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사회적 죽음과 애도다. 나의 석사 논문에서 ‘죽음의 원인이 각종 사회문제에 있으며 그 죽음으로 인하여 사회적 논의와 행동을 이끌어낸 경우’를 사회적 죽음으로 정의한 바 있다.
특히나 사회적 죽음을 다루는 애도는 개인적 슬픔이나 변화의 차원을 넘어 공동체나 집단적인 행동이나 변화를 통해서 의미 있는 애도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정치적 행동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회적 죽음 자체가 가진 특수성이 그렇다. 물론 그러한 변화가 반드시 정책과 같은 가시적이고 한정적인 것들로만 이뤄질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예컨대, 그 변화는 집단 기억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남겨진 기억을 다루는 문제부터 앞으로의 기억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될 수도 있다.
사회적 죽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애도될 수 있다.
사회적 애도의 모습은 종교적 차원으로도 정치적 차원으로도 다양한 행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내가 예술에서 애도 가능성을 찾는 이유는
예술은 기억의 문제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죽음을 둘러싼 기억은 단일한 서사가 아니며, 단순한 형태도 아니다. 사회적 죽음에는 복잡한 관점과 시각이 존재하고, 그를 둘러싼 저마다의 기억은 파편처럼 산재해있다. 이 기억의 무게가 엄중한 이유는 살아남은 자들의 미래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그 기억은 지속적으로 영향을 준다. 그 기억으로 인해 남겨진 자들은 살아남은 자가 되고, 책임감을 부여받게 된다. 그런 중요한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시대와 호흡할 수 있도록 해석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르는 예술이다.
기억을 남기고 기억을 다루는 작업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예술의 주요 역할 가운데 하나였다. 그 기억은 예술가의 것이기도 하지만 희생된 개인이나 남겨진 이들, 그리고 사회를 위한 기억이기도 했다. 어떤 방향을 택하든 남겨진 기억을 다룬 예술의 역할과 결과물은 실로 다양했다. 기록물의 작업이 되었고, 치유의 작업이 되기도 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속 애도 이론이 애초에 우울증 환자를 위한 치료적 목적이었음을 상기할 때, 사회적 죽음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예술도 감성적 치유의 측면에서 그 의도를 일정 부분 품고 있다. 망각에 저항하거나 연대를 통한 적극적인 애도의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상실을 끊임없이 되새겨준다.
‘애초에 미술은 애도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박영택 교수는 그의 저서 <애도하는 미술>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사유를 보여주려는 미술은 결코 죽음을 회피할 수 없다. 이미 인간 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떨쳐낼 수 없는 비극적인 조건 속에 놓여 있다. 그 안에서 미술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아마 ’ 애도’ 일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예술의 애도 작업이 무조건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시각 예술은 ‘재난과 타인의 고통은 예술적 재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고민을 해왔다. 이는 재현을 통해서만이 애도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죽음이 주제나 소재, 영감으로서 작품에 영향을 주게 될 때, 일정 부분 사건과 타인에 대한 재현이 개입할 수 있음에 대해 재현의 윤리학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한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나는 스펙터클은 좋은 예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는 타인의 죽음과 고통이 소비되는 이미지로서 여겨질 가능성이 큰 스펙터클은 예술이나 어떤 행동에서도 애도의 의미에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전 손택은 저서 <타인의 고통>에서 가장 자극적인 이미지로 텔레비전이나 영화보다도 사진을 손꼽았는데,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의 기본적인 단위이자 고정된 기억이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 또한 그것이 설령 영상물이라 할지라도 존재적으로 정지된 채 전시되는 대다수의 경우로서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지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그 작품이 가진 이미지는 그 기억을 고정적으로 만들 위험과 타인의 시선으로 제작한 의도 했거나 의도치 못한 하나의 기억을 남길 위험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술의 애도는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
당연히 전시와 작품 속에 답이 있을 것이다. 애도의 방식은 작품을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 달라질 수 있고, 작가의 생각과 태도에 따라 과정과 결과물은 또 달라질 것이다. 그보다는 예술의 애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옳은 편일 것이다. 예술의 애도에는 윤리적 고민과 책임이 뒤따른다. 사회적 죽음을 다루는 일에 있어서 예술의 애도는 오히려 타자와의 거리를 두는 자세가 필요하다. 작가의 개인적 감상으로 무게중심이 무너질 경우, 사회적 죽음의 의미는 변색되기 때문이다. 타자의 타자성을 존중할 때 의미를 가진다. 사회적 죽음이라는 것이 결국 낯선 타자를 다루는 일인데, 개인의 감흥으로 낯선 타자를 소재 삼는 일이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낯선 타자이기에, 그에게 공감하고 연대하기 위해서는 더욱 그를 존중해야 한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그의 신념과 생각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또한 시대와의 호흡도 중요하다. 오늘날 무수한 기념비들이 구시대적 유물로 취급받는 현실에서 보다 미래적인 것을 향해 대중과 소통하고 나아가는 일은 기억을 만들어감에 있어 중대한 고려사항이다. 모든 것이 시끌벅적하게 지나가고 난 후,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적 죽음이 애도되어야 할 이유를 예술이 답할 수 있을 때 진정한 미래적인 교감은 시작될 것이다.
끝으로 레비나스가 말한 환대의 태도에서 예술의 애도 태도를 생각해 본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무력성과 상처 받을 수 있는 그의 취약성을 이유로,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 타자를 섬겨야 한다는 요청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타자를 환대하고 보살필 때 힘없는 타자를 죽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끼고, 끝내는 타자를 사랑할 수 있을 때, 죽음에 대한 불안은 사라진다.
거대담론 아래 소외된 개인을 기억하고 꺼내 줄 수 있는 역할은 누가 잘할 수 있을까? 그것은 열려있는 예술의 시각이 가장 잘 포착해 낼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런데 그 작업은 타인에 대한 애정과 섬김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다행스럽게도
타인을 받아들이고, 맞아들이는 관심과 책임감을
예술의 역사는
오랜 시간 증명해왔다.
그리하여 나는,
미래를 향한 예술적 애도의 열린 가능성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