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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이 Nov 22. 2021

시집살이 어디까지 해봤니 제 2편

동서와 시누이들

정말 기억에 남는 C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와도 겹쳐진다. 그녀가 겪은 동서 이야기나 내가 겪은 시누이들

이야기는 돌아보면 그 사람들이 짠하고 웃음이 나는 일이지만( 지나간 일이기에 그런 감정일 뿐), 당시엔 어안이 벙벙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내 친구들은 저 같은 조건이면 비슷한 집안과 학벌의 좋은 사람들을 만나거나 약혼을 하던데 전, 맘대로 되는 사람도 없었고... 솔직히 자존심 상하고 짜증이 났어요. 명문대  공대 나와 S회사에 다녀도 결혼을 앞둔  친구들에게 열등감이 느껴졌지요.."  반쪽 찾기에 여념이 없던 혼인 연령기의 C에게 마침 백마 탄 왕자님은 아니고... 백마를 키우는 집사 같은 사람이었지만 그는 항상 예쁘다 해주고 결혼해 달라고 무릎까지 꿇었다.

"당시엔 남자들이 집을 해오는 게 보통이었는데 그 남자는 저와 같은 명문대 출신이긴 했지만 을 반반 할 형편도 못 되는 상황이었어요. 그래도 저를 이렇게 사랑해주는 사람을 또 만날까 싶었던 데다가 나이에 쫓겨 결혼을 결심했어요."

똑똑한 큰 딸을 애지중지 키웠던, 부동산이 많아 부유했던 친정에선 탐탁지 않아했지만 딸의 고집으로 승낙을 했다. 친정의 돈과 남편이 조금 모아둔 돈을 보태 작은 전셋집을 얻었다가 몇 년 후 대출을 왕창 끼고 집을 샀다.

"시집살이는 집을 매매한 이후부터 시작됐어요. 남편 빼곤 형님들이나 윗동서들 모두 대학을 나오지 않은 집안이었는데 그런 걸 생각 못하고 결혼한 게 이렇게 후회될 줄은 몰랐어요."

막내였던 남편은 형님들과 형수님들의 도움으로 대학을 졸업했기에 늘 그분들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고 집을 사자마자 그분들께 알리며 집들이를 한다고 했더란다. 다 같이 기뻐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생각은 C도 다르지 않았는데.

"어느 날 큰 형님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전화를 했어요."

"동서, 집 샀다며?"

"네... 형님!! 친정 도움도 받고 대출도 풀로 받아 샀어요. 집들이 날짜는 언제가 좋을까요?"

별로 좋지 않은 기류가 감지됐지만 C는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서는 최 씨 집안에 시집온 사람인데... 최 씨 집안에 시집왔으면 가문의 전통을 따라야지. 아직 우리 빼곤 형님들 모두 집도 안사고 전세 사는데 이제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됐다고 벌써 대출을 끼어 집을 산거야? 집이 뭐라고?애보다 집이 더 중요해? 동서 친정도 정말 웃긴다. 출가외인 딸 뒷설거지를 아직도 하는 거야?"

큰동서의 목소리는 날카롭고 심지어 떨리기까지 했다.

"집이 없는 게 가문의 전통이 된다는 얘긴 머리털나고 처음 듣는 희안한 이야기였어요."

우리는 그녀의 말에 파안대소했지만 C는 몸서리를 쳤다.

"등골이 오싹했어요. 그런 거 있잖아요. 한국말을 듣고 있는데 이해가 가질 않는 거. 이런 어처구니없는 외계어를 들었을 때 뭐라고 대꾸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하얘지고 식은땀만 나는 거예요."


C의 이야기를 듣자 갑자기 내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는 아이들 조기교육에 관심은 있었지만 유치원만큼은 자연 속에서 친구들과 뛰어놀며 행복하게 지내는 유치원을 보내고 싶었다. 영어유치원이라든지 콘크리트 건물 속 유치원은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 곳이 있긴 했다. 내가 1기로 나온 유치원. 대학 부설이고 자연 속 놀이터에서 뛰어놀거나 장난감이 가득한 실내에서 놀고먹다 집에 오는 곳이었다. 문제는 엄마가 데려다주고 3시간 있다 집에 데리고 와야 하는 게 함정이었다.

처음엔 고생을 하겠지만 곧 동네 엄마들과 카풀을 하면 되겠지 싶었다. 이 동네에서 그 유치원을 보내는 사람 하나 없을까. 하여간 우리 아이들은 그 유치원을 다녔다. 나는 노트북을 싸서 대기실에서 일을 했다. 좋은 선생님들의 보살핌을 받고 좋은 친구들과 놀며 그 안에서 질서와 존중을 배우는 아이들의 모습에 힘든 줄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설 명절에 시댁 부엌에서 동서와 하녀처럼  일을 하는 중이었는데 거실 쪽에서 작은 시누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나 들으라고 떠드는 중이었다.

아마 우리 큰애에게 어느 유치원 다니냐고 물었더니 '**유치원'이라고 대답한 모양이었다.

"뭐라고?? **유치원?? **유치원? **대학 부설 거기?? 거길 얘네가 어떻게 다녀? 거긴 재벌들만 다니는 곳인데 얘네가 어떻게 다녀?"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작은 시누이 말이 완전히 틀리기도 했지만(거긴 나같은 중산층이 90프로 되는 곳이다) 내가  아이들을 어느 유치원을 보내건 홈스쿨링을 시키건 왜 상관일까? 설사 재벌만 다니는 곳이라 치자. 만일 그렇게 좋은 곳에  남동생의 자식들이 다닌다면 축하해 줄 일 아닌가? 그런데 저 무시하고 조롱하는 말투는 의중이 무엇일까? 못 들은 척했지만 참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배 아프면 자기도 보내면 되는 거 아닌가?

그와 이어진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다.

어느 날 또 둘째 시누이가 전화가 와선 "**엄마야, 우리 엄마가 그 연세에 이래저래 일 보러 여기저기 다니시는데 너 애들 유치원 라이드 할 시간 있으면 우리 엄마(그니까 나에게 시어머니) 라이드 좀 해 드려."

다짜고짜 그러는 거다. 딸이 며느리에게 자기엄마 효도를 대신 하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그부분이 스스로도 거슬렸던지 "나는 일을 하잖아." 세상에! 나도 일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내 직업은 상대적으로 자기 직업에 못미치니 중요치 않았나보다. 무엇보다 그 유치원이 맘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성격상 속으로 삭이지는 못한다.  엄마부터  언니 오빠들까지 벌벌 떠는 호랑이 아빠에게도 아빠의 요구라던가  화내는 이유가 불분명하거나 부당하면 꼭 되물었다. 속된 말로 따졌다.

속이 빤히 보이는 시누이의 요구가 쉽게 수긍이 갈리 만무했다.
"형님, 저희 아이들 유치원 때문에 저는 못해요."

그런데 그 말이 끝나자 갑자기 그녀가 급발진을 시작했다.

"얘!! 나는 우리 애들 유치원 초등학교 때부터 버스 태우고 지하철 태웠어!!지금도 학원도 혼자다니고

다 한다고! 너네 애들은 무슨 금테를 둘렀니 뭐 그리 대단하니?"

우리 아이들 그 때 만나이로 겨우 5세 3세였다.

"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저는 일을 그만둬도 남에게 애들 맡기고 위험하게 그렇게는 못키워요. 저는 제가 라이드 해야 해요."

남들에게 존경받는 전문직의 그녀가 보잘 것 없는 나에게 분노 폭발하는 정확한 이유를 그때는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내가 우리 아이들은 자기들처럼 아줌마 손에 맡기고 동네 유치원 9 TO 6까지 보내고 시어머니 보필이나 했어야 성에 찼을 것이다. 그런데, 듣기만 했던 (혹은 본인이 동경했던?)유치원에 보내고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며 쩔쩔 매는 나를 보니 방치한 본인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속상함이 내게 화살로 돌아온 것이리라.

하지만 액면 그대로의 말에 화가 난 나는 어이가 없었고 바쁘신 몸일 텐데 심심한 여자처럼 가끔 전화해서  저러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참 이상한 여자다' 그때 마음은 그랬다.


지금은 다 이해한다.

C의 동서나 시누이들이나(나를 괴롭히는 사람은 둘째가 완장을 차고 도맡았지만 배후엔 첫째와 시어머니가 있었을 것이다) 불안했을 것이다.

C의 경우, 집 한 채 없는 나이 든 형님이나 형수님은 집을 산 C부부를 보면서 '왜 집을 안 샀을까,' '우린 언제 사냐' 갑자기 속도 상하고 후회도 됐을 것이다. 어쩌면 부부싸움을 한 집도 있었을 지 모른다. 큰 동서는 집안의 불화를 일으켰다 생각하고 막내며느리인 C에게 막말을 했을 것이다.


 결혼을 한다는 건 형제가 갈라지는 일이 될 수 있다. 전혀 다른 사람들이 가족의 범위 안에 묶이면서  서로 닮은 모습으로 살던 그들에게 뭔가 이질감을 주고 평온한 질서를 깨뜨리는 일이 생길 수 있으니까. 나의 시누이들도 남부러울 것 없는 직업을 가지고 소신껏 애들을 키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 남동생의 부인이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한 교육, 동네 유치원보다 돈이 많이 드는 특별한 교육을 시키는 것처럼 보이니 그간 가졌던 소신이 흔들리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또한 남동생의 허리가 휘지 않을까 걱정도 됐겠지. 그러나 실은 그런 교육을 우리 남편은 열렬히 응원해 주었다. 시집 식구들의 특징은 자기 식구들의 동의와 지지 그런 건 간과하는 것이다. 반대하는 남동생을 내가  구워삶거나 휘둘러 그 유치원을 보낸다고 믿어야만  그들의 분노에 정당성이 생기니 그런 것일까.

C의 동서나 시누이들의 괴롭힘이 모두 불안과 질투에서 비롯된 것임을 명확히 알게 되자 지금은 그때의 그들이 짠하다. 30대의 나와 그녀들은 지금 보면 모두 어리석은 나이였을 수 있으니.

어쨌든 나는 17년 전 그 유치원에서 만난 학부모들을 아직도 만난다. 아이들도 그때를 아무 스트레스 없는 행복한 시절로 기억한다. 그 아이들은 물론 유치원 때문은 아니겠지만 다들 흐뭇하게 잘 자랐고 나는 내가 잘 한일 중 하나로 그 유치원을 택한 것을 손에 꼽는다. 아 물론 우리 엄마도 45년 전 만난 유치원 학부모 모임이 아직도 있으니 좋은 인연을 만들어주는 명문 유치원이라고 생각한다.



C는 당시 집을 산 죄로 큰동서에게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나고 이후로도 동서들에게 왕따 신세가 되어 그 후로도 오랫동안 마음고생을 했다. 그들에게 이후에 들은 말은 더 가관이었다.

"명문대 나오면 뭐해. 눈치코치 하나 없는데! 우리 막내가 얼마나 눌려 살겠어."

저들이 대학을 안 다녀봐서 그래... 하고 마음의 위안을 삼아도 C는 화병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했다.

몇 년 전 집단 상담을 했을 당시 10여 년 전 일로 마음의 병을 얻어 동서들을 안 보고 싶다고 고민하던 똑똑한 C.  지금은 어떻게 사냐고요?

그녀는 더더욱 부동산 공부와 투자에 매진해 강남에 아파트를 샀고, 지금은  집 샀다고 구박하던 동서들에게 부동산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 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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