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이 Feb 24. 2022

아들이 선물한 스코틀랜드 1

내가 스코틀랜드에 오다니


인생이 계획대로 뜻대로 되는 일은 없다. 자식일은 말해 뭐할까.

3~4년 전, 아들이 유학을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처음엔 안도했다. 어쨌든 알만 한? 대학을 갈 성적이 안되어서 늘 조바심이었는데 스스로 밖으로 눈을 돌려준 것이다. 세상은 넓으니 꼭 안에서만 복닥거릴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냥 냉정하게 '도피 유학'이라 할 수 있겠다.)


중학교 때 여러  가지 상념을 잊어보라고 '도자기 공예'를 권한 것이 계기가 되어  아들은  미술로 유학을 가고 싶어 했다. 아들의 진로가 미술 유학으로 정해지고 나서야 나의 '가슴 두근병'이 감쪽같이 사라졌던 기억이  난다.  그땐 어쨌든 고등학교 성적에  일희일비하거나 머리 싸매고 누워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대해 해방감을 느꼈다.  혹독한 입시 '염병'을 앓는 경험  정말이지 딸 하나로  족했다.

아들이 유학 미술을  준비하기로 하고  딸은 수시 합격한 곳에 휴학계를 내고 재수를 하면서 학부모로서의 내 역할은 완수됐다고 생각했다.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그저 믿고 기다려주는 행복한 엄마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리고 졸업을 앞두고, 유학원에선 아이의 고등학교 성적, 포트폴리오, 아이엘츠 성적 등을 합쳐  세 개의 미국 대학과 두 개의 영국 대학을 추천했다.  코로나의 수혜로 작년부터 많은 아이들이 윗단계 대학으로 운 좋은 합격을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욕심내서 이름만 들으면 와! 하는 대학도 어플라이 해보자는 것이다.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입학은 쉬워도 졸업은 쉽지 않은 외국  대학교를 굳이 성적보다 높여 보내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공부 외에도 요리 빨래 기상  등 모든 것을 혼자 책임져야 하는 외로운 유학생활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데 공부까지 많이 어려우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많은 선택지를 놓고  상담도 하고 남편과 아이와 오랫동안  상의한 끝에  스코틀랜드로 정했다.

먼저 아이의 특성을 고려했고  미술로 괜찮은 대학교 수준인지 우리가 제대로 서포트해 줄 수 있는 정도인지 살폈다. 무엇보다 총기 사고도 없고  대중교통  이용도 쉬워서 매우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미국에서 살다온 경험도 있어서 미국 외엔 다른 나라를 생각해본 일이 없었는데 영국이라니! 그러고 보니 얌전한 우리 아들과 분위기도 어울리는 것 같고 기대도 됐다. 미국보다 학비도 저렴했고 동양인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코로나로 유학 프로세싱을 담당하는  영국 정부기관의 봉쇄와 해제가 거듭되며 유학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결국 안타깝게도 영국 내 코로나로 인해 아들은 9월 20일 개강과 수업을 한국에서 온라인으로 하게 됐다. 김 빠지는 일이었다.

한국 대학생이 한국에서 온라인 수업만 하는 것도 (수업만 비대면, 노는 건 대면! 이 모순을 알면서도 비대면 수업이라 ㅠㅠ) 정말 화가 났는데 더군다나 해외유학을 온라인으로 하다니!!!

결국 나는 유학원을 통해  학교에 매일 연락해 프로세싱 상황을 체크하고 진행을 재촉해 10월 초가 돼서야  아들은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작년에 아들이 입국할 무렵, 영국은 2주 자가격리가 의무여서 나나 남편이 동행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시 영국이 요구하는 자가격리는 학생의 경우 대면 수업만 2주 못 들어오는 것일 뿐, 우리나라처럼 집 밖 출입을 막는 것이 아니었다. 슈퍼도 갈 수 있고 식당도 갈 수 있고 쇼핑도 가능한 '내 맘대로 격리'였고 격리 중 자가진단 키트로 스스로 3일과  8일째  두 번 검사를 하고 음성이 확인되면 그 즉시 해제되었다. 2주를 채울 필요도 없는 것이다.


어쨌든 어리다면 어린 아들은 이민 가방 두 개와 아이패드 등을 넣은 배낭을 메고 혼자 비행기를 탔다. 국내 기차나 비행기도  혼자서는 타본 적 없는 아이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거쳐 스코틀랜드로  떠났다.




그리고 나는 금년 2월 초,  아들을 따라 드디어 스코틀랜드에 온 것이다. 두근두근!

런던도 못 가본 내가 스코틀랜드라니!!! 왠지 잉글랜드보다 더 이국적이고 더 고색창연한 느낌의 신비스러운 나라.

아이가 있는 곳은 수도인 에든버러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세인트 앤드류와 인접해있는 고요하고 소박한 던디라는 도시다.

던디와 세인트 앤드류 그리고 에든버러에서의 2주는 내 평생  다녀본 여행을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스코틀랜드 이곳저곳을 다니며 나는 눈물이 차오르게 감사하고 그곳에서 만난 귀인들과의 소중한  인연으로  설레었다.  해가 늦게 뜨고 빨리지는,  시간이 정체된 듯  느리게 흐르는 하루하루가 벅차고 소중했다.

어디를 가든 한걸음 딛는 순간순간이 치열하게 지켜온 역사의 땅을 밟는 느낌이어서 황홀했다.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와도 오버랩이 되었다.  이 아름다운 땅을 갖기 위해 잉글랜드는 끊임없는 전쟁을 일으켰구나. 중세시대에 우뚝 세워져 수백 년을 지켜온  캐슬들,  에든버러 성 스털링 성  브로디 성 그밖에 이름 모를 많은 성들을 둘러보며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자부심과 자존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에든버러는 도시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돼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을 정도였다.


 스코틀랜드에서의 이 감격과 행복은 그간 우리 집의 근심 둥이 었던 내 아들이 유학을 결정하고 용기 있게 혼자 헤쳐나감으로써  내게 준 선물이었다.

고마워, 아들!


PS  애들이 어릴 때  자칭 신기가 있다던

어느 프로덕션 사장이 우리 아이 둘의 사진을 보고는  '아들이 효도하겠네~'했었다. 그땐, 딸이 참 영특해서(효도는 성적순이 아니지만) '정말요?!?!딸이 아니구? 나중에 아들이 더 공부 잘해서 서울대라도 가나요?'라고 물었다.

그 사장은 웃으면서 '아니,  그런 것보다 그냥 스무 살이 넘어가면서 효도할 거야~'  

복채도 없이 단호하게 한말이라 믿음이 가서  그 사장 말을  언제나 가슴 한편에 두었다. 그리고 한숨이 나올 때마다 얘는 언제 효도하려나~ 기다렸었는데 그 말이 스코틀랜드를 밟으며 또 생각이 났다.

아들 덕에 이런 좋은 곳도 와보나 싶어서...

강하게 유학 잘하는 것이 효도겠지요.


(계속)






작가의 이전글 엄마 손은 약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