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사이드 드라이브 370번지,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730번지>
번역되지 않은 책, 번역되지 않는 사회 3
Marie Luise Knott, <370 Riverside Drive, 730 Riverside Drive: Hannah Arendt und Ralph Waldo Ellison 17 Hinweise>
2022년 출간된 마리 루이제 크노트의 책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370번지,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730번지>는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흑인 작가 랠프 엘리슨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로부터 출발한다. 1965년 7월 29일 작성된 편지에는 엘리슨이 아렌트를 비판한 내용이 완전히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사건은 1957년 9월 4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남부 아칸소주의 리틀록시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로 15살의 학생 하나가 등교하고 있다. 주위를 둘러싼 성난 군주들이 그에게 침을 뱉고 욕을 한다. 그가 흑인이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이미 3년 전 학생들의 인종을 분리해 학교를 배정하는 것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리틀록시는 연방 정부의 판결에도 흑인 학생을 공립 고등학교에 받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9명의 흑인 학생은 학교에 등록 했고 여러 난관을 뚫고 9월 4일 첫 등교를 시도했다. 애초 9명은 함께 등교를 하기로 계획했지만, 그중 한 명은 집에 전화가 없어 최종 모임 장소를 전달 받지 못했다. 결국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한 장면이 만들어졌다. 당당한 걸음으로 자신의 갈 길을 가는 한 흑인 소녀, 그리고 그를 둘러싼 성난 백인 군중.
참고: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09482.html
아렌트는 한 잡지사의 의뢰로 „리틀록에 관하여(Reflections on Little Rock)“라는 글을 쓰게 되었다. 하지만 독자가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아렌트는 백인 군중이나 지방정부 및 학교 당국이 아닌, 학교를 정치 무대로 삼은 흑인의 권리 운동을 비판했다. 아렌트는 교육은 공적 영역이 아니라 사적 영역이기 때문에 학교를 정치적 투쟁의 무대로 삼은 것은 실제로 꼭 필요한 투쟁을 약화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아렌트는 당시 미국의 여러 주에 존재했던 인종 간의 혼인 금지법 같은 것들이 시민의 기본적 평등을 위해 가장 먼저 폐지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아렌트는 사적이고 사회적인 공간에서 필요한 상호 간의 존중은 법으로 강제할 수 없으며 오랜 시간이 필요한 사회적 과제라고 생각했다. 반면 시민 사이의 공적 평등은 정치를 통해 단번에 달성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아렌트에게는 정치가 개인이 가진 고유성을 유지하며 한 사회 안에서 존중받는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정치 또는 국가의 공권력이 개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도록 제어하는 것도 중요했다.
같은 맥락에서 아렌트는 성난 군중 사이로 아이들을 등교 시킨 학부모를 비판했다. 아이들은 타인의 폭력으로부터 절대적 보호가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학창 시절을 회고했다. 아렌트의 어머니는 그가 학교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할 경우 당장 집으로 돌아오도록 교육했다. 그리고 아렌트가 차별로 인해 집으로 돌아오면 학교의 관리자에게 항의 편지를 썼다. 아렌트는 리틀록의 흑인 학부모가 아이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9명의 아이가 학교에 다니는 데 성공하더라도, 학교 내에서의 폭력과 인종차별을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아렌트는 거센 비판을 받았고, 해당 에세이와 <전체주의의 기원>의 일부 내용은 훗날 그를 백인 인종주의자로 평가하는 근거가 되었다. 아렌트는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67년의 짧은 편지에서 아렌트는 자신의 글에 대한 엘리슨의 비판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엘리슨은 한 인터뷰에서 아렌트가 흑인 아이가 노출되는 일상적인 폭력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엘리슨은 흑인 아이가 자라나는 과정에서 도처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흑인 아이가 스스로를 보호하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자율적인 성격은 오히려 그 과정에서 탄생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보호를 받은 아이는 나중에 세상에 나갔을 때 훨씬 더 큰 좌절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엘리슨이 쓴 소설 <보이지 않는 인간>의 내용 또한 희망을 품은 흑인 젊은이의 좌절과 연결된 것이었다. 엘리슨은 리틀록 고등학교의 흑인 학생들에게 그 사건은 일종의 성인식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370번지,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730번지>는 아렌트를 변론하는 책도, 그의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책도 아니다. 책은 17개의 키워드를 통해 아렌트의 사유와 미국 흑인들의 현실과 생각을 병렬적으로 보여준다. 저자는 한편에서 아렌트의 사유를 추적한다. 아렌트는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 속에 사유하고 글을 썼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유는 사회적 소수의 고민과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작가가 다른 한편에서 다루고 있는 흑인의 삶과 정치적 사유는 아렌트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미국의 노예제 역사 속에서 그들은 유대인과는 다른 방식과 종류의 폭력에 오랫동안 노출되었다. 타자의 고통에는 길고 고유한 역사가 있다.
엘리슨에게 편지를 보낸 이후 아렌트가 미국의 흑인 운동에 관한 이전과 다른 새로운 발언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자는 아렌트의 사유로부터 연결점을 찾고 있다. 아렌트는 그 후 비폭력 시민불복종을 어떻게 헌법에 보장된 권리로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했고, 과거 시대와 새로운 시대 사이에 놓은 어두운 심연을 단번에 뛰어넘기 위해 새로운 세대에는 새로운 사회계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미국 사회에 존재하는 오래된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아렌트와 엘리슨은 같은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에 살았다. 유대계 철학자 아렌트와 흑인 작가 엘리슨의 삶은 같은 거리에 위치하고 있지만 같지 않았다. 그들이 다른 길에서 같은 길로 들어섰는지, 같은 길에서 다른 길로 떠나갔는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아렌트는 내가 가장 자주 읽는 작가 중 하나이다. 독일에 살게 되면서 특히 아렌트에 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아렌트는 인간이 이미 존재하는 세계 속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했다. 다른 동물과 다르게 인간은 기존 세계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으며, 자신이 태어난 세계와 불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막 새로운 세계에 도착한 인간은 타인의 환영과 도움이 의존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새로운 세계에 내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정치적 존재가 된다. 아기의 울음처럼 타인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는 목소리가 필요하다.
한국에서도 아렌트는 자주 언급되는 학자이지만, 특히 독일에서는 그에 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다양한 책들이 계속해서 출간되고 있다. 아렌트의 사유와 독일의 나치 경험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역사 속 반유대주의에 관한 연구가 계속해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반유대주의 목소리에 대한 사회적 저항도 강한 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일 사회가 모든 차별에 민감한 것은 아니다. 아렌트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삶을 잘 몰랐던 것처럼, 타인의 고통은 늘 새로운 이해를 필요로 한다. 독일에서 가장 큰 이민자 집단인 터키 사람들에 관한 기사를 참조하며 이 글을 마친다.
참조: https://www.ildaro.com/9757
독일이 저널리스트, 번역가, 작가인 마리 루이제 크노트(Marie Luise Knott)는 오랫동안 한나 아렌트의 사유에 관한 연구 및 저술 활동을 해왔다. 그의 저서 중 <탈학습, 한나 아렌트의 사유방식(Verlernen: Denkwege bei Hannah Arendt)>은 2011년 한국에도 출간되었다. 2022년 작인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370번지,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730번지>는 철학 에세이에 수여하는 „트락타투스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