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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듀페미 Aug 23. 2021

자유로운 햄스터들의 세상

그래듀페미 취미에세이 #9

지금으로부터 100년쯤 전,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저서 <자기만의 방>에 이렇게 썼다.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 100년 후, 이 말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면 이렇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여성이 취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


나에게 취미의 세계가 열린 것은 2021년 7월이었다. 그때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것처럼 돈과 자기만의 방이 생겼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한 두 달 정도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을만한 경제적 여윳돈과 나 혼자서 보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생겼다. 내가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동시에 가져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누가 봐도 재미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이었다. 매일 아침 6시, 자리에서 일어나 1시간 동안 달리기를 한 후 씻고 출근했다. 야근을 하면 밤 10시쯤, 야근을 하지 않으면 저녁 7시쯤 퇴근했다. 퇴근을 하고 나면 냉장고에 있는 음식을 꺼내 허겁지겁 유튜브를 보며 먹었다. 먹은 것들을 모두 정리하고 나면 빈둥빈둥 앉아서 SNS 속 친구들의 일상을 훔쳐보았다. 누구는 국내 여행을 갔고, 누구는 멋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고, 누구는 홈카페 영상을 올렸다. 나는 국내여행도 가지 않고, 멋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지 않고, 집에서 커피 한 잔 마시지 않은 채로 오후 11시면 잠에 들었다. 더 늦게 자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 나는 달리기를 해야 하고, 또 출근도 해야 했으니까.


꾸질꾸질한 5평 집과 나


문득 어린 시절에 잠깐 키웠던 햄스터가 생각났다. 하루 종일 쳇바퀴를 타던 햄스터는 가끔 자신의 속도에 못 이겨 우스꽝스럽게 쳇바퀴에서 넘어져 떨어지곤 했다. 떨어진 햄스터는 잠시 이게 무슨 일인지 생각하는 듯 땅바닥에 붙어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다가 햄스터는 곧 다시 쳇바퀴 위에 올라가서 발을 굴렸다. 내 모습이 딱 그 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햄스터보다 못한 것 같기도 했다. 햄스터는 쳇바퀴를 타는 것을 좋아했지만, 나는 지금 하는 일을 사랑할 수 없었다.


쳇바퀴에서 떨어지기 직전에 일을 그만두었다. 높은 노동시간, 많은 일, 박봉,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 꿈을 이룰 수 없다는 좌절감들은 약봉지 속의 몇 알의 알약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그 시간들이 나에게 우울증 약물로만 남지는 않았다. 아주 작긴 하지만 그 시간들은 임금노동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돈과 시간을 남기기도 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한 달 동안은 취뽀(취업 뽀개기)를 하지 않고 존버(존나 버티기)하기로!


백수가 된 첫날, 느지막이 일어나 햇빛 아래에서 달리기를 했다. 항상 취미를 묻는 사람에게 달리기가 취미라고 대답했었는데, 아침 6시에 부랴부랴 달리는 것과 오후 12시에 설렁설렁 달리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아침 6시, 바닥만 보고 달렸던 나는 조금 더 여유롭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동네 골목을 따라 뛰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동네 산책하는 모습도 보고, 귀여운 강아지들도 마주할 수 있었다. 체력을 빨리 키워 일을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어지니 더 차분하게, 더 잘 뛸 수 있었다. 덥고 힘들 때는 그냥 걷기도 했다. 그 속에서 나는 동네 비건 베이커리를 찾기도 하고, 예쁜 바지를 싸게 파는 곳을 찾기도 하고, 우리 동네 보건소와 도서관이 어디 있는지 발견하기도 했다.


동시에,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영어 책 한 권을 제대로 읽고 싶어 영어 과외를 시작했고, 유튜브를 해보고 싶어 영상 편집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영어 공부가 죽도록 싫었었는데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시험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닌 영어 공부는 나름 재미있었다. 영상 편집 툴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내가 어느 순간 컷 편집과 속도 변환 등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러다가 내 인생 세 번째 책을 출판할 계획도 짰다. 평소에 좋아하던 친구들에게 책을 내보자고 설득하고 회의를 거쳐 계획서를 확정했다. 그 계획서를 출판사에 송고하며 인세로 억만장자가 되는 상상도 했다. 언론사 정기 기고도 하나 더 하기로 했다.


퇴사 기념 새 운동화를 신고 운동을 나간 날


이 모든 일들을 하며 꽤나 바빴다. 하루 종일 우울하게 누워있거나 아무것도 안 한 날이 하루도 없었다. 일정이 없는 주말,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과거의 나와는 달랐다. 바빴음에도, 이 모든 일들이 너무 즐거웠다. 행복했다. 뿌듯하기도 했다. 그건 마치, 좁은 케이지 속 쳇바퀴가 아니라 풀밭을 뛰어다니는 햄스터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이렇게 추진력이 좋은 사람인지, 내가 이렇게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되고 싶은 것이 참 많고, 성공하고 싶다는 열망이 이렇게 큰 사람인지도 처음 알았다. 취미가 무엇인지 묻는 사람에게 달리기만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나는 더 풍부하고 많은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 왜 소중한지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하는 것들이 타인에게, 그리고 세상에게도 좋다는 확신도 들었다. 조급함과 초조함, 죄책감 없이 드디어 나는 처음으로 ‘취미’를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돈과 시간이 있기에 가능했다.


모든 사람이 충분한 액수의 돈과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어떻게 될까? 많은 이들은 사람들이 ‘하고 싶은 것’만 하게 될 것이라며 걱정하고는 한다. 그런데 나는 ‘하고 싶은 것’만 한 7월 한 달 동안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좋아하는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세상의 가능성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세상에 유의미한 말들을 쏟아낼 수 있는 다양한 방안들도 상상해볼 수 있었다.


하고 싶은 것들로 바꿀 수 있는 세상은 나 자신이 바뀐 것만큼 무궁무진할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 하고 싶은 것들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사고가 정설처럼 받아들여지는 지금, 그 간격을 깰 수 있는 방안들을 고민해보고 싶다. 그게 기본소득이든, 임금 인상이든, 아니면 노동시간 단축이든 말이다. 우리가 조금 덜 일하고 더 많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다면, 그래서 거대한 취미의 세상이 열리게 된다면, 우리는 변화할 것이다. 세상도 좀 더 좋게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세상이 기대된다. 자유로운 햄스터들의 세상이 오길.





Edited by. 두팔

6월 말 퇴사 후 백수라이프를 즐기고 있습니다. 가수 김제형을 좋아하고 그림, 운동, 음악 듣기, 트위터 하기 등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수많은 일들의 가치가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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