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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듀페미 Aug 19. 2021

즐거우면 그만이지

그래듀페미 취미에세이 #7

나는 쾌락에 약하다.


내 하루는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을 쫓아 굴러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는 이런 내가 싫었지만 이제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쩌랴, 아무래도 난 자극이 좋은 걸.


혹자는 도파민에도 중독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쉽게 중독되는 체질이다. ‘난 이런 사람이야’라고 생각만 해왔는데, 어느 날 내가 성인 ADHD라는 진단을 받았다. ADHD가 뭐지? 찾아보니 ADHD를 가진 사람은 무엇이든 중독될 확률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훨씬 높다고 한다. 그뿐인가, 충동적이고 산만한 경향이 있다고도 한다. 어떤 설명이든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숨기고 싶고 긍정할 수 없었던 나의 일면들이었다. 그것을 의학적으로 증명받는 경험은 괴로웠다. 당신은 자극에 약하고, 충동적이고, 산만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변할 수 없습니다 하고 누군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 경험이 있었기에 나를 받아들이는 일이 가능해졌다.


취미 얘기로 넘어가 보자. 소개하고 싶은 취미가 두 가지 있다. 그중 게임에 대해 먼저 얘기해보겠다. 내 휴대폰에는 모바일 게임이 10개 이상 설치되어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이 중에서 8개 이상의 게임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휴대폰, 태블릿, 노트북, 데스크톱으로 동시에 네 종류의 게임을 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확실히 산만하다.) 새로운 게임이 나오면 일단 다운부터 받았다. 아니다 싶으면 바로 삭제하고, 재밌으면 며칠 밤을 새워가며 했다. 그러다 흥미가 떨어지면 다음 게임으로 넘어갔다.

휴대폰의 게임 폴더. 최근에는 하지 않는 게임들이 모여있다. 자주 접속하는 게임은 홈 화면에 꺼내 둔다.

지금은 이 소재로 글을 쓰고 있지만 아주 오랫동안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은 얘기였다. 취미가 뭐예요? 하는 질문을 받으면 영화 좋아해요. 하고 습관처럼 대답했다. (스포하자면-곧 소개할 다른 취미가 영화다!) 물론 나는 영화가 좋다. 하지만 내가 여가시간의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것은 게임이었고, 이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감각은 나에게 찝찝한 기분을 남겼다. 사실 내 ‘진짜’ 취미는 의미 없는 게임 찾아다니기 아닐까? 이렇게 변변찮은 일이 정말 내 취미인가?


이쯤에서 두 번째 취미, 영화를 소개하겠다. 나는 영화를 사랑한다. 이 감정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난 영화가 주는 감각을 사랑하고, 스토리를 사랑하고,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인물들을 사랑한다. 특히, 영화를 보고 친구와 몇 시간이고 얘기하는 것은 내가 가슴이 벅찰 만큼 사랑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누군가 취미를 물으면 나는 당연하게도 영화요, 하는 대답을 가장 먼저 내놓았다. 여기서 반전. 하지만 나는 영화라는 취미에 자신이 없었다. 왜냐? 영화를 잘 보지 않기 때문에.

6월부터는 본 영화들을 노션에 기록해두고 있다. 달에 두세 편 정도 보는 듯.

영화를 사랑하면서 잘 보지 않는다니, 이렇게 모순적일 수가! 하지만 여기에는 내 나름의 이유들이 있었다. 일단은 영화표가 너무 비싸졌다는 것. 그리고 난 돈이 없다는 것.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어느새 비싼 취미가 되어있었고 부담스러운 지출은 내가 영화관에 가기를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가 됐다. 그럼 집에서 저렴한 OTT 서비스를 쓰면 되잖아?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집중력이 약하다. 웬만큼 재밌지 않고서야 10분을 못 넘기고 일시중지를 고민하는 나에게, 집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닿을 듯 말 듯 멀어지고 내찜콘 리스트는 쌓여만 갔다. 이쯤 되니 의문이 들었다. 영화는 내 취미가 맞나? 한 달에 한 두 편 볼까 말까인데 취미라고?


이렇게 나의 두 가지 취미에 대해 소개했다. 이 문장이 내포한 의미는, 내가 지금은 둘을 모두 내 취미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 과정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의문은 오랫동안 이어졌고 잘 해소되지 않았다. 해답의 실마리를 찾는 데에는 그래듀페미의 역할이 컸다. 그래듀페미 사람들이 각자가 생각하는 취미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내가 가진 생각들도 하나씩 정리되어갔다. 남들 보기에 번듯해야만 취미인가? 아니지. 나 좋자고 하는 게 취미지. 자주 하고 ‘전문가’ 여야만 취미라고 부를 수 있나? 아니지. 나.좋.하 = 취미지.


이제는 취미가 뭐예요? 하는 질문을 받으면 게임 얘기를 할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젠 게임이 취미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다. 나는 새로 나오는 게임을 마구잡이로 해보는 게 좋다. 유치하거나 조잡하거나 이상한 번역체를 쓰는 게임이라도, 일단 해보는 게 좋다. 그러니까 이건 내 취미다. 지우고 나면 기억에 잘 남지 않고 할 말이 없더라도, 하면서 재밌으면 그만이다. 취미에는 다양한 목적이 있고, 그중 하나가 ‘쾌락’ 아니던가? 어떤 취미는 자극으로 그 역할을 다하는 거다. 마찬가지로 영화도 내 취미가 맞다. 난 영화를 사랑하니까. 좋은 영화를 보면 벅차고 설레니까. 일주일에 적어도 한 두 편을 챙겨보고, 신작이라면 나오자마자 봐야만 영화가 취미인 사람인 걸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고! 한 달에 한 편이던 두 달에 한 편이던 내가 즐거우면 취미라고 부를 수 있는 거다. 취미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성실할 필요도, 꾸준할 필요도 없다. 내키면 하고 안 내키면 말면 그만이다. 나 좋자고 하는 일인데 억지로 할 필요가 있나. 무엇보다도, 취미라고 부르기 위해 남에게 증명할 필요가 없다. 취미가 돈이 된다는 말이 취미도 전문적이어야 한다는 말과 동치가 아닌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취미에 기준과 조건을 붙이기 시작한 것 같아. 그래서 나는 이 글을 끝까지 읽어준 인내심 많은 독자에게 이 말을 권하며 마무리하고 싶다.


즐거우면 그만이지!





Edited by. 시호

즐겁게 살고 싶은 페미니스트. 커버 이미지는 최근 감명 깊게 본 영화 루카(Luca, 2021)의 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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