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구 DMZ 을지전망대 '금강산 거북바위', '제4땅굴' 스케치
2016년 5월 8일.
박수근미술관 창작스튜디오 입주 47일 차.
표지: <을지전망대 대위님 설명>
오늘은 완전히 그림에서 손을 놓고 쉬려 하였다. 산책을 나가 동네를 둘러보다가도 사생에 빠져버리니 쉬지 않고 달려온 지 오래되어 몸도 정신도 피폐해질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이해인 문학관을 한 번 가봐야지 했는데 통일관에서 최은숙 팀장님이 전화를 주셨다. 날씨가 너무도 좋아서 아주 잘 보여 그리기 좋은 날이겠다고.
'산맥'과 '땅굴' 페인팅 작업이 이미 사생의 단계에서 추상화 과정으로 넘어가서 굳이 드로잉을 위해 갈 필요는 없었지만 날 기억하고 전화까지 주신 팀장님의 마음이 고마워 급히 도구를 챙겨 일정을 수정하였다. 날씨만을 생각하면 바로 을지전망대로 가야 하겠으나 40여 분 달려오기가 쉽지 않은 거리인지라 항상 그러했듯이 땅굴을 먼저 들렀다.
한 달여 만에 다시 오게 된 것인데 그 사이에 산의 모습이 참으로 많이 변했다. 산의 흙능선은 무성한 나뭇잎들에 거의 가려있고 풍성한 나무 각각의 볼륨이 모여 산의 울룽불룽한 덩어리를 이루었다.
물 먹은 연둣빛의 찬란하고 신선한 산 덩어리. 저 안에 어둠 속 땅굴이 있다는 것을 어찌 상상할 수 있을까. 이미 보았음에도 현실로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다.
_2016/05/08 드로잉 노트: 제4땅굴
크고 널찍하게 동그란 기계의 형태로 깔끔한 남측의 터널은, 단단한 화강암이 기계의 날과 맞물려 빚었을 균열이 큰 흐름으로 존재한다. 천장에서 물이 떨어져 드로잉의 채 마르지 않은 먹을 훑고 내려갔는데 물기 가득한 동굴의 느낌을, 수직으로 떨어지고 벽을 타고 흐르는 물의 느낌을 더해주었다. 회전하는 다이아몬드 날의 자국이 있는 남측 터널의 끝이 가까워오자 땅굴을 찾아내기 위해 뚫고 들어갔던 시추공의 흔적이 기록되어 있다.
_2016/05/08 드로잉 노트: 제4땅굴 남측. 시추공. 시추공 248
남측의 역 땅굴은 북측의 땅굴을 만나고 나자 멈추었다. 북측의 낮고 좁은 거친 벽의 땅굴을 견학할 수 있는 기차가 북측이 흙을 실어 나르기 위해 놓았던 선로 옆에 놓인 기찻길을 따라 100미터 정도 달리는데, 정거장이라 이름하여 놓은 것이 참으로 안쓰럽고 이런 웃지 못할 농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
_2016/05/08 드로잉 노트: 제4땅굴
하나 될 수 있을까
그래서 기차에 앉으면 큼직하게 깔끔히 회전한 남측의 굴과 거친 화강암 조직 그대로의 벽감인 북측의 땅굴이 동시에 보인다. 너무도 다른 둘. 모양도, 크기도, 방향도. 이 둘은 하나 될 수 있을까.
이 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차하고 있다.
분명 우리에게 다시 하나 될 기회는 올 것이고 이루어질 것이다.
_2016/05/08 드로잉 노트: 제4땅굴. 다이아몬드 날. 엇갈린 십자 모양으로 남측과 북측의 땅굴이 만난다
북측 땅굴의 끝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궁금하였다. 설명해 주고 인도해 준 헌병이 직접 가보았는데 – 지금도 땅굴의 끝까지 가서 점검을 한다고 한다 – 콘크리트로 꽉 막아 놓았단다. 꽉 막힌 북측의 땅굴. 멈춘 우리의 땅굴. 이 둘의 교차. 나는 이 안에서 어떤 하나됨을 보고 있나.
_2016/05/08 드로잉 노트: 제4땅굴. 노랑 다이너마이트. 콘크리트 5개 방어벽. 마지막 5차 벽은 문도 없이 꽉 틀어막혀 있다
을지전망대에서 날이 좋아 북한 땅 금강산의 거북바위를 볼 수 있었다. 거북이 모양으로 거대한 바위 봉우리가 솟아 있었다. 정선의 금강전도에 있는 바위 모양처럼 기둥 같은 거친 바위가 여럿이 모여 솟아 이룬 봉우리가, 거북이가 옆에서 보이는 모양이었다.
을지전망대에서 본 산맥도 땅굴에서처럼 많이도 그 모양이 달라져 있었다. 3월 말에서 4월 초의 산맥은 뼈대를 보여주었다면 이제는 풍성한 몸체를 드러내었다. 사람의 손이 닿지 못하는 자연 이어서일까. 그 무성함이 아직 저녁엔 쌀쌀하기 그지없는 이곳에서 경이로울 지경이다. 저 풍성함을, 산맥의 부유함을 그려내고 싶었으나 방문객이 많아 그쳐야 했다.
_2016/05/08 드로잉 노트: 금강산 거북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