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복잡한 구석이 하나쯤은 있지
다음은 내가 글을 쓰고 난 다음,
그러니까 초고를 작성하고 난 직후 들었던 생각을 마구 적어 내려간 흔적이다. 굉장히 라이브한 바이브.
나는 초고를 쓰다가 여러 번 좌절하고 만다.
나는 내가 쓴 초고를 읽다가 뒷골이 당긴다.
나는 초고를 내려놓고 이게 뭔가를 생각한다.
나는 안경을 벗어 던진다.
나는 그대로 책상에 엎어진다.
나는 암울하다.
나는 쓰라리다.
나는 어휘의 빈곤함에 마음이 스산하다.
나는 무식하다.
나는 무지하다.
나는 촌스럽다.
나는 비논리적이다.
나는 절망적이다.
나는 바보등신이다.
나는 더럽게 글을 못 쓴다.
나는 앞으로가 걱정된다.
나는 이 정도 정신력에 스스로 실망한다.
나는 이 정도로 좌절하는 내 자신이 싫다.
나는 이것을 말할 곳이 없다.
나는 글을 배운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글렀다.
나는 좌절한다.
나는 무섭다.
나는 두렵다.
나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끈기가 부족하다.
나는 인내가 부족하다.
나는 앞으로 밥이나 먹고 살지 모르겠다.
나는 내 글을 아무도 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내 글이 장황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던 꿈을 떠올리며, 스스로 비웃는다.
나는 운다.
나는 절필을 선언한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나는 괴롭다.
나는 괴리감을 느낀다.
나는 펑펑 운다.
나는 한참 울다 보니 배가 고프다.
나는 일단 눈물과 콧물을 좀 닦는다.
나는 라면이 있나, 찬장을 뒤진다.
나는 라면을 끓이는 김에 계란도 있는지 냉장고를 뒤져본다.
나는 냉장고 야채칸에서 대파도 부른다.
나는 구석에서 이런 날 기다리는 대파 한 대를 보는 순간 울컥한다.
나는 다시금 흘러나오는 콧물과 눈물을 닦는다.
나는 여기에 치즈까지 있으면 좋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신김치도 꺼낸다.
나는 김치를 종 종종 썰어서 세팅한다.
나는 오늘 죽어도 정갈하게 차려 먹기로 한다.
나는 식탁에 앉는다.
나는 라면을 한입 후루룩 먹는다.
나는 라면에 김치를 얹어서 또 한 번 먹는다.
나는 국물을 한 숟가락 들이킨다.
나는 포효한다.
나는 안도한다.
나는 라면 국물에서 우러난 깊은 위로에 다시 오열한다.
나는 약간 엉덩이를 들썩인다.
나는 그릇을 싹싹 비우고 크아! 외친다.
나는 젓가락을 딱 놓는다.
나는 냉동실을 뒤진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깊이 숨겨놓았던 월드콘을 꺼낸다.
나는 월드콘을 까서 냠냠 핥아먹는다.
나는 마침내 맨 끝에 있는 초콜릿 덩어리를 만난다.
나는 너의 세계까지 왔다.
나는 달달한 기분에 스며든다.
나는 만족스럽다.
나는 모든 게 썩 나쁘지 않다고 느낀다.
나는 절망도 제법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뭐든지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무렴 괜찮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시 쓰면 되지 라고 생각한다.
나는 초고는 시작일 뿐이라 생각한다.
나는 갑자기 고쳐볼까 하고 생각한다.
나는 다시 쓰기 시작한다.
나는 끝내 쓸 것이다.
나는 마침내 좋은 글을 쓸 것이다.
나는 독자와 함께 웃는 글을 쓸 것이다.
나는 위트있는 작가가 될 것이다.
나는 글을 써서 돈을 벌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끝내 작가가 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알아가고 배우는 중이다.
나는 메타인지의 표본이다
나는 정직하고 진실하고 정확한 글을 쓸 것이다.
나는 사랑에 관한 글을 쓸 것이다.
나는 환대에 관한 글을 쓸 것이다.
나는 매일 쓰는 사람이다.
나는 궤변가인가?
초고와 퇴고 사이에 끼어서 고통스럽게 절규하다가, 희망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일련의 과정을 적어보았다. 퇴고를 위해 초고를 다시 열어볼 때의 느낌처럼, 써놓고 보니 이것 또한 최악이네. 그런데도 이렇게 민낯의 감정들을 적어두는 이유는 무엇인가. 매번 글재주가 없음에 절망하여, 스스로 절필을 선언한다. 한동안 세상 모든 비관을 내가 다 가진 듯, 구석에 찌그러져 자멸한다. 그런데도 나란 인간은 조금이라도 밥심이 생기면, 글 쓰는 세계에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왜 다시금 끄적거리게 되는 걸까. 글이라는 세계는, 정말이지 조정래 작가의 책 제목처럼 ‘황홀한 글 감옥’이 맞는 것 같다.
내가 썼던 초고를 다시 펼쳐서 읽어보면, 기가 막힌다(절망으로).
문장 하나하나, 욕망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마음 내키는 대로 급하게 토해낸 감정의 말들과 이상을 가득 담은 궤변이 한데 모여 춤을 춘다. 거품이 많고 장황하다. 아무리 읽어도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싶고, 어수선하다. 내 입장만 일방적으로 내세운, 고집스러운 마음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문장이 맞긴 한 것인지, 쉼표 하나도 제대로 된 곳에 붙어있지 않고, 마침표가 없는 무성의함까지. 인과관계도 맞지 않고, 아무튼 모든 것이 엉망이다.
헤밍웨이는 초고를 쓰레기라고 하였다. 그 말을 떠올리며 나의 쓰레기를 바라보고 있어도 그다지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쓰레기에도 왠지 레벨이 있어서, 문학의 대가인 그의 쓰레기는 왠지 유기농 같고, 내 쓰레기는 그냥 말 그대로 쓰레기인 것 같다. 아마 그가 싼 똥도 내가 싼 똥과는 질적으로 다르겠지(흑). 초고를 다시 읽는 일은, 내 똥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글이란 정직해서 내 바닥을 훤히 보여준다. 신나게 지껄일 때는 모르지만, 차근차근 다시 들여다보면 우웩하면서 덮게 된다. 그럼 가뿐하게 쳐내고 버리면 되지, 왜 그렇게 아파하느냐고? 글에 내 인격이 담겨있으니까. 초고의 문장들처럼 군더더기 많고, 정리되지 않고, 악취 나는 쓰레기 같은 내 바닥을 발견하게 되니까. 그렇게 싼 똥을 내가 정성스럽게 치우고, 깨끗하게 하는 작업이 퇴고이다. 이렇게 내 실력을 직면하면서 계속 문장을 다듬고, 매만지고, 과감히 버리는 작업은 정말 끝이 없다. 아마 한 장의 초고에 대해서 얼마만큼 퇴고를 할 수 있는지를 누군가 묻는다면, 죽을 때까지도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나는 그 세계 안에서 절망할 수 있는 이유를 최대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퇴고를 하는 만큼 글은 정직하게 더 나은 방향으로 좋아진다는 것이다. 그 맛에 또 얼마든지 희망을 발견한다.
나는 오늘도 내 앞에 놓인 쓰레기를 주시하며, 본격적으로 칼을 간다. 꾹 참고 한번 쭉 읽어가다가 덜커덕 걸리는, 불편한 문장을 계속해서 찾는다(계속 나온다). 입으로 소리 내어 읽어보면서, 문장을 매만지고 덜어내는 작업, 이 과정이 나로서는 정말 괴롭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 종일 붙잡고 씨름하다 보면, 어느새 나는 없어지고 가상의 독자를 만나게 되는 지점이 이른다. 그가 읽기에 편할까? 그가 읽기에 호흡이 힘들지는 않을까? 나의 문장들이 그의 마음 안에 살포시 내려앉을 수 있을까? 내 문장은 쉬운가? 자문해본다. 퇴고하면서 나오는 글들이 좋을수록, 그 문장은 중력을 이기는 부력을 갖는다. 하늘로 높이 두둥실 떠올라서, 마침내 내 작은 우주를 떠난다. 가상의 독자를 향한 여정이 준비된 것이다. 말과 글은 그렇게 결국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어느새 나의 고집도, 편견도, 고정관념도 다 사라지고, 독자의 마음에 가닿고 싶어진다. 겸손하고 낮은 마음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이로써 나의 세계는 또 한 번 허물어진다. 아마추어인 나로서는 퇴고가 정말 힘들지만, 글을 고쳐갈 때마다 나를 성찰한다. 그리고 좀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어 안달이 난다. 독자에게 가장 친절하고 쉽게 스며드는, 그런 편안한 글.
내가 평소 존경하는 스승님이 계신다. 어느 날은 그 어르신을 직접 뵐 기회가 있었다. 이미 워낙 어떤 분야의 대가이시며, 유명한 분이기에.. 아니 그 모든 것을 떠나, 내 마음 깊이 존경하는 분이기에, 막상 앞에서 뵙게 되니 어찌나 마음이 조심스러운지. 결국 별 대화도 나누지 못하였다. 짧은 만남을 마치고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 시간의 적막을 견디지 못하고 고작 내가 한 말은,
“따님께서는 혹시 교제 중인 남자친구가 있나요?”
대관절 갑자기 다른 집 따님 남자친구는 왜 궁금한데…
‘없으면 뭐, 네가 선 자리라도 마련할 거냐고. 왜 그러냐고’
아, 어르신의 허를 찌르는 좋은 질문을 하고 싶었는데. 나란 인간, 이미 질문부터 글렀다는 생각에 입을 닫고, 눈을 질끈 감았다. 어른께서는, 창밖으로 보이는 먼 산을 바라보시고 잠시 생각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없지, 흠.. 없어”
“아. 그렇군요, 음…”
엘리베이터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어른께서는 여전히 시선을 창밖에 두며 이렇게 덧붙이셨다.
“참 바보 같은 놈들이지. 쯧쯧”
어른께서는, 당신의 딸을 연모하는 대상이 당연히 있으며, 당연히 복수로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말씀하셨다.
“음… ”
나는 더더욱 할 말이 없었다(그나저나 엘리베이터는 고장이 났는가).
딸을 향한 어른의 무한한 자긍심이 담긴 고견에 놀랐고, 역시 대가는 생각의 그릇이 남다르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나의 글쓰기 작업에 대한 한 가지 힌트를 얻게 되었다. 당시의 나는 청탁받은 원고의 초고를 쓰고 난 직후였는데, 퇴고하려고 보니 내가 써놓은 글의 상태는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괴로움과 두려움으로 더 이상 퇴고를 할 수 없어서 중단해버린 상태였다. 퀘스트를 깨고 나아갈 수 있는 열쇠는 오직 나에게만 있다는 걸 잘 알았지만, 부담감에 짓눌려서 글을 더 이상 고칠 수가 없었다. 나는 닫혀있는 그 세계의 문을 차마 열지 못하고, 몇 날을 서성이기만 했다.
그때 어르신이 말씀 한마디에서 나는, 글쓰기의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일종의 뻔뻔함이 필요하다는 팁을 얻었다. 딸을 향한 어른의 자긍심이 뻔뻔하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나는 그 따님을 연모하는 그 남자들, 반드시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그 남자 중 한 명의 심정이 되어 뻔뻔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글의 세계를 사랑하지만, 역량이 부족하여 가질 수 없는 빈곤한 처지에도 나는 계속 나아가야 한다. 계속 글을 써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로써 사랑을 쟁취하고 끝내 ‘바보 같은 놈들’에게서 해방될 것이다. 내가 쓴 가장 좋은 글을 비로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초고와 퇴고 사이의 루틴은 절망이 팔 할이다. 도대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을 계속 견디면서, 책상 앞에서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매일 새로운 문장을 쓴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겠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늘은 나처럼 초고를 쓰고 절망하며, 절필을 선언했다가 내일이면 또다시 노트북을 두들기는 이들, 글쓰기의 절망과 희망을, 기쁨과 슬픔을 골고루 가진 나 같은 이들을 생각하면서 이 글을 썼다.
나의 절망적인 초고는 오로지 내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긴 퇴고를 거쳐서 완성된 글은, 언젠가 타인의 마음에 가서 닿는다. 책 속 문장 하나가 나를 일으켜 세운 시절을 생각하면서, 나도 그렇게 누군가 잠시 기댈 수 있는 문장을 써보고 싶다. 그러기에는 아직 갈 길이 너무 멀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내 쓰레기를 정성스럽게, 마음을 다해 치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