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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라시아 Feb 21. 2023

연극, <김애란 단편선>을 보고

가난과 순수의 사람들.


문학과 지성사 인스타 스토리에서 우연히 '김애란 단편선'이라는 연극을 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을 두고 저녁 시간에 집을 비우는 건 참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쉽게 오지 않는 기회라 포기하기 어려웠다. 오십 여석으로 이루어진 작은 소극장, 맨 뒤 구석자리를 예매하고 오매불망 기다렸다.

공연 당일. 이제 혼자 '연극'까지 보게 되었다고 용기를 가져보려는 참이었지만, 공연 몇 시간 전에 조심스럽게 한 제안에 흔쾌히 오케이 해 준 친구와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평범한 아파트 상가. 낡고 오래되고 인적이 드문 곳, 지하에 소극장이 있었다. 이런 곳에 소극장이라니. 무대에 서는 것을 열망하는 젊은 예술인들의 열정이 느껴져 마음이 뜨거워진다.






반짝반짝.

반짝이는 이 화면은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 같았다.





연극은 김애란 작가의 단편소설집 <바깥은 여름> 중 '건너편', <비행운> 중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를 극화한 것이었다. 작가가 나에게 전한 수많은 이야기들 중 몇 편이, 어떤 작품이, 어떤 방식으로 연극으로 구현될지 궁금했었는데 각기 다른 소설집 중 두 편이 선택되었다.

'건너편'.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만나 8년 간 만나 온 그들이 수산시장에서 이별하는 이야기. <침이 고인다>에서도 노량진 수험생들의 이야기가 등장한 적이 있었는데, 작가는 실제 수험 생활 경험이 있는 것인지 싶을 정도로 노량진 고시촌을 덮고 있는 무채색의 슬픔과 애환을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낸다. 성인임에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 전까지는 진정한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없는 것만 같은, 마치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것만 같은 이수의 마음을 노량진에 한번이라도 몸담았던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노량진이 아니더라도 불안정한 미래에 모든 것을 걸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나치게 소란스러운 성탄의 수산시장, 이별을 통보하며 그들 주변의 그 소란스러움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정지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연극을 보며 마음이 아팠던 건, 이수와 도화 모두가 마음과 머리로 이해되어서이다.




도화는 국가가 인증하고 보증하는 시민이었다. 반면 자기는 뭐랄까,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애매한 성인이었다. 이 사회의 구성원이되 아직 시민은 아닌 것 같은 사람이었다. 입사 초 수다스러울 정도로 조직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던 도화가 어느 순간 자기 앞에서 더이상 직장 얘길 꺼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이수는 모든 걸 정리하고 노량진을 떠났다. (99)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누군가 찾아온대도 안개에 가려 결코 못 알아볼 것 같은 밤. 수백 명이 왕왕거리는 횟집에서, 모두 소리 높여 떠드는 가운데 아무 말도 않는 사람은 이수와 도화 둘뿐이었다. (116)
김애란, 바깥은 여름 - 건너편 중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명화와 용대의 이야기. 한국 땅에서 제일 무능하고 반죽 좋은 용대는 크게 사고 치고 밀입국한 명화와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하얗고 밝게 빛났던 명화과 위암에 걸려 점점 작아지고, 디딜 곳 없어질 무렵 세상을 떠난다. 지하 셋방이 점점 줄어들어 그들은 관처럼 작은 곳에서 살게 되는데, 이것이 마치 세상 속에서 그들의 자리가 점점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가난과 순수가, 모질게 찾아오는 불행히 안쓰러워 자꾸만 마음이 아팠다. 용대에게 중국어를 가르쳐주기 위해 명화가 녹음한 음성이 무대를 반복해서 울리는데, 왜 자꾸 눈물이 나는지.



손바닥에 땀을 닦고 악수를 건네자, 세상에서 제일 작은 부족의 인사법을 존중하듯, 웃으며 따라 한 북쪽 여자. 웃을 땐 하얗게 웃고 죽을 땐 까맣게 죽어간 여자.
김애란, <비행운>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중




소설 속 인물들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던 적이 많다. 김애란 소설의 많은 이야기, 그녀가 이름붙인 사람들이 무대에서 살아 숨쉬고 움직이는 것 자체가 참 신기했다. 언어를 아름답게 매만지는 작가의 솜씨와 수고가 헛되지 않게, 연극에서 나래에션으로 그대로 살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수많은 연극을 봐 왔지만, 나에게는 이 연극이 단연 최고의 작품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여태까지 연극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 적은 단 한번도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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