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냥 아이를 껴안을 뻔했다
‘갈랍’이라는 단어가 떠올라서였다. 이제는 갈랍을 부쳐야지. 몇십 년 전 엄마 목소리가 종종 귀를 넘나들었다. 가을쯤 돌아오는 시향 제사에 추석이나 설날이면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기제사까지 지내는 종갓집에서 자란 탓에 제사 관련 의례나 음식 준비하는 걸 자주 보고 도왔다. 아버지는 수돗가에서 닭을 잡아 털을 뽑고 모래주머니를 다듬었다. 두부를 부치고 녹두지짐이나 갈랍을 할라치면 장작불로 숯을 만들어 빨갛게 불을 피워 화로에 담아놨다. 불덩이 위에 ‘가생이’를 잘라내 꽃잎날개처럼 접은 양철 덮개를 놓고 둥그런 솥뚜껑을 뒤집어 올렸다. 옆 옆에 기름병을 준비하고 무를 손잡이처럼 철(볼록할 凸)자 모양으로 깎아 기름을 따라놓은 종지에 담갔다. 갈랍 양푼이 오면 전 부칠 준비 끝.
흙 다져진 봉당은 화로의 자리다. 나나 엄마, 전 부칠 사람은 마루 끝에 앉는다. 돼지고기와 간을 잘게 다진 것에 파, 당근, 두부, 숙주를 다져 넣고 계란을 여러 개 깨서 섞어 저은 되직한 갈랍 반죽거리를 뜨겁게 달군 번철에 한 숟가락씩 올려서 지글지글 익히면 된다. 뒤적이며 부쳐낸 노랗고 거무레한 갈랍은 채반에 한 김 나가게 올리거나 그전에 내가 몇 개 집어 먹는다. 제사상에 올릴 것을 먼저 먹으면 안 된다면서도 기름지고 따뜻하고 간간하고 부드러운 갈랍을 내가 먹고 입에 넣어주면 엄마도 손사래를 치며 맛있게도 먹었다.
결혼을 해서 권 씨네가 아닌 황 씨네 제사를 지내러 가보니 과일 빼놓고 제사 음식이 판이하게 달랐다. 우리 집에서 갈랍이라고 부르던 그것을 동그랑땡이라 불렀고 동그랑땡은 반죽을 한 후 손으로 동그랗고 두껍게 빚어서는 밀가루와 계란 푼 물을 묻혀 부쳐냈다. 속까지 익으려면 약한 불에 부쳐야 타지 않으므로 시간이 꽤 걸렸고 바닥에 앉아 부치느라 다리가 저렸다. 다 익은 동그랑땡은 너무 동그랗고 통통해서 먹기에도 퍽퍽한 편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대왕문어가 통째로 한 마리 꽃 모양으로 턱 올라가 있는 것은 족히 시각적인 충격이었다. 바다가 없는 충북 산골 종가 운운하는 우리 집 제사상과 바닷가 동네 통영이 고향인 시어머니의 제사상은 냄새부터 달랐다. 문화 충격을 연달아 받으면서 옛날 엄마, 갈랍이 있던 제사상이 그리워졌다. 아무튼 수십 년 동안 ‘갈랍’이란 단어는 내 머릿속에만 살아있었다. 오랫동안 모든 사람들이 동그랑땡을 부치고 먹었지 갈랍을 부쳐 상에 올리진 않았다. 그랬는데… 엄마, 시어머니 다 돌아가시고 이제 내가 그분들 기일을 맞이하는 상황이 되었다. 시간은 흘러가고 사람들은 왔다가 사라져간다.
처음으로 제사를 차려 지낼 궁리를 한다. 아주 골몰해서는 아니고 그냥 자연스럽게 ‘엄마 제사’라는 말을 떠올린다. 무슨 음식을 할까. 제사 음식은 잘 아는 편이다. 돌아가신 엄마가 좋아했던 것 몇 개, 살아있는 딸들이 좋아하는 것 몇 가지를 준비해서 가만히 인사나 해볼까 하는 마음을 먹어본다.
일찍이 출판사에서 《나는 제사가 싫다》라는 책을 만들었던 내가, 공영방송 9시 뉴스에 그 책을 쓴 필자를 인터뷰하게 만든 내가, 결혼해서 시댁에 가 낯선 제사상을 차리면서 혈변을 쏟아냈던 내가, 먼저 태어난 우리 딸보다 늦게 태어난 큰집 아들을 앞세워서 절하게 한 시어머니에게 한을 품은 내가, 언니, 오빠 다섯 명이나 있는 막내인 내가 순하게 엄마 제사 지낼 마음을 먹는다. 시키는 사람 없고 강요하는 사람 없어 밀어붙이는 이도 없으니 그냥 그렇게 된다. 그까짓 제사쯤이야. 싫고 좋고 할 이유도 없다. 그저 내 엄마니까.
당신이 살아있다가 떠났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 그 얼굴을 잊지 않았다는 기억의 흉내라도 내고 싶으면 내가 차리고 인사하면 되는 거지 큰아들, 큰 손자, 큰 며느리 쳐다보고 이제나저제나, 설마, 혹시 하면서 욕할 일은 아니므로 내 마음은 정녕 맺힘 없이 움직여진다. 내가 제사를 지내자.
감주를 만들 수는 없겠구나. 테이블보를 흰색으로 바꿔야지. 교자상도 버려서 없구나. 제기도 하나 없는데 흰 접시면 되겠지. 아버지가 지방 쓰는 것을 여러 번 봤기에 알지만 인터넷을 뒤져 다시 한자를 알아봤다. 그런데 지방을 써서 올려놓을 위패가 없구나. 기다란 촛대도 없다. 향도 친구에게 다 주었으니 피울 향도 없고 향로도 없다. 여행 가서 사온 동남아식 촛대를 찾아야지. 언젠가 불붙이고 기도했던 하얀 몽당 초를 꽂아야겠어. 종갓집 막내딸로서의 눈이 보배다. 순식간에 제사상이 한상 그려졌다.
빨갛고 노랗고 하얗고 분홍줄 무늬가 있던 동그란 옥춘(玉瑃)과자. 밥알이 붙어 있던 가벼운 산자, 끈적거리며 늘어나던 약과, 그리고 그 갈랍. 제사를 지내려고 했던 정서의 근원이 갈랍이었네. 아직도 그런 말을 쓰는 사람이 있을까. 내일이 제사인데 꼭두새벽 홀로 깨어 그 단어를 찾아본다. 고향은 충북인데 충남말로 나온다.
갈랍(명사)
‘돈저냐’의 방언(충남)
1. 동그랑땡이나 생선전 등 작은 전을 가리키는 말.
2. 갈랍=肝納의 변성어. 제사음식. 소의 간 또는 살코기를 잘게 다져서 계란을 풀어 동그랗게 모양내어 붙여서 올리는 안주격의 제물. 맛이 담백하고 부드러워 어린아이나 노인들이 먹기에 알맞다. 간랍干納, 肝納. ‘간납’의 변한 말.
제사 당일 아침, 두 번으로 나눠 시장을 봤다. 많이 살 것도 아니니 가장 좋은 것으로만 샀다. 이가 없어도 고기를 먹고 싶어하셨던 엄마를 위한 소고기 산적거리를 샀다. 마지막으로 소고기 한 근을 갈고 돼지고기 한 근을 갈아 두부와 당근과 양파와 쪽파를 다져 ‘갈랍’ 반죽을 만들었다. 동그랗게 빚어 동그랑땡 모양으로 만들어 딸 먹게 만들고 엄마를 위해서는 부드럽고 촉촉하게 만들었다. 소고기 산적 세 장이야 굽기만 하면 되니까 갖은양념으로 재워놓았다. 쓰다만 초를 물에 닦아 씻어 말렸고 지방은 한글 문서마당에서 프린트했다. 위패가 없어 하얀 스탠드 달력 뒤에 지방을 붙였다. 엄마 아버지 손잡고 오시라고 두 사람 신위를 다 올렸다. 낮은 교자상이 아니어서 입식 식탁 위에 제사상을 차렸다. 누구도 부르거나 알리지 않아서 우리 가족뿐이었다. 재택 근무하던 작은딸이 상 앞에 서면서 검은 바지를 입었고 서둘러 퇴근한 큰딸이 손을 씻고 검은 스커트를 입었다.
제기가 없어 그저 흰 접시에 올려놓은 탓에 ‘본 데 없는’ 제사상처럼 휘뚜루마뚜루 올린 건데도 딸들이 ‘정성 그 자체’라고 감동했다. 영정사진 대신 조그만 액자에 새로 찾은 사진을 꽂았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서울 구경을 와서 어린이대공원 벚꽃나무 아래 서 있는 젊은 엄마 모습이다. 모두 진설하고 나니 하나같이 어설퍼 보였지만 붉고 노랗고 파랗게 놓인 과일과 여러 전들이 제법 반가의 제사상 같아 보였다. 작은 원목 상에 백화수복 한 병을 주전자 한 개에 담고 퇴주잔으로 다른 주전자를 놓았고 돗자리가 없어 요가 매트를 길게 깔았다. 놀랍고 대견하게도 제사 모시기 바로 전에 무던이가 현관으로 달려가 철문을 활짝 열고 “할머니 할아버지 들어오셔야지”라며 스토퍼를 괴어놓았다. 영하의 찬바람이 세차게 들어왔다.
녹차 잔 두 개를 놓고 다 같이 모시는 첫 절을 올렸다. 나는 제사가 싫다고, 제사상 차리느라 여자들만 죽어난다고 제사를 없애야 한다고 절규하던 내가 이러고 있다. 막내딸이자 나름 제주인 내가 먼저 절을 하고 잔을 올린 후 나 없는 시간 동안 장모인 엄마를 찾아봐 준 막내 사위가 절을 올렸다. 어릴 때부터 많이 봐왔던지라 딸들도 자연스럽게 외할머니 앞에 읍(揖)하고 있었다.
어른스럽게 곱고 사랑스럽게 무던이가 나의 엄마에게 잔을 올리고 절을 했다. 그다음 둘째 미륵이가 잔을 올리려다 맨발인 것을 알아챘다. 고개를 숙이다 보니 맨발이었던 것. 아이는 바로 뒤의 서랍에서 까만 양말을 꺼내 신고 키득 웃으면서 절을 올렸다. 할머니 생전의 시댁 제사에서 그랬다면 바로 혼쭐이 났겠지만 우린 모두 막내답다고, 역시 제일 어려서 남다르다고 같이 웃었다. 미륵이는 심지어 지금 지내는 것이 제사라는 걸 까먹었는지 마치 세배 드리는 아이처럼 “아프지 마시고 건강하세요”라고 새해덕담 같은 절 인사를 했다. 아무리 새해가 된 지 며칠밖에 안 지났다 해도 그렇지, 게다가 이미 돌아가신 지 2년째인데 ‘아프지 마시라’니. 철모르고 생뚱맞은 그 모습조차도 귀염성이 흘렀다.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여기 오셨다면 딸내미 머리 쓰다듬으며 웃어주었을 거였다.
우리는 스탠딩 파티에 온 사람들처럼 입식 테이블 주위에 서서 퇴주 주전자의 청주를 나눠 마시고 갈랍을 한 점씩 먹었다. 마른 눈물이 두어 방울 흘렀던가. 이런 제사라면, 이런 마음이라면 엄마뿐 아니라 아버지, 남편, 엄마, 아버지 제사라도 내가 다 차려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우리는 2021년 1월 현재, 시대에 역행하는 사람인가. 제사가 싫다고 주장하던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수구적이고 보수적인 전통 중시주의자로 변한 무지몽매한 사람이 된 것인가. 다들 없애거나 간소하게 줄이는 이때 가지가지 차려놓고 둘러앉아 허례허식을 중시하는 사람이 된 것인가. 제사 자체가 싫었던 게 아니었구나. 남의 딸인 며느리들에게만 효와 정성과 일 더미를 강요하는 암묵 혹은 노골적인 남자들의 태도가, 뻣뻣하고 뻔뻔한 부계질서가, 딸 차별 여자차별이 소름 끼치게 싫었던 거였다. 그걸 다 떠나보내면 그저 하나밖에 없었던 엄마가 돌아가신 날을, 단 하루 기억하는 몸짓이면 되는 거였다.
마지막 절을 마치고 무던이가 현관문을 닫았다. 찬바람이 너무 세차게 들이닥치고 있었다.
“벌써 문을 닫으면 어떻게 해? 아직 여기서 안 나가셨을걸?”
“에이. 괜찮아. 아직 안 나가셨으면 그냥 여기서 계속 사시라고 하지 뭐.”
내 딸의 말이 하도 예쁜 데다 정다워 나는 그냥 아이를 껴안을 뻔했다.
“엄마 죽으면 뭐 놓을까? 엄마가 해주던 음식을 기억해서 놓아야 할까. 우리가 만들어야 할 텐데 언제 배우지? 음식은 하나도 못 하잖아. 콜라는 당연 차갑게 해서 놓아야 할 거고, 온 더 보더 퀘사디아 놓아줄까? 나초랑 살사도?”
“떡국 해줘. 김치만두랑. 죽어서 너희들에게 오게 되면 먹고 싶은 것이 그다지 많지는 않지만. 가만있자, 떡국, 리코타 치즈 샐러드, 만두, 그래 콜라 한 캔, 그거면 충분해. 너무 많나?”
산적이 너무 맛있어, 동그랑땡도 정말 맛있어(갈랍이라고 한단다)를 연발하며 딸들이 저녁을 먹는 동안 방에 들어와 보니 철상하며 내 방으로 옮긴 달력에 붙인 지방이 그대로였다. 아까 제사 마치면서 태워서 올려야 하는 건데 잊은 거였다. 곳곳이 허방이군. 뒤늦게 불을 붙여 지방을 태웠다. 개수대에서 훨훨. 프린트해 뽑은 지방 두 장이 불꼬리를 물고 재가 되며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