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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카페 딸 Oct 02. 2022

할아버지 바리스타와 노란 지붕 로스터기

할아버지, 진정한 바리스타가 되다. 

할아버지카페의 상징이라면, 

멋들어진 중절모에 하얀 수염을 기른 제 얼굴과 가게 입구에 놓인 노란색 로스터기가 아닐까 합니다.  


사실, 젊은 시절에는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을 만큼 한 인물을 했습니다만. 그것도 다 한때입니다. 결혼해서 둘째인 아들 녀석을 낳고는 듬성듬성 머리가 빠지기 시작해서 마흔 초반이 되었을 때는 저 또한 못 말리는 대머리가 되었지요. 그 후로는 제 외모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니, 사실은 여력이 되지 않을 만큼 사는 게 바쁘기도 했지요. 그리고 차츰차츰 외모와는 영 상관없는 할아버지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랬던 제가 바리스타가 된 이후로 새삼 멋있다 근사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처음엔 얼굴이 벌게질 만큼 쑥스러웠던 것이 사실인데, 요즈음 들어서는 젊은 친구들의 칭찬이 그리 싫지 않습니다. 한 번은 제 속마음을 집사람에게 털어놓았더니, ‘영감이 참 주책이 없다’더군요. 그래도 가끔은 손님들의 칭찬이 기다려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외모만 근사하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할아버지카페를 개업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 무렵에는 이미 로스팅된 원두를 유통회사에서 사 사용했습니다. 커피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했을뿐더러, 그 무렵에는 그냥 장사꾼의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커피만 많이 팔면 되지 뭐, 하는 생각이었지요. 하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장사가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가게를 찾아온 손님들이 저를 바리스타라고 부르며, 제 외모를 칭찬할 때마다, 뭐랄까요? 손님들에게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알고 보면, 나는 손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지요. 때때로 손님들이 커피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물어올 때, 바리스타라는 사람이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지 못하면 나 스스로 어찌나 초라하게 느껴지던지요. 가끔은 제가 손톱만큼 작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가끔은 양심이 괴롭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제 본모습을 들키게 될까, 불안하고 무서웠지요. 인제 와서 말이지만. 제가 유난스레 극성을 부려가며 커피 로스팅을 배운 이유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젊고 유능한 양반들에 비하면 그리 자랑할 만한 실력은 못 되지만, 적어도 저 자신에게는 당당할 수 있으니까요. 요즘 아이들은 저 같은 늙은이가 나이 유세를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지만. 살고 보니 제 육신은 늙어도 정작 마음속에 자리한 나 자신의 모습은 늙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럼 죽는 날까지, 내 안의 청년 같은 사내 하나는 잘 건사하고 살아야지요.     


할아버지카페에서 손님들에게 제가 직접 볶은 원두로 커피를 내려 제공하기 시작한 그것은 개업하고 대략 반년쯤이 지나서였던 것 같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겠지만. 우선은 인터넷을 뒤져서 중고로 나온 소형 로스터기를 하나 샀습니다. 가스버너에 조그만 원통을 올려서 돌돌돌 회전하는 방식의 로스터기였지요. 제 기억이 맞는다면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라인 구매를 한 물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솔직히 그동안은 아내와 아이들에게 입으로만 아는 척을 했지, 실제로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이용해서 뭔가를 사 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스마트폰에 신용카드를 저장하느라 반나절 넘게 애를 먹었습니다. 나중에는 그마저도 불안해서 물건 주인에게 계좌번호를 따로 받아 돈을 입금했지요. 그다음에는 전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고 마포에 있는 유명한 생두 회사에 갔습니다. 그리고 나라에서 매월 나오는 노령연금으로 예가체프, 케냐, 부룬디... 어디서 주워 들어 알고 있던 원두를 종류별로 사 왔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우리 할아버지카페의 사장인 딸아이에게 부탁을 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앓느니 죽지요. 아마도 제가 이와 같은 거사를 치르기 전에 딸아이가 먼저 알았다면, 귓전을 짜랑짜랑 울리는 비명소리가 적어도 사나흘은 가게 안에 울려 퍼졌을 겁니다.       


사실, 생두를 처음 로스팅할 때만 하더라도 곧장 손님에게 팔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저 혼자 공부를 좀 해볼 요량으로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웬걸. 막상 볶아놓고 보니 제가 한 것 치고는 퍽 근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일을 내고야 말았습니다. 집사람과 딸아이가 가게를 비운 사이, 그라인더 호퍼에 지금껏 쓰던 유통회사의 원두 대신 제가 볶은 원두를 쏟아부었지요. 물론, 말로는 다 하지 못할 우여곡절이 여러 번 있었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 가게는 제가 직접 로스팅한 원두를 사용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할아버지 카페 입구에 놓인 노란색 지붕 로스터기가 있습니다. 우리 집에 들어온 것은 대략 삼 년 전쯤되었습니다. 로스터기 그 자체로 할아버지카페의 품격이 높아졌달까요? 그와 함께 저도 진정한 바리스타가 되었지요.      


요즈음은 잘 쓰지 않는 직화용 로스터기입니다. 맨 처음 제가 로스팅을 배울 때 사용하던 소형 로스터기를 열 배쯤 키워 놓은 그것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사실, 우리 집 로스터기는 요즘 거래되는 기계들에 비하면 가격이 무척 저렴한 편입니다. 그래도 만만치 않은 가격이지요. 때문에 맨 처음 로스터기를 가게에 들여올 때, 딸아이 는 저에게 가격을 삼 분의 일쯤 줄여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물정 모르는 저는 퍽 순진하게, 딸아이가 알려준 가격을 손님들에게 말하고 다녔지요. 우리 딸은 제 아버지가 반년 넘게 바보 노릇 하는 것을 보면서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요. 생각하면 '못된 것 같으니라고'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딸아이의 맹랑한 행동이 아주 이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제대로 된 가격을 알았다면, 도리어 제가 딸 사장에게 물정 없는 짓을 했다고 여러 날 군소리를 했을 겁니다.      


그래도 로스터기를 볼 때면 저는 마음이 흐뭇합니다. 우리 딸 사장이 이제는 제대로 바리스타 노릇을 하게 된 아버지에게 주는 선물이니까요. 하지만 가끔은 이 물건이 정말 선물인지, 아니면 제 아비를 작정하고 부려먹을 생각으로 가져다 놓은 애물단지인지 종종 헷갈리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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