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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학자P Sep 18. 2018

포키온의 아내를 생각하다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남편의 회사 앞 카페에 앉아 글을 쓴다.

내가 코앞에서 기다리고 있기에 오늘은 그 어떤 날보다 남편은 빠른 퇴근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라떼 한 잔을 시켜놓고 바깥의 차량들을 보다가 문득 포키온의 아내가 떠오른다.


살면서, 나는 종종 그녀를 떠올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런 아내가 될 수 있는지, 

어느 정도로 나의 남편을 사랑하는지.



작년이었나,

도서관 미술 분야 서가를 뒤적이다 빛바랜 낡은 표지의 책 하나를 발견했다. 거기엔 상냥하게 생긴 수녀님의 사진이 실려있었는데, 바로 <웬디 수녀의 나를 사로잡은 그림들>이다.

유명한 수녀님 같은데, 솔직히 나는 그때 처음 봤다.

영국 BBC 방송 시리즈 <웬디 수녀의 모험>과 <웬디 수녀와 함께 떠나는 미술 여행>으로 잘 알려져 있고, 한국 EBS에서도 방영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녀는 "예술에 관한 한 최고의 이야기꾼"이라는 찬사를 듣는다는데, 현재 근황은 어떤지 모르겠다.

그 책만 하더라도 벌써 2001년도에 나온 책이니 말이다.


각설하고,

이 책에서 나온 그림 이야기가 바로 

<포키온의 재가 있는 풍경>이다.


니콜라 푸생, <포키온의 재가 있는 풍경>, 1648년 경,  116*176, 캔버스에 유채, 워커미술관, 리버풀


한동안 이 그림의 먹먹함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림을 자세히 보아야 한다.

고즈넉한 풍경 한가운데 그 아래를 살펴보자. 망을 보는 듯한 이와, 허리를 숙여 무언가를 하는 여인이 있다.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우리는 제목을 통해 짐작한다.

포키온의 재를 모으고 있다.

 

그렇게 남편의 흔적을 쓸어 모으고 있는 그녀가 바로 포키온의 아내다.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는 위쪽의 평화로운 풍경.

그와 달리 그림의 아래쪽, 어두운 나무 그늘 아래의 그녀.

 

그녀는 누구보다 절망스럽고 떨리는 심정 일터다.


이야기는 이렇다.
 고대 그리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전쟁이 한창일 시기였다.  
아테네 장군 포키온은 의로운 사람이다. 어찌나 올곧던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를 훌륭하고 특별하게 생각했다. 그에게 선물을 보내보기도 하지만 그는 한사코 받지 않았다. 아테네의 멸망을 막기 위해 포키온은 마케도니아와 협상을 해 평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고 혼란이 일었다. 포키온의 적들은 그를 반역자로 몰아 억울하게 처형한다. 그를 태운 재는 '메가라'라는 곳에 버려져  땅에 묻지도 못하게 했다. 죽어서도 쉬지 못하고 이곳저곳 쓸려 다니며 고통받으라는 의미였을 터다. 예상되다시피, 그 유해를 거두는 이도 반역으로 몰려 형벌을 받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그의 재를 모은다.

'죽음을 무릅쓴다'는 건, 타자로 칠 때나 쉬이 쓰이는 문장이다.

가늠하기 어려운 일이다.



포키온의 아내는 그의 재를 모아 물에 타 마신다.



이 부분에서 웬디 수녀는 자신의 몸을 남편의 무덤으로 삼은 것이라 알려준다.


따로 무덤을 만들어 줄 수도 없는 남편을 자신의 몸 안에서 쉴 수 있게 해야 하는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나에게도 배우자라는 존재가 생기고 나니 사뭇 진지해진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는, 이렇게 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비극이 찾아오리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남편의 지나친 올곧음으로 벌어질 많은 일들에 대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적들을 마주했고, 시시비비가 있었으며, 속 썩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남편의 올곧음을 지지했고,

그것이 옳다는 신념을 공유했기 때문에

그런 그의 영원한 거처를 자신의 안에 마련할 결심을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말하자면
그녀는 진정 사랑했을 것이다. 그를.



마치 저 위쪽의 풍경처럼 평화로운 나의 일상 속에서

포키온의 아내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소리 없는 울음으로, 숨 죽인 몸짓으로, 

나에게 다가와 잔잔히 묻는다.


그럴 때면 나는,

'결혼이란 어떤 맺어짐인가'

부부애와 인연에 대해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하염없이 생각하곤 한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 

내가 지지하고 사랑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이렇게 글도 쓴다.

사랑에 관한, 끝나지 않을 생각을 한다.





이 작품은 리버풀 워커 미술관에 있다고 하니, 언젠가 가서 직접 보고 싶다.

나의 님은 축구를 보러 가자고 꼬시면 따라나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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