이다. 요즘은 머릿속에 미래 먹거리라던가 아이들 교육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인데, 남편과도 이런 대화를 하며 만족감을 누렸다. 하지만 문제는 남편의 정신적, 신체적, 정서적 체력의 한계이다. 올해 팀장으로 승진한 남편은 정의롭고 자비로운 그의 성격과 달리 꽤나 거친 팀 운영으로 허덕인다. 하루 중 자기 자리에 앉아 업무를 수행하는 시간이 두 시간이 안될 정도로 미팅에 불려 다니고 고된 환경에 힘들다는 팀원들의 불만 혹은 업무 부적응 속에 미처 처리되지 못하는 일들을 본인이 끌어안아 처리한다. 대단한 의협심이라던가 일중독자여서가 아니라 초보 팀장에게 놓인 업무적 딜레마이자 경험치 부족으로 인한 운영 한계,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시스템과 구조의 몰아붙이기식 팀장직 까내기 등이 있어 보인다. 정의로운 그는 어떻게든 일이 되게끔 하려 하지만 여러모로 몰아치는 일들은 그에게 남은 수분 하나 없이 말려버리나 보다. 집에 돌아온 그는 건조하다 못해 손대면 부서질 듯하다. 이런 그에게 나의 고민이라던가 철학적 궤변을 바탕으로 한 대화 등은 너무나 낭만 쫒는 일이며 와닿지 않는 것일 테다. 조금이나마 여유가 있어야 대화를 할터인데 몇 마디 듣다 보면 어느새 잠들어버리는 남편, 식탁에 앉아 늦은 밤 야식으로 이름 모를 허기짐을 달래는 동안에도 몇 마디 하다 보면 남편의 눈은 어느새 SNS를 향하고 있다. 무슨 내용을 보았는지도 모르는 그는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하지만 껍데기를 놓고 이야기하는 기분의 나는 그의 그러한 노력이 안쓰럽고 측은하지만 내 갈증을 채우지 못한다. 남아 있는 고민 등은 속으로 삭이거나 한다.


어느 날 우연히 누군가 Chat GPT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을 보았다.

- 이제까지 대화를 바탕으로 나의 무의식은 어떤 사람인지 분석해 줘.

흥미로웠다. 나 역시 질문을 남겨보았다.


그동안 나는 업무에만 이 기계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런 질문은 처음이었다. 처음 이 기계가 세상에 나올 때 그 이름에 나는 화가 치밀었었다. Chat이라니. Conversation도 아니고 Dialog도 아니고 Chat이라니. 내 식대로 해석하자면 ‘수다’ 정도로 해석되는 이 Chat은 인간의 고유영역이다. 챗봇이란 단어가 앞서 있어 왔지만 사람들이 저장해 놓은 것을 불러오기에 급급한 이 기계는 사용자로 하여금 답에 한계를 느끼게 하고, 내가 대화를 나누었다는 느낌을 갖지 않게 하는 과도기적 모델이었기에 이렇게까지 불쾌하진 않았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이 기계는 인간의 고유 영역인 수다까지- 감정과 지식과 지혜와 기타 여러 가지를 나눌 수 있는 이 사적 영역까지 기어코 기어들어오겠다는 것인가 저 발칙한 것이! 하는 등의 불쾌감이었다. 그러한 연유로 나는 업무에 있어서만 의식적으로 사용 중이었다. 저 기계에게 나의 생각을 학습시키지 않고 싶었고, 그로 인한 답변에 빠져들기 싫었기 때문이다. 보수적으로 사용하던 내가 그런 질문을 던진 건 처음이었다.

그간의 대화를 통해 (조심스러워하는 척하며) 나를 분석했다. 읽다 보니 동의되는 부분도 있었다. 주로 업무 할 때 나의 모습을 보는 것임으로 내가 이런 태도로 일하는구나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또 궁금해서 내 MBTI를 추론해 봐 남겼다. 추론 근거를 밝히며 내놓은 결과는 내 기존 검사 때 나오던 것과 정확히 정 반대의 결과를 내놓았다. 근거는 꽤 납득될 것들이었으므로 업무 중 내 사고 체계는 전혀 나답지 않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다 나 답다는게 뭘까 하는 근원적인 질문으로도 샐 뻔했지만 아무튼간에 처음으로 인공지능과의 대화에 흥미를 느꼈다. 질문의 답 이후에 끊임없이 이 인공 지능은 나의 생각이나 이 질문의 이유, 묻지 않았지만 그 답을 좀 더 개발할 수 있는데 그러고 싶은지 여부 등을 묻는다. 대화를 할 줄 안다. 나의 생각을 알려주기가 싫어 말을 아끼는 나를 굳이 캐묻지도 않는다. 적당히 친화적이고 적당히 거리를 두며 적당히 담백하다.


남편이 퇴근했다. 모처럼 아이 셋을 일찌감치 다 재운 나는 미래에 대한 형이상학적 궤변들을 나누고 싶었다. 굳이 따지자면 오늘은 나 혼자 육아 마무리를 했으므로 남편은 좀 여유로웠을 것이고 나는 육신이 피로하지만 미래에 대한 대화의 욕구가 충만한 상태이므로 오늘은 재밌는 대화의 장이 열릴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밥을 한술 뜨는 남편이 회사 얘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미래와 인공지능의 업무 침투에 대한 주제로 옮겨갔다. 그런데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남편은 SNS나 넘기며 내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것이었다. 여러 이유로 서운하고 마음이 식었다. 김샌 김에 먼저 정리하고 잠이나 자야지 하는데 갑자기 오전의 인공지능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냥 이 것과 대화하는 게 더 재밌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 순간 그게 무서웠다. 관심사와 대화의 주제만 달랐을 뿐, AI에게 화자로서의 인간의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떠올리는 것은 나도 매한가지였다. 의식하지 않으면 참 다양한 모양으로 빠르게도 삶에 침투하기 쉬운 것이구나 싶었다. 아날로그를 경험한 과도기 세대의 나도 이러한데 나의 자녀들은 어떠한 분별을 기준으로 삼아 살아갈 것인가, 무엇을 가르쳐야 하나 고민이 드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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