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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듀페미 Aug 18. 2021

일기(68)

그래듀페미 취미에세이 #6

2015년에 나는 내 돈 주고는 절대 살 것 같지 않은 디자인의 하드커버 공책을 하나 갖게 되었다. 기념일 선물이었다. 이 공책을 무슨 용도로 쓸까, 고민하다가 일기를 쓰기로 했다. 나는 평소 꾸준히 쓰는 일기나 다이어리 같은 취미에 무한한 동경을 지니고 있었지만, 태생이 무언가를 꾸준히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서 제대로 하나의 공책을 채워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함께 받은 꽃 한 송이를 잘 말려서 공책 표지에 테이프로 붙인 후, 정확히 2015년 10월 12일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2015 19개 

2016 1개 

2017 8개 

2018 0개 

2019 20개 

2020 7개 

2021 13개 


총 68개 


그리고 7년간 나는 68개의 일기를 썼다. 기간에 비해서는 초라한 실적이지만, 내 성질에 비해서는 대단한 성적이다. 7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이런저런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일기장만은 내 책상 한편에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되고 낙후된 고향에 때때로 찾아가듯이 나는 나를 찾는 모든 것에 골고루 관심을 주고 난 후 제일 마지막에야 일기장을 펼쳐보곤 했다. 68은 그렇게 쌓아 올린 숫자다. 


대부분의 초등학생처럼 나도 하루의 일과를 줄줄 써 내린 후 '참 재미있었다'라고 일기를 마무리한 추억이 많다. 2015년에 이 일기장을 쓰기로 처음 마음먹었을 때 나는 어느 정도 그런 일기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무슨 수업을 들었고 어떤 것을 먹었고 누구를  만났는지,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초반의 일기들이 채워져 있다. 하지만 2015년에 나는 다섯 평짜리 방에서 혼자 살았고 밤이면 온 세상에 혼자 남은 기분이 되어서 계속 어딘가에 접속하기 위해 떠다녔다. 게시판의 스크롤이 끝나고 타임라인이 멈출 때, 더 이상 누구에게도 접속할 수 없을 때 처음으로 나는 흘러넘치는 말들을 일기장에 담기 시작했다. 


일기를 쓰는 시간은 그래서 나 자신을, 또 나의 감정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하루 종일 경계를 알 수 없이 뭉쳐져 있던 감정의 덩어리를 잘 펼쳐서 그 모양과 색깔과 내용과 방향을 잘 관찰했다. 어떤 것은 아주 먼 과거로 연결되어 있기도 했고, 어떤 것은 바로 최근의 일로 연결되어 있기도 했다. 어떤 것은 여러 사건들과 사람들에게 동시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온 세상에서 숨기고 싶었고, 어떤 것은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어떤 건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고, 어떤 것은 그냥 흘려보내고 싶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지나간 일기를 다시 펼쳐볼 때, 거기에는 분명 나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돌아보니 무척 낯설고 새롭게 느껴지는 '나'들이 잔뜩 있었다. 


2018년에 일기장에 한 글자도 쓰지 못한 것은 아마도 그때 내가 나 자신을 돌아볼 시간도, 여유도, 마음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당시 나는 휴학을 하고 내 앞에 남아 있는 긴긴 인생을 어떤 일을 하며 보내야 할지 고민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어서 온갖 일을 벌여 두었다. 나는 그중 어떤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잠드는 시간을 계속 계속 뒤로 미루곤 했다. 어느 순간 새가 울고 주변의 공기가 파랗게 물들기 시작하면 나는 내가 몸을 누이고 있는 이 다섯 평짜리 공간이 아주 싫게 느껴졌다. 나는 어딘가 다른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일기장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결국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고 2019년에 학교로 돌아오면서 나는 때때로 다시 일기를 쓰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모든 관심이 고갈되고 어떤 곳으로도 접속할 수 없을 때만 일기를 썼다. 하염없이 나약하고 부정적인 문장들 속에서도 최소한 일기를 쓰고 나면 잠을 잘 수 있었다. 68개의 잠들지 못했던 밤들. 나는 적어도 문장으로 그 시간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할 때가 있었다. 


요새는 계속 꿈을 꾸는 기분이야
대화는 내내 길을 헤매는 것만 같고 (...) 
누가 내게 넌 이상하다고 말하면 나는 사라져 버리고 싶어
언제나 다른 드레스코드를 맞춰 온 사람처럼 살고 있어 
생계는 감도 잡히지 않는 한가운데 
생존은 아득하기만 한 경계선 위 


나는 대학에 입학한 후 한동안 기타의 코드를 배열하고 거기에 멜로디와 가사를 붙이는 일을 취미로 삼았었다. 나라는 인간이 그렇듯이 언젠가 그만두고 전부 잊어버렸다. 더 이상 노래를 만들지 않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그 후에 다시 노래를 만드려고 했을 때, 나는 더 이상 내가 가사를 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음의 배열들 속에서는 어떤 단어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문장을 찾으려고 내 일기장을 들춰 보았다. 나는 제멋대로 쏟아놓았던 문장들을 자르고 고치고 다듬어서 음의 배열 속에 끼워 넣었다.


난 아무것도 어떤 일도 하지 못하고 
여기서 운명과 미움을 끌어안은 채 
늘 어설프고 부족한 기분을 가지고 
그런 기분으로 계속 살아가야 하겠지 


노래를 완성하고 나서, 스스로도 몰랐지만, 나는 내 일기장이 오랫동안 나의 문장들을 저장해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2015년에 처음 이 공책을 갖게 될 때까지만 해도 나는 68개나 되는 일기를 쓰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때때로 문장을 전부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오면 나는 지나간 일기를 읽고, 또 그날의 일기를 적는다. 언젠가 필요할 때 내가 다시 이 문장들을 발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여전히 뭐든지 꾸준히 못하는 사람이고 날짜의 사이사이에는 자주 가늠할 수 없는 공백이 끼어든다. 그러나 일기장은 나를 타박하지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기다려준다. 빈 종이가 이제 고작 4장이 남은 내 일기장엔 한 달이 넘도록 아무것도 쓰이지 않고 있다. 나는 학교를 졸업한 후 잠깐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집에서 자격증 강의를 들으면서 단순하게 살고 있다. 내 마음에 어떤 분란도 일어나지 않아서 평온한 날에는 일기장을 떠올리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 또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오면 나는 일기를 쓰러 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내가 저장해둔 쓸쓸한 문장들과 다시 마주칠 것이고 오늘 밤도 이 문장들이 그렇듯이 자연스럽게 흘러갈 거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답답한 기분을 안은 채로 샤워를 하면서 그런 기분들을 일기에 적어야겠다고 생각했고, 내 무겁고 부정적인 감정들을 일기로 적는 것이 내게 어떤 치유와 같은 작용을 한다고 생각했다. 실체 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구체적인 문자와 종이의 물성으로 사로잡는다는 점에서. (...) 

깨끗해지고 나니깐 그리고 그 감정들을 글자로 옮겨놓고 나니깐 무척 가벼워진 기분이 든다. 

_5월 15일 일기





Edited by. 로라

생활인이 되기 위해 노력 중인 페미니스트. 글 쓰는 걸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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