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케어하는 따뜻한 일상의 분위기
언젠가부터 나는 생물학적 남자인 누구와도 개인적인 관계를 갖는 것 내지 인간적인 소통 또는 마음을 주고받는 행위에 심드렁해졌다. 그냥 남자라는 인간 종류에 관련된 어떤 이야기에도 전혀 흥미가 돋아나지 않는 다소 심심한 상황이 이어지는 와중에 가뭄에 콩 나듯이(가뭄에 콩 나는 것을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 비유가 그저 그런 메타포가 아니라 절절한 진실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물 한 방울 없이 쩍쩍 갈라진 마른 돌밭에서 콩 떡잎 하나가 아기 손톱만 하게 간신히 올라오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여리고 가냘프나 치열한 생명의 기운) ‘오 제법이다, 참 좋구나, 정말 괜찮구나’라 느낄 때가 있긴 한데 그 사람은, 그 남자가 오로지 ‘혼자’ 살면서도! (미혼, 비혼의 상태라는 것뿐만 아니라) 아주 잘 먹을거리를 준비하고 요리해놓고 잘 먹고 잘 사는 걸 볼 때이다.
물리적으로 심정적으로 오롯이 한 사람으로 독립하여 자신의 공간에서(특히 부엌에서) 도닥도닥 음식을 만들고 홀로 혹은 여럿이 나누어 먹는 모양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사람, 그것을 체화된 사람을 볼 때만 새까맣게 잊은 남자 사람에 대한 매력과 약간은 비이성적인 호감이 새삼 콩잎 싹처럼 솟아나는 것을 느끼는 희귀한 순간이다. 연예인이건 배우건 작가건 늙거나 젊거나 어리든 오로지 음식 재료가 요리가 되어 먹을 수 있게 식탁에 놓이는 그 전 과정을 주재하는 남자이기만 하면 그를 둘러싼 분위기의 모든 게 예뻐 보였다. 호감의 도가 높아졌다. 나에게 밥상을 차려주는 게 아닌데도, 그가 그의 밥을 지어 먹는 것뿐인데도. 한 남자가 케어하는 어떤 이의 일상의 분위기가 따뜻할 것 같았다.
엄마 밥을 먹고 살다가 결혼한 이후 내가 해주는 밥상을 받아먹고 살던 십수 년을 지나, 이제 무던이 아버지, 내가 예전처럼 여전히 형이라 부르는 그 남자는 내가 없는 사이 부엌과 냉장고와 부식 창고를 완전히 장악해냈다. 인스턴트 알갱이 커피와 믹스 커피를 주로 마시던 사람이 어느덧 자유자재로 커피콩을 주문하고 손수 원두를 갈아서 드립 커피를 내려 마시게 되었다. 자기 커피 취향에 맞는 배전도와 산미를 가진 원두를 고를 수 있는 약식 바리스타 수준의 애호가가 되었다. 녹두를 불려 거피를 내고 돼지기름으로 구운 녹두빈대떡과 샤브샤브 양념 소스를 만들고 갖은 야채 드레싱을 골라 올리는, 제법 어려운 것부터 도전하더니 요리의 종류와 갈래를 넓히고 깊게 해 이제는 감자그라탕, 라자냐, 에그타르트까지 척척 해내고 있다. 나 혼자 있던 곳으로 ‘눈으로라도 먹으라’며 사진으로 보내는 바람에 차마 진실이랴, 나를 놀라게 했던 그때 그 음식들을 돌아온 후 다 직접 먹어봤다. 시간이 좀 오래 걸려서 그렇지 그가 해낸 음식들은 맛과 외양, 테이블 세팅까지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을 정도다. 못 보던 오븐용 도자기들, 요리사용 전문 칼 같은 요리도구는 언제 장만해 놨는지 서랍에서 찬장에서 툭툭 튀어나온다.
이 모든 것이 모두 다 내가 집을 떠난 덕이지 않으면 뭔가. 지금도 그는 여전히 다 큰 자식 둘을 열심히 먹여 살리고 있는 중이다. 그의 부엌살림 일정은 이렇다. 새벽에 일어나 수동 커피 그라인더에 원두를 간다. 어쩌다 잠이 깨어 나가보면 커피를 갈고 있는 몸짓이 도자기 굽는 옹기장이 같아 보인다. 종종 눈을 감고 반쯤은 졸면서 원두를 갈아내고 물을 끓여 커피를 내린다. 뜨거운 걸 못 마시는 걸 고려해 적당히 식히거나 생수를 부어 무던이를 마시게 한다. 그 사이에 토마토 두세 개에 유기농 설탕을 적당량 넣고 갈아서 빨대를 끼운 유리컵에 담아놓는다. 무던이가 토마토주스를 마시고 출근할 때 텀블러에 커피를 조금 담아 핸드백에 넣어준다. 몇 년간 토마토주스만 마시면 좋지 않다고 한마디했더니 격일로 선식이나 생식을 준비한다. 시금치나물과 멸치볶음을 꼭 먹어줘야 하고 국물이나 찌개가 있어야 좋아하는 미륵이용 반찬을 만든다. 고깃국, 된장찌개, 무국, 미역국 등으로 국물요리를 이틀에 한 번씩 변주해낸다.
미륵이는 커피를 안 마시니까 텀블러는 생략한다. 그리고 미륵이 도시락을 싼다. 김 몇 장을 굽고 마른반찬을 요모조모 담고 국물을 뺀 국건더기를 담아놓는다. 점심 시간에 여러 명과 외식하는 것이 어려워진 요즘은 무던이 점심 도시락까지 챙기고 있다. 엄마 도시락으로 여자 친구를 먹여 살린 남자가 딸 둘 도시락을 싸는 남자로 변신하게 된 세월의 신비에 박수!
저녁은 이름만 번지르르한 프리랜서인 내가 준비한다. 케이터링 서비스 셰프처럼 오더를 받고 차린다. 리코타 치즈 샐러드, 또띠아 피자, 뵈프 부르기뇽, 양배추 술찜 같은 일품요리를 차려낸다. 웬만하면 버거부터 치즈까지 모두 수제로 척척.
내가 없던 그때 그 시절, 회사 유니폼이나 정장을 벗고 ‘난닝구에 추리닝’을 걸치고 휘늘어진 두 딸에게 오븐에서 갓 꺼낸 각종 이탈리아 요리나 프랑스 요리를 대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아. 나도 어서 가서 저 음식을 먹고 싶다’는 마음보다 먼저 드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부재해줌으로써 그를 아주 괜찮은 남자 사람으로 만들어주었구나’ 싶은 대견한 맘 같은 것. 요리를 잘하게 된 아이들 아빠인 그 사람보다 지금 그들에게서 멀리 떠나와준, 본의 아니게 부엌을 완벽하게 양도해준 나라는 사람 이른바 살신성인의 자세와 용기를 먼저 칭찬해주고 싶은 거라고나 할까.
스무 살이 한참 넘은 나의 딸들은 도대체 또래 남자 사람들하고 놀기는커녕 만나지도 않고 아빠랑 그것도 ‘집’에서만 노닐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어쩐지 나는 그게 참으로 재미있고 좋아 보였다. 먼 나라에 혼자 앉아, 거의 폐쇄하다시피 한 덥고 뜨거운 부엌에서, 얼음도 없는 조그만 냉장고에서 미지근한 물을 꺼내놓은 보잘것없는 식탁에서, 뜨끈뜨끈한 침대 시트에 달라붙은 등짝을 떼어내면서, 가족 채팅방에 뜨는 온갖 먹거리 사진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꺼운 냄비와 서리가 낄 정도로 시원한 컵에 담긴 온갖 세계 맥주 라벨을 보면서… 뭐, 아주 기꺼운 마음이 되곤 했었다. 내가 없음으로써 훌륭하게 이루어진 그의 요리 접시들, 내가 돌아갈 때까지 50가지 요리를 완벽 마스터해놓겠다는 그의 호언장담이 뻐근하게 좋았다.
평생 자기 엄마가 해먹여 부엌에는 얼씬도 못 해본 사람을 나는 저 정도까지 성장하게 만들었다. 단지 그 부엌을 넘겨줌으로써. 그 집을 떠남으로써. 알아서 해먹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시간을 줌으로써. 다시 돌아봐도 다 내 덕인 것이다. 엄마로 여자로 그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선명한 길이 ‘요리 잘하는 사람’이라는 자리인데 나는 아빠라는 사람에게 그 영예의 자리를 넘겨줄 정도로 ‘희생’을 한 것이나 진배없지 않은가. 뜨거운 햇볕 속에서 생각했었다. 때가 되어 한국에 돌아가도 아마도 난 부엌을 들어가지 않게 될 것이라고. 사진을 보아하니 그릇도 모두 애들 아빠에 맞게 재배치되었고 냉장고 속에 든 재료들도 그가 일하기 좋게 놓여 있었으니까. 어렵사리 자리 잡은 요리 잘하는 자상하고 아름다운 남자, 멋있는 아빠의 자리를 일거에 뺏는 것은 아주 가혹한 처사가 될 테니까 말이다.
녹두 거피를 두 시간씩 골라내며 느리게 꼼꼼하게, 신데렐라처럼 일하던 사람을 이제 베테랑 요리사처럼 키워냈다. 나는 지금 한 해 먹을 김장을 담그고 근사한 일품요리를 척척 해낼 때가 많지만 아직 부엌의 센터 자리를 되돌려 받지는 않았다. 더욱더 그가 부엌과 요리의 세계에 더 깊이 들어가기를 바란다.
어쩌면 지금 딸을 그렇게 해먹일 수 있는 요맘때가 가장 아름다운 시절일 거라 생각한다. 아직은 딸들에게 밥을 해줄 수 있는 건강과 능력이 있으니 얼마나 큰 지복인가. 언젠가 우리는 툭 하고 건강을 잃을 것이다. 내 몸을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망연한 상태가 될 것이다. 지금이야 아기 캥거루처럼 품 안에 들어앉아 절대 독립하지 않겠다지만 언젠가 딸들이 훌쩍 주머니 같은 둥지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매일 저녁 밥상을 차리고 요리에 가장 능숙한 내가 다시는 어디도 가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했다 해도 별안간 떠날 일이 생길 것이다. 알 수 없는 미래, 우리는 그저 딱 하루하루씩만 잘 살아내면 된다고 생각한다.
백만 년 만에 부엌에 들어가더니 남편이나 아들이 수백 번을 자기를 불러댄다고. 철이 너무 없다고, 귀찮다고, 차라리 안 하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뒤치다꺼리하는 게 더 힘들다고, 내가 하는 게 백번 낫겠다고 결정하는 여자들의 말은, 얼토당토않다. 부엌에서 나가는 게 도와주는 거라며 남자를 아들을 부엌에서 밀어내는 그녀들의 말이 가당찮게 들리는가. 그 남편들, 몇십 년이나 살아서 본 것도 많고 할 줄 아는 것도 많잖아. 다른 일 잘하는 건 그렇게 의기양양하면서 부엌일 못 하는 건 아예 부끄러워하지도 않잖아. 부끄러움 모르는 머리카락 허연 사람을 철없다는 ‘워딩’으로 올려쳐 주면서 귀여움까지 획득하게 해주는 하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여자들은 너무 속이 깊은 건 아닌가.
천신만고 끝에 부엌을 통째로 넘긴 ‘철없는 여자’인 나로서는 귀염을 받지는 못하겠지만 이렇게 생각한다. 가르쳐줘야 한다고, 그 남자가 성장할 수 있게, 철이 있어지도록, 그래서 철없음의 징그러운 귀여움 말고 철든 남자의 멋짐을 획득할 수 있도록, ‘(부엌)불의 관문’을 통과할 수 있도록 담금질을 해주는 게 나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