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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무 Jul 15. 2020

소녀야, 소녀야, 그건 너의 착각

에밀 아자르 <솔로몬 왕의 고뇌>

불멸의 Immortel    죽음의 노예가 되지 않는.
 
이 단어는 언제나 나를 기쁘게 한다.
그 말이 거기, 사전 안에 있는 걸 확인하면 마음이 놓인다.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가면의 생>을 마지막 작품이라고 했다. 그러나 운명 같은 사랑 진 버그가 죽고(1979년) 같은 해에 <솔로몬 왕의 고뇌>가 출간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0년에 그는 파리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유서에서 그의 죽음이 진 버그의 죽음과 관련이 없으며 그저 '더 잘 말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죽음의 노예가 되지 않는, 불멸'을 숭상했음에도 왜 그는 스스로 죽음에 들어간 것인가?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아직 할 말이 더 남았었나 보다.

'삶'이라는 것, 그리고 그림자처럼 늘 뒤따르는 '노쇠', '죽음'에 대한 정리가 필요했던 것 같다.  


삶이 우리를 담보로 빚을 졌고, 우리는 삶이 와서 그 빚을 갚아주기를 줄곧 기다리고 있다고 말이야. 그런데...

(중략) 그런데 어느 순간 이젠 너무 늦었다는 자각, 삶이 결코 우리의 빚을 갚아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는 때가 오는 거야. 마드모아젤 코라의 경우처럼 말이다. 그래서 고뇌가 시작되지...(본문 p.236)


'지혜의 왕'인 솔로몬 왕은 유대 역사상 가장 영화로운 삶을 산 사람이다. 그러한 그조차도 성서 '전도서' 첫 장에 삶의 헛됨을 고백한다. 그렇다. 먼지 같은 인생을 논하기에 '솔로몬'이라는 이름이 적격이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전도서 1장 중)


영원불멸을 꿈꾸며 건강과 외모 관리에 온 정성을 다하는, 기성복(프레타포르테)의 성공한 사업가이자 유대인인 '솔로몬'. 그는 우연히 타게 된 택시 기사 '장'(화자, 자노 라팽)을 보고 깜짝 놀라며 기묘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는 장에게 '전화 구조회'에서 노인들을 위해 일해 주기를 요청한다. 두둑한 급여와 함께. 장은 솔로몬의 부탁으로 '코라 라므네르'라는 옛 샹송 가수를 찾아가 그녀를 위로한다. 한 때 아름다웠고 사랑받았던 그 늙은 소녀를 위해 장은 젊은 사람들만이 찾는 디스코장을 가고, 그곳에서 그녀는 옛 샹송을 부르며 술과 그리움에 취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연인 '부불리나'처럼 애처롭게, 사람들의 조롱과 야유를 모른 채로.


상상해봐

소녀야, 소녀야

상상해봐

그것, 그것, 그것이

영원히 계속되는 걸

그런 계절

그런 계절

사랑의 계절이

그러나 그건 너의 착각

소녀야, 소녀야

그건 너의 착각


스물다섯 살의 장은 세상의 조롱에 맞서 이 예순다섯 살의 슬픈 소녀에게 키스를 퍼붓고 잠자리까지 하게 된다.

개인적인 것이 아닌 보편적 사랑으로. 

내가 사랑을 나눈 대상은 그녀 혼자만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이었다. 호송 차량 칸칸마다 들어 있는 모든 죄수들이었다. (p.164)


이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장의 친구 척은 그에게 '구세주 콤플렉스'가 있다고 지적한다.

장은 로맹 가리의 분신이다. 그러니 스스로를 의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체성을 자기 자신에게 찾지 못하고 타인에게서 구하는 '타인 강박증'을 가지고 있다. '멸종하는 모든 것들'인 마드모아젤 코라를 구원하는 것이 '삶이 자신에게 준 역할'인 것이다.


로맹 가리는 <가면의 생>에서 작가로서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메시아적 소명 의식(구세주 콤플렉스)을 드러내기도 한다. 고통받고 소멸된 자들에 대해 빚진 자로서 그 빚을 갚기 위해 문학이라는 십자가를 진다.

나는 그랑 호텔의 내 방으로 올라와 신을 불렀다... "당신입니까, 아닙니까? 그걸 알아내지 않고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요" (중략)
"너 자신과 거리를 두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들여다봐. 서사, 파블로비치, 서사적 작품을 쓰는 거야. '자아'는 지나치게 내면적이고 제한적이고 이내 고갈되고 말지. 작가에게 인간이란 주제의 광산, 명실상부한 금광이야. 네 주위를 들러봐. 칠레, 수용소, 학살, 가혹한 박해 같은 걸 여전히 찾아볼 수 있잖아. 넌 위대한 작가가 될 거야, 아자르. 그들이 무용하게 죽어간 것이 아니야" (<가면의 생> p.214)



장은 정규 학교를 다니지 않은 독학자다. 사전은 그의 가장 믿을만한 교과서이다. 언어는 보이지 않는 세상의 추상을 기호화하고 그것을 통해 존재함을 증명한다. '사랑'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단어처럼.

"장, 어째서 자네는 언제나 사전에서 정의를 찾는 건가?"
"그러면 믿음이 생기니까요" (p.212)
사랑 Amour 어떤 가치에 대한 사심 없고 깊은 집착.
사랑 Amour 자신보다 상대방의 안녕을 원하고, 그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경향.
사랑 Amour (회화) 풀이 잘 묻을 수 있도록 캔버스에 일으켜놓은 보풀.
사랑 Amour (석고 작업) 석고를 만지고 난 다음 손가락에 남는 미끈거림 같은 것.


로맹 가리는 장과 알린을 통해 그의 영원한 사랑, 진 버그에 대한 깊은 사랑을 표현했다.


그녀를 알지 못한 채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올 수 있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내가 그녀 곁을 떠나는 순간 그녀의 모습은 점점 더 커졌다. 나는 길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정도로 그녀의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사랑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기에, 모든 이들이 그로 인해 죽을 지경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았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사랑 덕분에 죽을 지경에서 벗어나 삶을 살기 시작했다.(p.230)


사랑에 빠진 장은 너무 행복해서 불안하다. 우리도 그러하지 아니한가.

"행복을 느낄 때, 사람은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겁을 내. 그런 상태를 행복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말이야. 내 생각엔 영리한 사람이라면 평생을 바쳐 돌처럼 불행해지기 위한 준비를 했어야 해. 그러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말이야."
"당신이 행복해한다고 해서 삶이 당신을 벌주진 않아."
"잘 모르겠어. 알다시피 삶은 눈을 갖고 있고, 행복한 사람은 눈에 띄기 마련이라서 말이야." (p.239)


코라에 대한 장의 사랑으로 풍자된 보편적 사랑, 그 인류애는 개인적인 뜨거운 사랑 앞에서는 지겨운 사랑이다.

내 삶은 바로 내 것이 아닌가. 자노 라팽 같은 역할은 이제 신물이 났다.(p.324 )


솔로몬이 장을 처음 보았을 때 띄웠던 그 기묘한 미소는 코라를 향한 원한이자 복수의 미소였다.

솔로몬은 코라를 사랑했고 코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거칠게 생긴(장과 닮은), 나치의 앞잡이인 한 남자를 열렬히 사랑했다. 유대인인 솔로몬은 나치 치하에서 4년 동안 어느 카페 지하에 숨어있어야 했고 사랑에 빠진 코라는 그를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한 그녀를 원망하면서도 후에 궁색해진 코라를 물질적으로 도우며 무심한 척 그녀 곁에 맴돌았다.

코라는 후회한다. 그 당시 무모한 사랑에 빠져 솔로몬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었다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사랑은 그런 거라고.


솔로몬은 당당하게 노년을 살아가며 삶을, 죽음을 비꼬았다. 게토에서 살아낼 수 있었던 무기, 유대인식 유머로.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죽음을 인정해야 하는 그 현실에 분노하며 자신을 놓아 버리기도 한다.

"내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것은 이렇게 허무하게 죽음을 맞기 위해서가 아니라오, 젊은 친구들.
나는 노년을 제대로 누리고 살 생각이요. 그걸 명심하라고 (.. 중략)" (p. 360)
"그래서 지금 당장 창녀촌에 가야겠다는 거요!" (p. 361)


장은 솔로몬과 코라 사이를 오가며 절망에 차 있는 그 오래된 연인의 재회를 위하여 고군분투한다.

그들이 서로에게 진 빚, 고뇌의 종식을 위해.




로랭 가리는 유난히 노쇠와 죽음을 두려워했다. 그가 말한 대로 행복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달리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왜 삶은 무엇이 부족해서 자꾸만 남은 것들을 허기지듯 먹어가는가.


그러나 그 고뇌 앞에서 로맹 가리는 당당히 외쳐본다.

살아있는 자신과 아직 젊은 이들을 위해.


바람이 분다! 살아보아야겠다!

거대한 바람이 내 책을 열고 닫는다.

내 말을 믿는다면, 그대, 현재를 살아라,

내일까지 기다리지 말라, 

바로 오늘 삶의 장미를 꺾어라!


그는 1년 뒤 삶의 장미를 진짜로 꺾어버렸다.




어디서든 인간의 삶이란 시작되고 끝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환기할 필요가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삶에 지나친 기대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p.85)


모든 건 저절로 드러난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삶은 모든 것에 자신의 서명을 남기는 일을 가장 좋아하니까(p.171)


너는 네 고뇌를 사전 속에 있는 건조한 상태로 환원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려 하는 거야. 감정을 차갑게 식히는 거지. 눈물이 난다고 해보자. 너는 그 눈물로부터 멀어지고 싶어서 사전에서 눈물이라는 단어를 찾는 거라고.(p.181)


극기란 모든 것을 잃을까 봐 너무나도 두려워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모든 것을 포기하는 거랍니다. 그걸 고뇌라고 부르죠. 마드무아젤 코라. 두려움이라는 말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요.(p.270)


사랑은 이해하는 게 아니야. 그냥 그런 거야.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계산이 가능한 게 아닌 거야. (p.278)



에밀 아자르 <솔로몬 왕의 고뇌>

마음산책/김남주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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