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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듀페미 Aug 24. 2021

나가며 : 복수의 서막

그래듀페미 취미에세이 #10

2018년 총여학생회 폐지 사태 이후 2019년에 대학 페미니스트 공동체 유니브페미를 구상하면서 ‘우리는 어떤 페미니스트 세대로 기억되고자 하는가’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다. ‘영페미’라 불리는 90년대의 페미니스트들은 성폭력특별법 및 대학 반성폭력 학칙 제정, 호주제 폐지 등 제도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우리는 디지털성폭력과 온라인 혐오표현에 대항하고 차별금지 학칙을 만들자, 페미니스트 총학생회를 세우자는 게 결론이었다.


어느덧 졸업이 다가오고 있었다.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는 점점 강해져서, 여남공학 대학에서는 ‘페미’의 ‘페’ 자도 꺼내기 힘들어졌다. 게다가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학기가 길어지면서 물리적 공통감마저 상실한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젠더 정의를 실현하기란, 아니 운을 떼기란 더 어려운 일이 되었다. 역사적 사명 같은 것보다도 총여학생회 폐지를 주도했던 학생 대표자들이 그토록 폭력적인 방식으로 총여학생회를 폐지한 것을 꼭 후회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들도 우리도 어김없이 졸업이다.

   

백래시가 반복되는 만큼 학내에 남아서, 혹은 새롭게 활동을 만들어가고 있는 페미니스트들이 있다면, 우리는 학교를 떠나는 페미니스트들에 속했다. 더 이상 ‘대학생’ 신분이 아니라, ‘청년’ 또는 ‘취준생’, ‘활동가’, ‘직장인’으로 불리며 살아갈 우리.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를 요구받으면서 사회의 성차별을 온몸으로 느끼는, 바쁘고 정처 없는 우리가 ‘그래듀페미’로 모였다. 그래듀페미란 졸업하거나(graduated) 졸업을 앞둔 페미니스트를 지칭하는 말로, 유니브페미에서 2021년 3월부터 이어온 취미모임의 이름이기도 했다.


수도권 코로나 상황이 잠시 나아졌던 7월, 그래듀페미 오프라인 취미모임을 마치고 촬영한 단체사진. 격주 일요일 오후 3시, 홍대 부근에서 모여 취미토크를 나눴다. ⓒ유니브페미


격주로 그래듀페미들과 모여서 서로의 취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냥, 재미있었다. 같은 학교도 아니고 관심사도 다른데 오랜만의 근황이나 젠더 이슈에 관해 몇 마디 나누다 보면 편안했다. 그거면 되었다. 무한경쟁·각자도생의 현실 속에 갑자기 혼자가 되어버린 느낌보다는 느슨하게나마 어딘가에 속해있는 기분이 나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그저 시시콜콜하게 나눌 수 있는, 신뢰와 적당한 거리가 바탕이 되는 여성주의적 공간이 필요했으니까.


4개월간의 모임을 마치며 우리가 무엇으로 기억되지 않더라도, 혹은 어떻게 기억되든 간에 이렇게 매일매일 나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 페미니스트들이 계속 페미니스트들로 나이 드는 게 어쩌면 최고의 복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복수는 하루하루 달성되고 있는 셈인데, 어떤 드라마에서도 이렇게 공익적인 복수는 본 적이 없었다.) 코로나만 아니었으면 졸업식 날 학교에 이런 현수막을 걸었을 것이다.


백래시로 승리하고 학교를 졸업했다고 안도하지 말고, 우리가 바꿀 세상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충분히 부끄러워하기를. 그리고 언젠가는 함께 시시콜콜한 과거를 회상하며 웃을 수 있기를.
- 그래듀페미 일동


다들 무시무시한 복수의 서막에 해당하는 그래듀페미의 취미에세이를 마음껏 즐겼기를 바란다.





Edited by. 서영

대학 졸업 후 그래듀페미 취미모임을 만들었다. 미끄러지고 헤매면서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에 대해 고민한다. 승부욕이 강하고 교훈적 글쓰기에 대한 강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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