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카페의 시작
사실, 할아버지 카페는 일부러 정한 개업 일자가 없습니다. 가게의 인테리어 공사가 끝나고 커피머신을 시험 가동할 때부터 손님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가게 공사를 하는 내내, 저희가 하는 일이 내심 궁금했던 동네 주민들이 커피 냄새를 맡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게 구경을 청했기 때문입니다. 가게에 구경삼아 들어온 주민들에게 돈을 받기도 참 난감한 일이지요. 우리 가족들은 한잔 두 잔 맛보기로 커피를 냈습니다. 이웃들 또한 아직 개업도 하지 않은 가게서 공짜로 커피를 받아먹을 수는 없다며 탁자 위에 돈을 두고 갔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쯤 있었을까, 사월초파일을 맞았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평소 도선사의 신실한 불자였던 집사람의 지인들이 소식을 듣고 할아버지카페에 몰려들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저도 모르게 헛웃음부터 나옵니다. 카페가 아니라, 마치 뚝배기집이나 기사식당을 개업한 것 같은 모양새였거든요. 여기저기서 주문한 음료를 내오라고 아우성이 말이 아니었지요. 아직 일이 손에 익지도 않은 우리 두 부부가 그 많은 손님을 어떻게 다 치렀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결국 저희 가게는 특별히 정해진 개업 일자 없이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지요. 굳이 개업 일자를 따져야 한다면 영업허가증이나 사업자등록증에 적힌 날짜가 되겠군요.
그렇게 가게 장사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 무렵부터 저는 손님들로부터 할아버지 바리스타라고 불렸습니다. 제 아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담님으로 통했지요. 그렇다고 우리 마누라가 앞서 말한 것처럼 빨간 연지를 짙게 바르고 야한 옷차림을 한, 그런 타입의 마담은 아닙니다. 아내는 사람들이 자신을 마담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자꾸만 그런 생각이 나서 민망하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싫지는 않았던가 봅니다. 가게 밖에서도 낯 모르는 사람들이 마담님이라고 부르면 ‘네~’ 하고 어찌나 신나게 대답을 하던지요. 사실, 아내처럼 저 또한 바리스타 명칭이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과장님, 부장님, 소싯적 월급쟁이 노릇을 할 때를 빼놓고는 일평생 사장님, 선생님으로 불리다, 바리스타라고 불리기는 또 처음이었으니까요.
아직 일이나 호칭이 몸에 익지 않아 어색하기는 했지만. 제 마음은 뭐랄까요? 저도 알고 보면 빼도 박도 못 하는 대한민국 남자라서, 자기표현을 하는 데 그리 능숙하지 못합니다. 그것도 불편한 감정보다 좋은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합니다. 속으로는 아랫배가 저절로 꿀렁거릴 만큼 좋으면서도 정작 겉으로는 ‘에이, 사람이 다 그렇지 뭐’ 하고 손사래 한번 치는 것이 전부니까요. 그래도 이번엔 그보다 더 좋았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마치 집사람하고 연애할 때처럼 가슴이 설레고, 날아갈 듯이 몸이 가벼웠습니다.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저희처럼 늙은 사람이 못 견디게 너무 좋으면, 숨이 넘어갈 수도 있다고요. 나중에는 저 또한 숨이 넘어갈까 봐 자다가도 한 번씩 일어나서 숨을 고르고 잘 정도였지요. 글쎄요. 우리 애들은 하나같이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럴 거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카페를 하기 전, 평소에도 커피를 참 많이 마셨거든요. 그것도 노란 봉지에 든 커피믹스를 하루에도 서너 잔씩 꼬박꼬박 마셨지요.
부부는 일심동체, 그 무렵 우리 집사람 또한 잠 못 이루기는 저와 마찬가지였지요. 이 사람이야말로 ‘커피’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 집사람은 워낙 카페인에 예민한지라, 콜라나 초콜릿만 잘못 먹어도 밤잠을 설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희 부부도 카페를 하면서 처음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쩌면 젊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세련된 요즘 카페가 아니라, 옛날 사람들이 하는 카페라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가게를 찾은 손님들이 할아버지 바리스타나 마담님과 대화를 청하려고 일부러 당신들 테이블에 커피나 음료를 하나 더 주문하는 것이지요. 저는 그나마 요령이 있어서 꼭 커피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스무디나 에이드, 생강차 같은 것을 바꿔 마시기도 했지만, 고지식한 집사람은 그 못 마시는 커피를 주는 대로 받아 마셨지 뭡니까.
잠이 오지 않는 우리 집사람은 밤새도록 온 집안을 돌아다녔습니다. 아들이 잠든 방의 문을 열어보기도 하고, 딸아이의 방도 기웃거렸습니다. 유난히 예민하고 까칠한 딸아이가 억지로 잠이 깨서 싫은 소리 한마디를 빽, 하고 나면, 괜히 뿌루퉁해져서 안방으로 돌아왔지요. 사실, 그런 마누라가 성가시고 귀찮기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좀 잠들만하다 싶으면, 꼭 옆에 와서 장난을 겁니다. 그냥 장난도 아닙니다. 코를 비틀기도 하고, 입술을 잡아당기기도 하지요. 때로는 수염 가닥을 일없이 잡아당기기도 합니다. 보통은 그저 모른 척, 참아 넘깁니다. 그러면 으레 잠이 들었거니 하고 맙니다만. 행여 제가 아직 잠들지 않을 것을 알면 꼼짝없이 잡혀서 마누라의 이야기 친구를 해줘야 하지요.
그 무렵의 집사람은 참, 별 시답지 않은 이유에도 숨이 넘어갈 듯이 까륵까륵 갈매기 우는 소리를 내면서 웃었습니다. 야심한 밤에는 행여 창문 너머 이웃집에 들릴까, 걱정될 때도 있었습니다. 마누라 덕분에 잠에서 깬 저는 졸린 눈을 애써 추켜올리며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뭐가 그리 좋아서 오밤중에 사람까지 깨워서 갤갤대누?
이제 좀, 사람처럼 사는 것 같잖아. 이 나이에 일도 생기고, 돈도 벌고.
그리고는 가게에서 겉어 온 몇 푼 안 되는 현금을 세고 또 세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습니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아도, 아내 또한 오랫동안 제 마음과 같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내는 저와 결혼하기 전, 처녀시절부터 장사를 했습니다. 처음엔 작은 서점을 열었다가 결혼을 하면서 접었지요. 그러다 애를 낳고 집에만 있는 것이 답답했는지, 또다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희 식구는 수색 근처에 살았는데, 근처 부대에 훈련을 오는 예비군을 상대로 고무줄이며 김밥을 팔았지요. 새댁이 겁도 없이 사내들을 대상으로 하는 행상에 나선 것이 젊은 남편의 마음에는 어찌나 못마땅하던지요. 하지만 아무도 우리 마누라를 말릴 수 없었습니다. 그다음엔 동네서 작은 구멍가게를 열었고, 또 그다음엔 식당을 했지요. 이렇게 평생 장사로 잔뼈가 굵은 아내였지만, 이 사람도 역시 저와 같이 나이를 먹고 몸이 굼떠지니 장사를 놓고 집안에 붙박이로 지낼 수밖에 없었지요. 저는 그제야 아내가 왜, 한시도 집에 붙어있지 않고 산으로 절로 돌아다녔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가더군요. 저만큼이나 마음이 답답하고 비통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나, 스스로 늙어가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