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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카페 딸 Oct 02. 2022

가족 빙하기

할아버지, 진정한 바리스타 되다. 

할아버지카페가 개업하고 딱 1주년을 맞았을 때 일입니다. 개업 효과는 빛을 다 한지 이미 오래전이었지요. 게다가 커피 로스팅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았을뿐더러, 그 맛도 들쭉날쭉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딸 사장이 예전처럼 유통회사에서 원두를 사다 쓰는 것이 어떠냐는 이야기를 종종 꺼내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 작은 골목에 경쟁업체 또한 여러 곳 생겼습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프랜차이즈 매장도 있고, 또 다른 한 곳은 제과점과 카페를 겸하는 곳이었습니다. 상황이 이쯤 되다 보니, 저는 아주 사소한 일로도 신경이 예민해져서 이웃과 다투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가게 앞에 자동차를 주차하는 문제부터, 이웃 주민이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문제까지도 전부 다툼 거리였습니다. 굳이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가게의 형편이 어떨지는 이미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생각합니다.      


다툼이 잦은 것은 가족들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게를 차리는데 저마다 돈을 들인 아이들 모두 그 무렵에는 재정 상황이 좋지 못했습니다. 아들은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딸아이는 회사를 그만둔 상황이었습니다. 거기에 가게 사정까지 우리 가족의 뜻대로 되지 않았으니, 저마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불만과 원망이 많았습니다. 결국, 사소한 말끝에도 감정이 상해서 다투는 일이 많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가족 중 가장 많이 갈등을 빚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습니다. 원인은 아주 간단했지만, 가장 고질적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너희의 아버지라는 생각, 그 자체였으니까요.   


아무리 제 놈들의 머리가 굵고 아비보다 기력이 좋은 청년이라 해도, 놈들을 키우고 입히고 가르친 것은 이 아비입니다. 제가 아무리 부족하고 제 놈들의 성에 차지 않더라도, 아비는 아비이지요, 게다가 저에게는 제 나이만큼의 세상을 살아온 경륜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산삼도 100년을 묵으면 영물 소리를 듣습니다. 하물며, 사람인 아비에 비하겠습니까. 저 또한 100년까지는 아니더라도 칠십년을 넘게 살았습니다. 제 놈들이 아무리 오래 살아봤자, 저만큼 오래 살았겠습니까. 그러니, 오래 살아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제가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은 지금껏 제가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세상이라는 것이지요. 놈들이나 나나, 처음 경험해보는 세상이란 것을  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모르는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저 같은 늙은이보다 젊은 놈들이 훨씬 낫지요. 하지만 저는 놈들의 아버지이고 싶었습니다. 그것마저 제 손에서 놓아버리면, 정말로 제 쓸모가 다 한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저는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 속의 어느 날이 있습니다.

      

딸의 기억을 빌자면 2019년 5월 18일이었고 토요일이라고 하네요. 그날도 우리 가족은 아침밥을 먹다가 장사방법에 대한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아 크게 말다툼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집사람의 손을 잡고 나와 카페로 향했습니다. 그날은 종일토록 비가 내렸고, 가게에는 손님이 한 명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간에 제가 벌인 여러 가지 문제들로 가게의 손님이 끊어진 것을 저 또한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에 대한 가책 또한 상당했지요. 저는 어떻게든 이 곤란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뜻대로 될 리 없었습니다. 전직 도인의 눈으로 보더라도. 제가 순리에 맞지 않는 일을 억지로 벌이고 있는 것이었으니까요. 


결국, 오후 세 시 무렵이 될 때까지 우리 부부는 커피 한잔 팔지 못했습니다. 제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초조해졌습니다. 위기감 또한 상당했지요. 결국, 딸아이가 집사람이 전화를 받고 가게에 왔을 무렵엔, 온몸이 쪼그라들고 얼어붙어서 발걸음을 떼는 것도 힘이 들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가게 구석에 앉아있던 우리 부부를 발견한 딸아이의 표현을 빌자면, 제 얼굴이 까만 콩 조림 같았다고 하더군요. 언제나 제 딸은 한결같은 데가 있습니다. 어릴 때나 늙어서나 버르장머리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딸아이는 별말 없이 우리 부부를 태우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집으로 향하는 사거리에서 딸아이는 자동차 핸들을 틀어 엉뚱한 곳으로 향했습니다. 추운데, 우리 우동이나 먹고 가자. 딸아이가 말했습니다. 그 무렵 딸아이는 그리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아도 금전적으로 꽤 쪼들리는 듯했습니다. 그 와중에 교외로 나가서 우동을 먹자는 말이 저는 퍽 고깝게 들렸습니다. 딸아이가 향하는 곳은 아마도 송추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유명한 수타 우동 집인 듯했으니까요. 


지금이 겨울이야 국물 타령하게. 계집애가 돈 아까운 줄도 모르고. 


결국, 물색없는 아비 노릇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한결같은 우리 딸이 제게 질 리 있겠습니까? 


그래? 그럼 집에 가서 김치랑 물만밥 먹고. 


되돌아오는 말도 어찌나 앙칼지던지. 그리고 제 옆에 있던 아내가 말없이 꿀떡 침을 삼키더군요. 저는 그 상황 자체로 울컥 화가 났습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밀릴 때 밀리더라도 꼭 한마디는 해야죠. 마흔 년, 네 맘대로 해라.      


하지만, 우리 가족이 식당에 당도하고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게임은 끝이 났습니다. 아마도 우리 가족은 일정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독립운동은 절대 못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먹는 것에 마음이 약한 위인들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아니, 사실은 그때 마음이란 것이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작은 세숫대야만 한 대접에 가득 담긴 우동을 단숨에 먹어치운 것도 모자라서 밥까지 말았으니까요. 그러다 언뜻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맞은편에 앉은 마누라와 딸아이도 입술에 뻘건 양념을 잔뜩 묻힌 채 갈빗살을 발라 먹느라 정신이 없더군요. 왜 허기가 지지 않았겠습니까? 아비 자식 할 것 없이 아침에 다툼이 일어 먹는 둥 밥술을 뜨고는 늦은 오후가 되도록 제대로 된 끼니를 한 번도 먹지 못했으니까요.  

    

그렇게 우리 가족이 부른 배를 두드리며 식당 밖으로 나왔을 때, 종일토록 내리던 비 또한 멈춰져 있었습니다. 해는 얼마 남지 않았지만, 날씨가 개어 여간 상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일렀습니다.  때마침, 신접살림을 차릴 아파트에 가 있던 아들 내외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니 집 구경을 하자고요. 우리 가족은 아들 내외의 아파트를 구경하고 함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좁디좁은 모닝 자동차에 아들과 며느리, 여전히 얄밉고 싹퉁머리 없는 딸아이와 마누라, 저. 이렇게 다섯 식구가 옹기종기 끼여서 집으로 향했지요. 그리고 우리는 아들아이가 자주 듣는 오디오 클립이라는 것은 들었습니다.  


때마침, 우리가 먹고 마시는 물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물의 임계점에 우리 인생을 빗댄 이야기는 자주 들어 그다지 별 감응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끝머리에 나온 이야기는 어쩐지 제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순수한 물은 섭씨 0도를 기준으로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스스로의 성질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영하 상태에서 얼음이 되던가, 아니면 영상의 상태에서 그냥 액체로 머물러 있던가.      


글쎄요, 우리 가족은 앞으로 어떤 모양, 어떤 성질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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