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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nnie Volter Jul 19. 2017

체육복 분실사건

중2 여름이었다. 당시 학교는 예산 절감이라는 치장을 벗고 교실에 에어콘을 도입하느냐 마느냐로 학부형회를 하던 시절이었다. 교실에는 천장에 달린 선풍기 4대가 전부였고 체육수업이라도 다녀온 이후에는 그야말로 화생방과 다름없는 화학전을 치루었다.  

당시 우리반은 합반이었는데 여학생들의 고충이 특히 심하였다. 남자들이야 원래 더럽지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여자애들은 더러운 것을 허용하지 않는 시선이 있었기에 남자로서는 알 수 없는 맘고생도 있었으리라.  

아무튼 그런 상황에도 어김없이 체육시간은 찾아왔고 남자들은 화장실로, 여자들은 교실에서 체육복을 갈아입으려는 그 때 나에게 위기가 찾아왔으니 분명히 사물함에 넣어두었던 체육복이 없어진 것이다. 당시 체육복은 교내에서 도난을 당하기 가장 쉬운 품목이었고 주변의 친구들 모두 한번씩 홍역을 치르면서 어떤 녀석은 분풀이로 다른 녀석의 것을 가져가고 어떤 녀석은 부모님 카드로 한번 더 사곤 했다. 친구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나는 '저런, 맘이 아프네'라며 토닥이는 척만 쭉 해왔는데 막상 내가 그 꼴이 되니 분노가 머리 끝까지  꽉 차올랐다. 재수없게 하필 내가 당하다니.  

체육수업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10분. 지금 옷이 있다손 쳐도 재빨리 갈아입고 나가야 간신히 수업에 참여할 수 있는 상황이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비평준화지역이라 체육복 미참으로 수업이라도 못나갈 경우 내신 성적에 상당한 악영향이 있었다. 나는 발에 불이 나도록 친구들이 있는 다른 반을 뛰어다니며 체육복을 빌리려 했지만 다들 땀투성이가 될 걱정에 하나같이 거절하였다. 본인이 입고 운동해야할 옷에 아무리 친구라지만 땀이 묻을 경우 싫을 수 있지. 충분히. 

이번엔 어쩔 수 없겠구나하고 포기하던 그 때, 당시 나랑 같이 과외를 받던 여자사람친구가 나에게 체육복을 빌려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신장이 나랑 비슷한 아이여서 입는다면 큰 문제는 없었지만 문제는 성별. 남자들도 빌려주기 꺼려하는 체육복을 여자아이가 대뜸 빌려주겠다고하니 미안해서라도 받을 수 없었겠지만 나는 달랐다. 아주 잠깐의 망설임 후에 때뜸 체육복을 받아들며 말했다. 
"땡큐! 이 은혜 안잊을게." 

그 친구 덕분에 무사히 체육수업을 마칠 수 있었고 나도 양심이 있는지라 그 날은 기본적인 수업만 하고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 체육복은 깨끗이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친구에게 세탁 후 돌려주기 위해 집으로 옷을 챙겨가려고 하는데 그 아이가 한사코 그건 안된다고 했다. 내가 이유를 물었더니... 
"니가 다른 데 쓸지 어떻게 알아?" 

남자애한테 체육복은 빌려주는 것은 되어도 남자애가 옷을 세탁해서 돌려주는 것은 안된다는 논리. 당시의 나로서는 이해가 안되어서 대뜸 내가 더러워서 그런거냐고 따졌지만 여자애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에서 체육복을 낚아채 가져가버렸다. 

이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를 안고 집에 온 나는 고등학교 가정교사 출신인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이유를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대답 대신 한 마디만 하셨다.
"가한테 잘해주라. 잘해주면 복 받을끼다."

그 때는 이 말의 의미를 몰라서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냥 그 일을 무심코 넘겨버렸다. 한참 후,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갈 때쯤 다른 친구를 통해 그 친구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는데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하였다. 나는 문득 아쉬운 맘이 들어서 당시 유행하던 싸이월드를 뒤져 그 친구의 홈페이지를 찾아서 잘 다녀오라는 안부 메세지를 보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록 그 친구에게서 답변을 받진 못하고 있다.

지나고 난 후에야 놓치고 난 후에야 소중한 사람이었음을 깨달은 첫 번째 경험, 이후에도 몇번이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주변에 남은 사람이 얼마 없고 나서야 그 아이가 그 때 얼마나 큰 용기를 낸 것인지, 어머니가 왜 그렇게만 얘기하신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바보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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