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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학자P Jan 13. 2019

타인의 얼굴과 예술, 그리고 레비나스

예술 속 애도 읽기 (3) 우관호 작가, <일만 개의 선물>


 이번에 살펴볼 우관호 작가의 작품은 앞의 두 작품의 특징과 함께 관람객의 일상으로 얼굴 오브제를 들여보내는 적극적인 소통의 방식을 취한다. 선물로서 일상에 찾아온 타인의 얼굴은 환대를 받고, 전시장에서의 기억을 환기시킨다.

 나는 레비나스의 이론과 더불어 이 작품을 생각해보았다. 환대를 인간의 보편적인 결속과 평등으로 가는 길로 제시했던 레비나스의 개념과 맞물려, 사회적 죽음의 또 다른 애도 가능성의 장을 연다.




 김해 클레이아크 미술관의 2018년 기획전 <휴머니즘-인간을 위한 흙의 시>에서는 전쟁과 학살, 환경 파괴와 사회문제를 다룬 한국과 영국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했다. 그중 우관호 작가의 <일만 개의 선물>은 중앙 홀에 설치되어 관람객의 눈길을 잡았다. <일만 개의 선물>은 관람객의 참여를 유도한다. 우관호 작가는 예술이 일상으로 들어가 소통하길 바라는데, 이 바람이 집약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좌: 일 만개의 선물 전경(출처: 김해클레이아크) 우: 오브제 선물을 일상으로 가져간 사람들이 보낸 사진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작가는 선물을 매개로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요청한다. 여기서 선물은 작가가 만든 어린아이 두상과 일본의 타누키(너구리) 작품으로 관람객은 직접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해 포장해 갈 수 있다. 작가는 두상은 인간의 본질, 타누키 너구리는 본능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주변으로 둘러쳐진 구조물에 가득 들어차 있는 알록달록한 아이의 두상과 너구리상은 관람객들 한 사람당 하나씩 자유롭게 주어지는 것이다.

 선물은 가져가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를 가져간 관람객은 일상에 그 오브제를 두고 촬영해야 한다. 이후 촬영한 결과물은 작가에게 보내게 되는데, 사진을 받은 작가는 SNS에 업로드하며 전 세계인과 공유한다. 또한 전시장에서도 인화한 사진들을 다시 전시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상황 연출을 한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 거기에도 있고 여기에도 있다. 그렇게 작품은 여러 곳으로 퍼져나간다. 즉, 관람객은 작품을 보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공간에 나만의 시각으로 그것의 위치를 새롭게 정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을 가져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중앙 홀의 탑 구조물에 설치된 세라믹 오브제만은 가져갈 수 없다. 이 오브제들은 이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알록달록한 두상과 너구리상과 다르다. 어두운 무채색의 적막이 감돈다. 이는 지난 세기부터 현재까지 지구에서 일어난 전쟁과 학살 등 인류가 벌인 참담한 사건에 대한 은유적 표현을 담고 있다. 거대한 가운데 탑에는 검게 그을리거나 탄 아이의 두상들, 가까이 가서 하나씩 살펴보면 얼굴을 잃었거나 검은 재를 뒤집어쓰고 있는 그런 두상들이 탑을 이루고 있다. 이 탑 구조물에 설치된 어두운 오브제에서 전쟁과 학살, 테러 등의 수많은 희생자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안과 밖으로 가득 들어선 아이의 얼굴들이 숨이 막힐 듯 압도로 다가온다. 이러한 설정 탓일까. 국경과 문화, 인종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폭력 속에 희생당한 희생자들의 원형만 남은 인상을 준다. 또한 작가의 설명처럼 두상이 인간의 본질을 의미한다면, 이 참담한 역사의 사건들 속에서 인간의 본질은 타락하고 그을려져 버렸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기억은 저마다 다르게 뭉개지고 그을리고, 유실되었다.



 그러나 그 기억들이, 그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결코 소실되지 못할 기억의 탑들, 테러리즘과 전쟁에 시달린 가엾은 영혼들의 탑은 아이의 두상으로 저마다의 상처를 드러내며 거기에 서 있다. 우리는 그들을 애도할 수 있을까. 알지 못하는 타인의 얼굴은 다 같은 고만고만한 아이의 두상으로 남겨진다. 같은 얼굴임에도 예쁜 색을 입은 바깥의 오브제와 중앙의 그을린 오브제들은 전혀 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저마다 다른 고통을 짊어진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우리는 직접 가닿지 않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애도를 표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손댈 수 없는 그 검은 오브제들 사이를 지나며, 아름다운 색의 오브제 선물을 고르던 자신을 생각하게 된다.



 작가는 인간성 회복과 인류 평화의 염원을 담았다고 했다. 알록달록한 작품 사이에 서있던 검게 그을린 아이들의 두상을 잊을 수 있을까. 

이렇게 관람객은 한 오브제를 선택해 품으며
끝내
불가능한 애도의 시작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이다. 


 관람객이 가져가는 것은 결국 선물을 가장한 기억이며 ‘타인의 얼굴’이다. 작품은 관람객이 가져가는 오브제들로 인해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리고 이러한 영원한 변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애도는 시작된다. 


 물론 이 작품은 테러리즘과 전쟁, 학살 등 다양한 집단적 죽음의 이름으로 묶여 있어 구체적인 누군가나 사건을 떠올리게 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애도의 측면이 온전히 성공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즉, 현현하는 얼굴과 이름에서, 윤리적 책임의식이나 죄책감과 같은 것들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안에서 적어도 자발적인 애도의 가능성을 엿본다. 누구나 그을린 오브제에 기억을 소환하게 된다. 그것이 6.25 전쟁이든 베트남전이든, 혹은 타국의 전쟁이든지 간에 본인이 알고 있는 사회적 죽음과 희생자들의 기억을 소환한다. 그리고 소환된 기억은 밝고 예쁜 너구리상과 아이의 두상 선물로 일상으로 따라 들어간다. 일상으로 들어간 두상 오브제를 예쁘게 촬영하거나, 의미 있는 곳에 두는 모습을 통해 레비나스가 말한 환대를 목격한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이 보편적인 인간성을 향하도록 해주는 길이라고 보았다. 


 그런 타자의 얼굴을 받아들이는 일은 진정한 평등의 의미를 이루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타인을 나의 집으로 받아들이는 일에서, 손님으로 환대하면서 ‘구체적인 윤리성이 시작’되듯, 우관호 작가의 두상 오브제를 받아들이고 일상의 공간에 환대함으로써 도덕적 주체가 되는 간접적인 경험을 해볼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의 측면에서도 그것은 전시관 안에서의 단순한 감상에서 그치는 일이 아니다. 작품의 무한한 확장이다. 그리고 끊임없는 감상과 기억의 소환이 전시장 밖에서도 이루어지는 일이다. 타인의 얼굴은 일상으로 들어가 환대받고, 동시에 검은 오브제들이 전하던 메시지를 상기시킨다.


 무한한 확장과 기억의 환기라는 측면에서, 일만 개의 선물은 그렇게 일만 개의 기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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