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카페의 시작
사람들은 우리가 옛날 정육점을 카페 자리로 얻은 것에 대해 부처님의 가피와 점지가 있어서라고 말들 합니다. 그러나 막상 카페를 개업할 생각을 하니, 우리 부부는 무척이나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커피에 대한 문외한이었습니다. 모르기는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지요. 우리 며느리의 표현을 따르자면, 커. 알. 못. 이라나요. 그것은 제 주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카페나 커피를 잘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비슷한 업종의 장사를 해 본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도 굳이 손을 꼽으라면, 제가 청년일 때 자주 들르던 백조 다방의 마담 누님이 전부였지요. 게다가 우리 마나님은 유난히 카페인에 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콜라를 마시고도 취하는 사람이었지요.
그러다 운 좋게, 딸아이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단골 카페의 사장님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습니다. 가게를 계약할 때만 하더라도, 차라리 위약금을 물고, 가게 계약을 해지하는 것이 어떠냐고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던 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일단 가족들이 카페를 차리는 것에 확고한 의지를 보이자, 딸아이도 그제야 적극적으로 나서 주었습니다.
그 유명한 홍대에서 골목 장사로 이십 년 넘게 카페를 해 온 사람이어서 믿을 만했지요. 게다가 성품도 퍽 넉넉하고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없는 시간을 쪼개어서 주변 카페들을 둘러보고, 카페에서 쓰이는 설비와 기계 들이는 일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거의 한 달가량 말귀 어두운 우리 두 늙은이를 데리고 바리스타 교육까지 했지요. 그러고 보니, 우리 부부의 첫 번째 커피 선생님인 셈이네요.
그 무렵, 오랫동안 쌓여있던 마음의 울분은 제 생각처럼 쉽게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도시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면서 나, 스스로 쓸모없는 퇴물이라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냥 생각뿐만 아니었지요. 저보다 어리고 젊은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받은 괄시도 한몫했지요. 인제 와서 생각하면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기보다 제 자격지심이 더 컸지만요. 그래서일까요. 그 무렵에도 저는 화를 잘 참지 못했습니다. 그리 큰 문제가 아니어도, 제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곤 했습니다. 심지어는 교육을 받다가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뛰쳐나가는 일도 많았지요.
그리고 카페 사장은 그런 저를 달래려고 연희동 철길까지 함께 무한정 걸어주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워낙 물색없이 착하다 보니. 저는 그에 대해 도움을 받으면서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사실은 제가 배우는 바리스타 교육도 그저 가게를 차리는데 필요한 기술을 배우는 것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그 양반이 그냥 바리스타도 아니고, 바리스타 선생님들의 선생이란 사실을 안 것은 그 후로 한참이 지나서였지요.
사실, 저는 평소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길. 마음이 꽤 열려있고, 생각이 유연한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과도 라테나 꼰대라는 편견 없이 잘 통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물론, 저 스스로 무용하다는 생각에 젊은 사람들을 괜스레 적대적으로 대한 적도 있지만. 그런데도 제 연배의 다른 노인들과는 분명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생각은 저 혼자의 착각이었습니다. 세상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제 딸아이가 가게의 인테리어 공사를 하는 동안, 이 아비의 마음속 자부심을 참으로 야무지게 한 가닥도 남기지 않고, 와장창 부수어 놓았지요. 우리 부녀는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고자, 가게의 인테리어 공사를 직접 하기로 했습니다. 딸아이는 세상 말랑 콩떡 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평소에도 남자들이 하는 인테리어 공사를 스스로 곧잘 하던 재간 꾼이었고, 소싯적의 일솜씨로는 저 또한 둘째가라면 서러웠기에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지요. 게다가 가게 자리가 원래 정육점이었던 곳이어서 사방이 타일로 둘러 쳐져 있었습니다. 잘만 꾸미면 요즈음 유행하는 뉴트로 스타일, 북유럽 스타일의 인테리어가 가능하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웬걸요. 우리 부녀는 가게의 인테리어 공사를 하는 내내, 단 하루도 싸우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분명 딸아이가 그려놓은 도면과 주문대로 공사를 한다고 했는데, 정작 딸아이의 눈에는 전부 성에 차지 않고, 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습니다. 처음엔 그저 까탈스러운 딸아이가 공연한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모든 일의 결론은 늘 제 잘못이었습니다. 어라? 왜 이게 여기에 이렇게 그려져 있는 거냐? 그리고 귀청이 찢어질 듯한 딸아이의 비명이 열 평도 채 되지 않는 가게 안에 울려 퍼지기 일쑤였습니다.
인제 와서 솔직히 고백하건대. 그래도 생각만큼 크게 서럽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았습니다. 그 모든 사고를 저 혼자 벌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민등록상 나이로 저와 동갑인 셋째 처남이 늘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처남과 매부이기 전에 수십 년이 넘도록 손발을 맞춰온 직장 동료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그 머나먼 사우디도 함께 다녀왔지요. 하지만, 가게 공사를 하면서,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고, 눈빛만 봐도 죽이 척척 맞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죽이 잘 맞는 만큼 일을 망치는 속도 또한 전광석화 같았지요. 우리 아이들의 표현에 따르면, 저와 처남이 하는 일은 전부 백조 다방 스타일이랍니다. 최백호 씨의 노래 구절처럼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이 도라지 위스키를 따라주는> 그런 옛날 다방이라나요. 알고 보면 백조 다방 마담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우리 아내를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제 녀석들도 생기지 않았을 텐데. 그런 내막도 모르면서 녀석들은 무조건 촌스럽다고 핀잔부터 주더군요. 시시콜콜 옛날이야기를 할 것은 아니지만, 섭섭한 것만은 속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가게의 인테리어 공사는 진도가 좀처럼 나가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보는 동네 사람마다 언제 개업을 하느냐고 성화를 했지요. 그래도 다행히, 해외에서 일하던 아들아이가 휴가를 내어 한국에 돌아온 후로 공사도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녀석이 저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던가, 인정머리 없이 깐깐하기만 한 제 누이를 저 대신 나무라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 얼마간은 그런 듯도 보였지만, 알고 보니 그 반대였지요. 은근슬쩍 제 아버지를 눙치고 달래는 솜씨가 세상 둘도 없는 능구렁이였지요. 어디서 그런 기술을 배워왔는지, 매번 아들 녀석에게 당했다 싶으면서도 참 신통하더군요.
그리고 드디어 할아버지카페의 간판이 올라갔습니다.